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정보 : Chet Faker - No Digg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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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 26살 남자로 대학원생입니다.
저는 소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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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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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무렵, 저는 왕따를 당했습니다.
인생 처음으로 굴욕을 겪고 저 자신의 약함에 화가 났습니다.
초등학생 무렵, 저는 공부도 운동도 꽤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친구도 많았고 정말 순조로운 인생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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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이론 물리학을 공부해 장래 대학교수가 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그런 말을 자주 했지요. 그러자 부모님은,
[그럼 중학교도 사립으로 가는 게 어떠니?]
그리하여 저는 별생각없이 사립중학교 수험을 결심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6학년, 7월달에 있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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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마지막 여름 방학, 저는 큰 입시학원에 다니게 됐습니다.
거기엔 같은 중학교를 목표로 하는 애들도 많았습니다.
7월달부터 등록했기 때문에 친한 아이는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혼자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들여다 봤습니다.
여름 방학 도중 모의 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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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 보람이 있어 모의시험에서 3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학원안에서 단번에 유명해져 친구도 많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엄청 칭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과묵하신 분이라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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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학원에서도 이야기 나누는 친구가 증가해서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시험.
지원자는 많았지만 어떻게든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합격 축하를 받으며 앞으로 시작될
중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학원에서처럼 중학교에서도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올라온 사람이 대부분이라
다른 초등학교 출신은 별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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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걸 즐겼기 때문에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친구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학교 출신인 저에게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그런 상태인채로 1달 하고 보름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러다 중간 고사를 보게 됐습니다.
이 학교는 성적 우수자의 이름을 담당 교과 선생님이 발표하곤 했는데,
저는 수학과 이과 성적 우수자로 언급되었습니다.
대놓고 기뻐할 순 없었지만, 내심 만세를 불렀습니다.
학원때처럼 이 기회를 빌어 친구들이 증가할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이 비틀리기 시작한 건 그 다음날부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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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 처럼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습니다.
허나 평상시와는 뭔가가 달랐습니다.
책상속에 넣어둔 교과서가 전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라커에 넣어둔 체육복도 사라졌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학교에 두고간 소지품 전부 부서져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때 아이들과 잘 지냈던 경험밖에 없었기에
설마하니 왕따를 당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폭행을 당하고 나서야 왕따를 당하는 걸 눈치챘습니다.
처음은 제 뒷통수를 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점점 도가 심해졌습니다.
나중에는 무릎으로 등을 치기도 했습니다.
너무 아파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저는 학교에 가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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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다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저를 자랑스러워하며 사랑해주시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가능한 밝은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마침내 저를 괴롭히던 그룹(10명 정도)의
리더에게 호출을 당하게 됩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번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무릎이 마구 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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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너는 오늘부터 우리 하인이야.]
저는 그말을 듣고 조금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런 걸로 왕따가 끝난다면 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 [응...알았어.]
리더 [이걸 읽어둬. 네가 할일이니까.]
그러면서 종이 한장을 남긴 채 가버렸습니다.
저는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훝어봤습니다.
순간 저는 제눈을 의심했습니다.
종이에 적힌 건 제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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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일 상납금을 바친다.
2. 샌드백은 저항하면 안된다.
3. 누가 말하든 [예]라고 말해라.
4. 누구랑 친한 척 하지 마라.
5. 도시락 먹지 마라.
6. 누구한테든 먼저 말걸지 마라.
7. 자기가 하인이라는 걸 잊지 마라.
8. 이 일을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라.
9. 우리가 보이면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해라.
이상의 행동을 한개라도 안지키면 처형한다.
저는 마지막에 적힌 처형이란 단어가 무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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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왕따 행위는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나마 무시당하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쪽이 많았지만
이후로는 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면 제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거나
화장실에서 물을 끼얹거나 코를 맞아서 코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시선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옆구리를 걷어 차인 적도 있습니다.
숨이 막혀 바닥에 넘어지니 아이들은 저를 마구 짖밟았습니다.
이를 악물며 견뎌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름 방학에 접어들어 공부합숙이란 게 시작됐습니다.
그곳은 학교와 달리 보는 이도 별로 없기에
왕따 행위는 보다 심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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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같은 곳에서도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제 식사는 공기밥 반절 정도에 그나마 반찬도 없었습니다.
이틀동안 먹은 식사라곤 공기밥 3그릇뿐.
당연히 합숙 장소에서 목욕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잡무계를 맡아 청소나 뒷정리를 도맡아야 했습니다.
잘 때도 마루바닥에서 잤습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었기에
딱딱한 마루임에도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면서 왕따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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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한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알겠어.
남자라는 생물은 그런 이상한 자존심이 있으니까 말이지.
사실 그렇게 괴로울 때는 그냥 내던지면 되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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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점심 시간때 였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매일 제 도시락을 만들어주셨지만,
저를 도시락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헌데 그날은 평소보다 괴롭힘이 더 심했습니다.
아이들은 제 도시락을 책상위에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우유를 뿌렸습니다.
제 머리카락을 부여잡더니 흩뿌려진 도시락 위에 제 얼굴을 문댔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절망한 건 그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근처에서 자초지종을 보고 있던 담임이 아이들을 조용하게 한 뒤 저에게,
[어이, xx. 그거 청소는 제대로 해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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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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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사람 있지.
성적만 좋다면 무슨 짓을 하던 신경 안쓰는 선생이.
정신이 미숙한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 이상한 놈이 되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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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은 저를 진심으로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 마음속은 분노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이란 사람들은 아무도 저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받고 싶단 생각도 사라지고 원망만이 자라났습니다.
그때까지는 저를 괴롭히던 아이들에 대한 공포심밖에 없었지만,
점차 그애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단 생각이 커져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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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기가 끝날 무렵, 왕따를 당하는 것도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저의 분노는 차곡 차곡 쌓일 뿐, 조금도 흐릿해지지 않았습니다.
울분이 쌓이고 쌓이던 중 어느날.
저는 여느때처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그룹의 리더가 말했습니다.
[이 새끼 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나? 끌고 와서 같이 팰까?]
저는 그말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동생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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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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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전부 덩치가 컸기 때문에
맨손으로는 그애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 주 토요일, 저는 좀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버터플라이 나이프와 전기 충격기를 사왔습니다.
나중에 어째서 이 때 그만 두지 않았는지 자문도 해봤지만.
이 때 저는 동생마져 괴롭히려는 녀석들이 너무나 미워서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이틀 뒤, 이른 아침부터 체육관 한가운데에서 린치를 당했습니다.
6분 정도가 흘렀을까요, 저는 기회는 이때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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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몰려있던 4명한테 주머니에 넣어둔 전기 충격기로 반격했습니다.
부들 부들 떨면서 바닥에 쓰러지는 애들을 보며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어중간하게 끝나면 뒤가 무섭기 때문에 또다시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3명이 경련하며 거품을 물었습니다.
남은 1명은 괴로워하긴 했지만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애의 목에 전기 충격기를 대고 기절할 때까지 집요하게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제 싸움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체육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룹 리더와 부리더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안에서의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아서 인지, 그 두사람은
제가 나온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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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이프를 꺼내들고 리더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도망칠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선 허벅지를 베었습니다.
리더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주위에 울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여학생 비명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모이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다리를 벤 뒤 가슴에서 배까지 거의 50cm 정도를 그었습니다.
피가 배어 나오며 리더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부리더가 제 등을 후려 쳤습니다.
저는 너무나 아파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참으며 부리더의 배에 나이프를 쑤셔박았습니다.
부리더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습니다.
나이프는 제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박혔습니다.
운이 나쁘다고 해야할까,
부리더는 그때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부리더에게 전기 충격을 가한 뒤
저는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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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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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내가 사는 근처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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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때까지 불과 3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저는 그때까지 저를 괴롭히고
거기다 제동생마져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녀석들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발로 짖밟았습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았습니다.
체육 교사였습니다.
이후 있었던 일은 거의 기억나질 않습니다.
몇일이나 몇일이나 조서 작성에 관련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학교에선 퇴학당했습니다.
정신이상 진단을 받고 소년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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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통원 치료를 받게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면회하러 와주셨습니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리더는 전치 2개월, 부리더는 내장 출혈로 인해 1주일 뒤 사망했습니다.
13살에 저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소년원 안에서 저는 정말 조용히 지냈습니다.
수영하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학교에서는 물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헌데 소년원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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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몇명 사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들 자기 과거 이야기만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일년 반 정도가 지나 저는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살인자라는 멍에를 둘러쓴 저는 이제 더 이상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혼자 도쿄에 와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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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적어야 될지...할말은 많은데 표현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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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학비를 지불해주셨지만 그걸로는 생활할 수 없었기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 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야간 학교답게 대학에 합격할만한 수준의 수업은 못받았습니다.
저는 독학으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야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드물게도 편지가 한통 와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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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아무 것도 안 가르쳤는데도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네가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웠다.
나는 너를 혼낸 기억이 없구나. 너를 믿고 있었으니까.
너는 이해를 잘했기 때문에 별달리 말참견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건이 있은 날, 네 엄마는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단다.
그러다 네가 체포됐다는 소리를 듣고 네 엄마는 그자리에서 쓰러졌어.
몇일이나 혼절해있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그때는 이미 정신에 문제가 생긴 상태였지.
나는 사실 네가 원망스러웠다.
내 자식이지만,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안긴 네가 원망스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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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찰 조사로 사정을 알게 되면서 나는 울었단다.
내가 너였더라도 가족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겠지.
그런 네 고통을 눈치채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하구나.
난 정말 아버지 자격 실격 이야.
그 후 몇번이나 몇번이나 면회하러 가서 사과하려 했지만,
한심하게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단다.
면회가 끝나고 방에서 나오면 언제나 아이처럼 울었지.
땅을 내리치며 소리 지르며 울었어.
자기 아들에게 이런 형태로밖에 마음을 전할 수 없는
못난 아버지라서.
너무나 부끄러워 너를 볼 자격도 없구나.
자기 자식의 아픔도 몰랐던 아버지를 너도 보고 싶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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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너와 단둘이 앉아 대화를 나눈지 벌써 4년이나 지났구나.
이제 평생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니 괴롭구나.
하지만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자랑스런 아들이야.
잡스런 이야기로 길어졌구나.
그럼 건강하거라, 내 아들.
아버지의 편지에는 군데군데 눈물자국으로 얼룩이 져있었습니다.
저도 그 편지를 보고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버지란 존재를 가장 크게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못난 아들을 사랑한다 적은 아버지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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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나도 울고 싶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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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년 뒤, 한번 재수한 끝에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대학 생활은 여러모로 충실했습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오래된 아파트에서 친구와 동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술김에 제 전과를 친구에게 밝혔습니다.
친구는 제 이야기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대화는 계속 됐기에 조금 안심했었습니다.
다음날은 휴일이었기에 저는 대낮까지 늦잠을 잤습니다.
점심 시간쯤에 눈을 뜨니 방이 묘하게 넒어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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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를 둘러보니 종이 1장과 1개월 분량의 집세가 놓여있었습니다.
동거하고 있던 친구가 남긴 것이었습니다.
내 전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분명 이유는 그것때문이었을 겁니다.
친구를 한명 잃었지만, 저는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이처럼 자기 마음을 직접 표현해준 게 기뻤습니다.
그리고 반년 뒤, 어느 겨울날 고향에 있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저는 신칸센을 타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집중 치료실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면회는 사절, 심장 질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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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뒤 아버지가 타계하셨습니다.
사인은 과로사 였습니다.
결국 편지에 쓰인것처럼 아버지와 대화를 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가 마지막이 됐습니다.
장례식은 신속하게 진행됐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동생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기에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말을 꺼내려는데
[이제 우리 인연 끊자.]
[나 3개월 뒤에 결혼하지만...따로 부를 생각 없어.]
동생은 저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마져 잃어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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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살인자가 가족이란 게 알려지면 안될테니까요.
동생을 위해서라곤 해도 결국 사람을 죽인 건 사실.
저는 동생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폐를 끼쳐서 미안했다.]
그리고 저는 그자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친척들은 누구하나 저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한동안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가정교사,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학비며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결국 관리비에 세금이 부담됐기 때문에
불효라는 건 알지만, 고향집을 허물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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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집에 돌아가니 우편함안에는
[죽어라, 범죄자.]
[쓰레기]
[악마같은 새끼들]
그렇게 쓰인 종이가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디에 있든 범죄자라는 걸 환기시켜줬습니다.
방에 들어가니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옛날 내가 살던 곳을 눈앞에 두니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멤도는 것 같았습니다.
옛날부터 사용하던 탁자가 거실에 놓여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집에서 보냈던 그날과...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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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자리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과거의 행복했던 나날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한번만 더 이 탁자에 앉아 가족들과 어울리고 싶어.
행복했던 초등학생 무렵처럼.
후회의 감정이 울컥거리며 휘몰아치고서야
가족이 사라진 빈자리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강한척 해봤지만,
저는 지금도 가족들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요.
저 때문에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끝에 돌아가신 어머니.
저 때문에 자신을 혹사시키다 과로로 돌아가신 아버지.
저 때문에 범죄자의 동생이란 낙인이 찍힌 채 웃음을 잃은 동생.
모두 저 때문입니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저는 자기 손으로 소중한 것들을 모두 망가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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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의 추억이 가득찬 고향집에서 몇일동안 묵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업자득.
가족들과 이별할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 생전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저를 너무나 사랑해주셨던 어머니에게
형다운 일도 해주지 못하고 평생 남은 상처를 줘버린 동생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고향집을 뒤로 했습니다.
집은 곧 해체되었고 이내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됐습니다.
이제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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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습니다.
이력서에 남은 전과와 평생 사라지지 않을 살인자라는 이름뿐.
제 손으로 망가뜨린 젊은 시절.
그것이 제가 죽는 그날까지 영원히 저를 따라올 것입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 사람을 죽였습니다.
현재 소속된 대학원 연구실에서 그걸 아는 건 저외엔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지요. 저는 앞으로 평생 혼자 살아갈 테니까요.
동급생을 죽이고도 아직껏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금을 감사하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결혼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범죄자이고, 살인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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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너무나 바보였기에 왕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아니 왕따를 벗어나긴 했지만, 인생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인생이 망가지고, 가족들이 사라지고,
그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것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