문을 열고 나가는 재원이의 뒤를 따라가면
서, 나는 그 여자를 보고 동정심에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너무 기대는 마시고...
얘기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병실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여자를
돌아보았다. 사지가 결박되어있는 채로 처절
하게 몸부림치는 그 여자의 모습을 보니 이상
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정신 병동 복도를 말
없이 걸어나오는데, 재원이가 말을 건넸다.
“저 여자 말 어때? 진짠 거 같아?”
“휴... 모르겠다, 모르겠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그래?
그런 내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줄게...
날 따라와.
저 여자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 레지던트를
만나보자.”
재원이는 나를 데리고 정신과 레지던트 당
직실로 갔다.
거기에는 아까 재원이와 나를 병동으로 들어
가게 해 주었던 레지던트가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맞아주면서, 그 여자
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일한씨라고 했죠?
어때요? 그 여자 얘기 들어보니깐...”
“잘 모르겠어요...
저도 이런 얘기는 그래도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정상인 취
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솔직히 잘 구분 못하겠어요.
그 여자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살
인을 하고 다니는 악령을 본 것인지...”
그 레지던트는 내 얘기를 듣더니, 빙그레 웃
으며 담담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그 환자의 얘기만 듣고는 아무도 그
얘기의 진실성을 알 수가 없죠.
일한씨, 그런 얘기 들어봤어요? 진실의 양
면성이라는 것이요...
진실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래요.
그 환자의 얘기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그 환자를 치료하고 검진해
본 결과, 그 여자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예요. 진실만을 말하고 있죠...”
그 여자가 진실만을 얘기했다는 레지던트의
말은 나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사실을 말했다면...
그 여자가 본 것이 전부 사실이라는 거예요?”
당황한 나의 질문에 그 레지던트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글쎄요...
그 환자가 진실을 얘기했지만, 사실을 얘기
하지 않았다고 해두는 것이 맞죠.
그 환자는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얘
기했어요.
그런데 그 진실이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라
고는 할 수 없는 것이죠.
그 환자가 이 병원에 이송되었을 때는 환자
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살인 용의자로 왔어요.
사람을 난도질해 죽인 범인으로 병원에 왔
어요...”
나는 처음에는 레지던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지던트의 친절한 설명은 나를 큰
충격에 몰아넣었다.
“일한씨도 그 환자로부터, 무덤에서 나왔다
는 살인자 얘기를 들었을 거예요. 그 살인자의
악령이 톨게이트를 돌아다니며 살인했다는 얘
기였죠?
그 환자는 입원 첫날부터 그 얘기를 되풀이
했어요.
하지만 그 환자를 이송한 경찰의 보고서는
다른 진실을 보여 주었어요.
그 보고서에 따르면, 그 환자가 얘기한 모든
살인 사건은 바로 그 환자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는 것이였어요.
젊은 여자가 칼로 그 많은 사람을 난도질
해서 죽인 것이지요.
경찰은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정황증거로
그 환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집중
했다더군요.
그 환자가 받았다는 표에 묻었던 혈액은 다
름 아닌 그 환자의 피로 판명이 되었데요. 그
래서 그 날 그 지역 경찰이 아닌 담당 형사들
이 정산소에 온 것도 사실은 유력한 용의자였
던 그 환자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데요. 그러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지만...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사건 현장에
서 발견된 칼에서도 그 여자의 지문이 채취되
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 여자는 자기가 한
일을 전혀 기억못하고, 무덤에서 나온 살인자
가 모든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검진 결과 그 여자는 정신질환자로 밝혀졌어요.
자기가 저지른 살인을 진짜로 기억못하고,
전부 자기가 굳게 믿고 있는 그 악령이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있고...
아, 물론 약간에 의문은 있대요...
현장에서 태워진 채로 발견된 차는 도난차
량으로 발견되었대요.
그리고 타버린 시체의 신원은 밝혀내지 못
했대요.
경찰은 그 시체가 차를 훔쳐달아나다 죽음
을 당한 차량 절도범으로 결론 짓고, 신원파악
에 주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고요...
또 짧은 밤 시간에 그 환자가 그 먼거리를
왔다갔다 하며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도 약간
신빙성 없고요. 하지만 경찰 주장에 의하면 시
속 160킬로 정도로 달리면 살인하고 돌아올
수 있다더군요.
아무리 차가 없는 시간이라도, 심야 빗속을
그런 속도로 달렸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요...
그래도 가장 확실한 것은 그 여자였기 때문
에 살인범으로 체포했지만, 진술이 너무 황당
해서 정신감증을 의뢰했고...
결국은 정신질환자로 판명되어서 이 병원
에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 환자가 말한 진실의 다른 면
이지요...”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혼란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사람을 몇 명이나 난도질해서 죽
인 살인자라니...
갑자기 의문이 머리에 스쳤다.
“그 여자가 진짜 살인범이라면 살인의 동기
는요?
아니면,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미치게 된 원
인은 도대체 뭐지요?”
“이 얘기를 들으면 다들 그런 의문을 갖게
되지요...
다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상식때문이예요...
모두들 정신병 하면, 뭔가 큰 충격이라던가
아니면 성장기에 겪은 비정상적인 일이 원인
이 되어 발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아직 정신질환의 정확한 원인은 의
학계에서도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개인
적 경험이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빙
산의 일각이고요...
쉽게 말하면, 이유없이 미친다는 것도 성립
될 수 있는 거예요.
멀쩡하던 사람이 자다가 이유없이 급사하
듯이, 정상인이 어느날 갑자기 미쳐버릴 수 있
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미친 사람을 마귀 들렸
다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이 환자도 이유 없이 미쳐 버린 수많은 정
신질환자 중에 하나로 보는 것이 맞겠지요...”
나는 레지던트의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
도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
다. 나도 모르게 그 여자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지던트의 말이 휠씬 합
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귀신의 존재가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할말도 잊고, 찜찜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당직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그 침묵을 깨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아스라히 들렸다. 멀어서 그런
지 희미하게 들렸지만, 그 비명소리를 들으니
이상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그와 동시에 당
직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레지던트는 심
각한 표정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요? 또 시작했다고요?
지금 제가 가보죠.”
전화를 끊고 레지던트는 다급하게 일어서며
멍해있는 나와 재원이에게 얘기했다.
“그 여자 환자가 또 발작을 시작했다더군요.
매일 밤 심한 발작을 해요.
정말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지금 가 봐야하는데...”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도 없어 우리도 자리
에서 일어났다. 같이 당직실을 나서는데 레지
던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얘기했다.
“사실 나도 그 환자의 얘기를 듣고 나름대
로 알아봤어요.
그 동네 보건의로 제 동기가 하나 가 있거
든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환자가 말한대로 그
동네 묘지에서 시체를 한 구 못 찾았대요.
그것도 그 환자 말대로 살인 전과자의...
그리고 좀 무서운 얘기가 하나 있어요.
국립과학 수사 연구원에 다니는 선배가 얘
기해 준건대요.
그 신원을 알 수 없다는 타버린 시체 있잖
아요?
그 시체가 부검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는 거예요.
부검하기 위해 시체를 옮겨 놓았는데, 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
다는 거예요. 살아서 걸어나간 것처럼요...
국과수에서는 난리가 났더래요.
중요 피해자의 시체가 사라졌으니...
결국 용역회사의 착오로 화장된 것 아닌가
추측하고 종결지었다고 하더군요...
참 이상하지요...
그 환자 말대로 정말 그 시체가 살인마의
귀신이었을까요?...
잘 모르겠네요...”
그 얘기를 던지고 레지던트는 정신과 복도
저편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멍하니 선 채로 음산한
정신과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레지던트
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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