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 유일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 카인과 아벨 중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다른 마을'로 갔다는 기록이나 카인이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 사무엘하에는 다윗의 아내 미칼은 죽을 때까지 자녀가 없다고 나오는데, 역대기에는 미칼이 자녀를 두었다고 나와서 상호모순이 된다.
-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 대해서도 엘하난과 다윗으로 각각 나와 있어 상호모순이 일어난다.
-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도 아니하시고 실수도 아니하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야훼가 번번히 후회를 하는 장면'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 개신교 성경이 test와 temptation(유혹)을 시험으로 번역한 것처럼, repent와 grieve(슬픔)을 후회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 노아 방주 사건 이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노아 식구들 뿐인데, 이들로서는 지금의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이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노아의 아들 중 하나가 아비를 공경하지 않아서 저주받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리고 백인들은 이걸 근거로 인종 차별을 정당화했다.(...)
- 성경엔 분명 "야훼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고 나오며, '야훼는 너무도 선해서 악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원죄설)이 마주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사울왕이나 아합왕을 죽일 때에 야훼를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악신'을 부리고, '거짓말하는 영'''을 시켜서 그 둘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윗에게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여 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야훼가 했다고 나오나, 역대기상 21장 1절에는 그것을 사탄이 시켰다고 나온다.
- 분명 야훼는 전지전능하다고 하는데, 그 야훼의 지엄한 명령에 의하면 박쥐는 새로 분류되고, 곤충의 다리는 4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야훼가 직접 내리는 명령에서, '낙타와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으므로 먹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어이없게도 낙타는 굽이 갈라졌으며, 토끼는 발가락이 갈라졌고 그 전에 아예 굽이라는 것이 없으며, 둘 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낙타는 반추동물 맞는데요??
- 예수의 탄생시기에 대한 묘사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인구조사를 위해 본향인 배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시기에는 그 같은 인구조사가 없었고, 인구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향으로 돌아가서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퀴리니우스가 호구 조사를 할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 어법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AD 6년으로서, 마태오는 예수가 헤로데(헤롯왕, 헤롯대왕) 치하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로데 왕은 BC 4년에 이미 죽어 있었다.
루카는 '유대 임금 헤로데 때에(루카 복음서 1장 5절)'(적어도 BC 4년 이전)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6개월 간격으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했는데 예수가 호구조사 때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대략 10년 동안을 임신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 마태오 복음서과 루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가 서로 다르다. 두 사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장문의 족보를 나열한다.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유대인의 믿음과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으로 본다. 여기까지만 일치한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마태오는 '야곱'이라고 하는데 루카는 '헬리'라고 말한다. 두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족보라는 게 고작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벌써 할아버지부터가 다르다. 그 위로 다윗이 나올 때까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 두 복음서의 저자는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가 아닌데 요셉의 족보를 말하는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이며, 루카 복음 족보상의 남자 77명을 거치지 않고 야훼가 직접 예수의 아버지가 된다. 마태오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가 잉태한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1장 20절).
-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이 불일치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쫒아낸 이야기를 앞부분(2장 13~25절)에 기록했지만, 마태오는 복음서 뒷부분(21장 12~13절)에 기록했으므로 상당한 시차가 발생한다.
- 사실 여기서 예로 든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사건은 오히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떡밥증거로 쓰인다(...) 즉 이 '성전 정화'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는 주장. 또는 복음사가들이 수집한 자료를 일정한 '의도'에 따라 배열할 때, 그 의도 때문에 차이가 났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성전 정화'를 공생애의 시작에 둔 것은 예수의 모든 행적을 집약적으로 표출하는 사건이 성전 정화라고 생각한 것이며, 마태오 복음서에서 성전 정화를 공생애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둔 것은 이러한 사건으로 예수의 모든 행적을 마무리하고자 한 까닭이다. 여하간 예수의 성전 정화는 가장 중요한 파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예수쟁이와 개독들을 까기에도 적절하고
비슷한 맥락으로,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갈릴리) 지역에서만 가르쳤고, 유대 지방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유일하게 생애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갔을 뿐이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와 유대에서 비슷하게 가르침을 펼쳤다'고 나온다. 한편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주로 예루살렘'에서 설교했고, 갈릴래아에서의 설교는 드물었다고 나온다. 이는 각각 방점을 두고자 하는 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데 갈릴리에서 드물었다는 것은 고향에서의 예수 멸시를 강조하는 해석인 식이다.
- 복음서의 설명과 실제 지형과 차이가 있다. 마르코 복음서 7장 31절에서 예수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온다. 그런데 시돈은 정반대 방향에 있을 뿐 아니라, AD 1세기에는 시돈에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없었다. 띠로에서 곧바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마르코 복음서 5장 1절을 보면 갈릴래아 호수 동쪽 해안을 게라사 사람의 지방이라고 말하지만, 게라사(오늘날의 예라시)는 바다에서 동남쪽으로 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게라사에서 예수가 내쫓은 귀신들이 들어간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서 몰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돼지떼가 산 넘고 물 건너 50킬로미터를 포풍질주하여 몰사했다는 것인가?
- 예수의 언행에 일관성이 없다.
마르코 복음서 9장 40절에서 예수는 자비롭게 말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 12장 30절에서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말한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
- 루카 복음서에 두 상황이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서 9장 40절 = 루카 복음서 9장 50절 / 마태오 복음서 12장 30절 = 루카 복음서 11장 23절. 전자는 제자들에게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의미이며, 후자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묻는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는 완벽한 용서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준다.'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런데 베드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고작 한 문단 앞에서 예수가 이미 용서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인데, 한 문단 앞에서 예수는 무한의 용서를 가르치지 않았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일단 훈계한 후, 말을 듣지 않으면 실용적으로 대처하라고 충고한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여라.' 한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오 복음서 18장 15~17절)'. '세 번만' 용서받을 기회를 주는 위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무한의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마태오 복음서에서 '원수가 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말한 예수 자신은, 요한 복음서에서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잡혀갔을 때 한 사람이 대제사장에게 말대답을 했다며 자신의 뺨을 치자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고 한다.
- 단, 요한 복음서은 공관복음이 아니며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가 맞는 장면은 많이 나오지만 따지는 장면은 오직 요한 복음서에만 나온다는 것은 고찰해볼 만한 문제다.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가 최후의 기도를 하러 겟세마네에 올라갈 때, 제자들에게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저 말 그대로 루카 복음서에 나온다!(루카 복음서 22장 36절) 앞뒤 문맥으로 봤을 때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다. '세상이 흉흉해지니 준비를 하라'고 한 말이라는 기독교 측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앞뒤 본문을 살피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칼을 사라고 하다가 베드로가 지니고 있던 칼을 꺼내서 보여주니 이제 됐다고 대답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예수가 사라고 시킨 그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친 베드로에게 예수는 그 유명한,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말한다.
-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는 역동적인 비유로 가르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유창한 축어적인 장문의 설교를 한다.
- 구약에서 야훼는 '과일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나무를 상하거나 죽이지 말아라. 너희가 나무에 원수라도 졌다는 말이냐?'라고 말하는데, 신약에서 예수는 이른 시기에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서 말려죽인다.
- 다시 말하면 그 시기는 사실 열매가 맺힐 시기가 아닌데 좀 빨리 자랐다고 열매를 찾다가 저주를 시전한 것이다. 게다가 성경의 가치관에서는 모든 것은 야훼의 계획과 주도로 이뤄진다고 했다. 즉, 그 무화과 나무가 열매 맺지 않은 것도 야훼의 뜻. 그건 예수 자신이 직접 이야기 한 바 있다.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야훼 자신이 '열매가 없어도 과일나무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도 했다. 헌데 열매가 없다고 고자되기를 시전한 것은, 야훼에 대한(혹은 그 자신에 대한-3위일체) 반기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
- 4복음서에서는 심지어 구약구절을 잘못 풀이하여 그리스어로 옮겨둔 부분까지 존재한다.
이를테면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의 주장을 반박하여 구약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예수가 인용한 구절은 구약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다. 그리스어 구절 자체는 예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로 들리지만, 원래의 히브리어 구절은 예수가 주장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구절들이다.
예수가 정통 바리사이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고 일부러 유대성서를 그리스어로 오역한 것을 일부러 인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 이상 헤브라이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만 쓰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는 수많은 유대인 가운데 1명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구약을 인용하고, 그것을 예수가 인용한 것인양 꾸며 놓았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7장 6~7절에서 예수는 이사야서 29장 13절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잘못 번역된 구절을 인용한다. 또 사도행전 15장 13~18절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구절은 아모스 9장 11~12절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7장 9절에서 마태오는 즈카르야가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말한다.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사도행전에서도 히브리어 구약을 잘못 인용한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자기 말을 입증하려고 구약을 인용하지만, 그 인용문은 그리스어로 전혀 잘못 번역된 구절이다. 원래의 히브리어 구절은 뜻이 전혀 다르다.
사도행전 15장 13~41절에서,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히브리어 원전을 왜곡한 그리스어 구절을 인용하여 예루살렘의 유대인을 설득하려고 한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 기원 직후 구약은 70인 역이라고 불린 그리스어 판본이 정경 취급 받았는데 70인역은 번역이 문제가 있다. 그 번역을 그대로 갖고 오면서 생긴 문제점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행전과 복음서를 보면 예수나 사도들이 왜곡된 히브리어 경전 구절을 가지고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는 번역의 문제로 돌릴 것이 아니다. 명백한 오류인 것. 번역 실수를 한 것이, '후기의 집필자'들이 아니라, 복음서와 서신서에 의하면 예수와 사도들이다.
-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복음서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과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유대인 장로들의 심리를 받고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리를 받지만, 형을 선고받지는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지 않고, 곧바로 로마의 법정으로 끌려간다. 그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가 한 마지막 말까지도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과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시편 22장 1절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구절을 예수가 마지막으로 외쳤다고 나온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편 31장 5절의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운명한다고 나온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목마르다.' 라고 말한 뒤, '이제 다 이루었다.' 하고 운명한다.
이것이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상칠언(십자가상에서의 7가지 말)'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저것을 다 말하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복음서 23장 34절)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루카 복음서 23장 43절)
-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복음서 19장 26-27절)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르코 복음서 27장 46절)
- “목마르다.”(요한 복음서 19장 28절)
-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복음서 19장 30절)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복음서 23장 46절)
- 예수를 처단했다던 본시오 빌라도는 추정 당시 유대령 총독이 아니라 행정관 시절이었다.
-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5장 30절과 10장 39절에서, 배드로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언급은 사도행전이 로마에서 쓰여졌다는 학자들의 의심을 정당화시켜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2세기 말에 이레네오가 난데없이 제시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면, 로마인들은 예수가 선동죄로 처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 카타콤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놀랍게도 AD 5세기 이후에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나타난다.
- 마태오 복음서 12장 40절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예언했다.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계산을 잘못한 것인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 정오에 죽었고, 일요일 이른 아침에 살아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땅 속'에서 예수는 단지 이틀 밤만을 보냈다는 것이 된다.
-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다르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5절에서, 예수의 여성 제자들 몇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동굴 속에서 흰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 24장 4절에는 동굴 속에서 '문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다 마태오 복음서 28장 2~3절에서는 두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한다.
- 마르코 복음서 16장 9절과 마태오 복음서 28장 9절에서 부활한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지만, 루카 복음서 24장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갈릴래아가 아닌 예루살렘 근처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게다가 사도행전 1장 4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가라는 신성한 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한다.
- 예수는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이 죽기 전에 계시를 목격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다.'(루카 복음서 9장 27절)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루카 복음서 21장 25~32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태오 복음서16장 28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4장 34절).
하지만 '그 세대'가 다 지나가고 모든 제자들이 죽어서 묻힌 지 대략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일 가운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 유다 가롯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다 다르다. 목을 매서 숨졌다는 기록과,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쏟아져나와 죽었다는 기록.
보통 목 매달았는데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설득력이 부족한데, 보통 목을 매면 줄이 끊어져서 떨어지더라도 배가 터져서 창자가 쏟아져나올 정도의 외상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실질적으로 추락하여 사람의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면 대략 15미터 이상의 높이라는 이야긴데, 당시엔 예루살렘 성읍이나 지리적으로 높은 몇몇 곳을 제외하면 그 정도 구조물이 없었을 뿐더러, 목을 매달고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그 높이까지 기어 올라가서 목을 매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유다는 예수를 판 값으로 산 밭에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라고 하는데, 당시 유대의 밭 근처에, 그 정도로 높은 위치에 목을 매달만한 구조물은 전무했다.
- 4개의 복음서의 가리옷 사람 유다 관련 기록에는, 유다가 은전 30냥에 예수를 팔지만 막상 예수가 체포되자 죄책감에 못 이겨 그 은전들을 대제사장들에게 팽개치고 죽었고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샀다고 나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샀고 그 밭에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어 상호모순이 일어난다.
-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에서 비춘 빛을 보고 신성한 소리를 듣는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9장 7절) 그러나 뒤에 22장 9절에서 바울은 그 사건을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 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 놀랍게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 어디에도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 항목 4번 참조.
- 또한 사도행전에 적힌 바울의 증언은 갈라티아 서간에 적힌 그의 증언과 모순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앞에서 언급한 경험을 한 후, 눈이 멀게 된 바울이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나 그의 기도로 눈을 뜨게 된다. 그 직후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은 바르나바의 소개로 여러 제자를 만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은 두 번째로 예수를 보고, 이방인을 전도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바울이 직접 썼다던 서신서에서는 전혀 다르다. 갈라티아 서간에서 바울은 아나니아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개종 체험 후 3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1장 17절) 이어서 그는 다시 열정적으로 기술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1장 20절)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http://mirror.enha.kr/wiki/%EC%84%B1%EA%B2%BD/%EB%85%BC%EB%9E%80
이 정도 알면 제대로 알고 까는거냐?
니들은 이 정도라도 알고 나서 제대로 까라고 떠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