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선배와 술자리에서 다투고 있었다.
"노무현만 뽑으면 세상이 달라질거야", "대통령 하나 바뀌여서는 달라질게 없다니깐요"
답이 없는 말싸움 끝에 술자리는 질펀해졌고, 그렇게 거리를 둔 채 헤어지고 말았다.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도 나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이 통기타 치는 멋진 모습으로 자갈치 시장 아주머니를 끌어들였어도, 정몽준의 배신 아래에 진보쪽 지지자들이 노무현쪽으로 돌아설때에도 나는 그저 한발자욱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통령 노무현. 그는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임기가 시작되자 마자 탄핵을 맞기도 하고 언론으로부터 험한 소리 듣는것은 부기지수, 열심히 잘라져서 퍼가지는 그의 발언들은 날서고 투박했다. 탄핵은 반대했지만 친구의 "노무현 입을 꼬메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에 끄덕거리기도. 그의 정권에서도 억울하게 자기 집을 빼앗기는 사람들은 있었고, 파업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한미FTA를 거치면서 그는 진보층과의 거리를 벌렸고, 그렇게 점점 멀어졌다.
천민자본주의의 대표자 이명박이 한나라당 후보에 올랐을때도, 나는 그를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다.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라는 생각에, 민주당계가 인기를 잃었으니 한나라당이 되는게 맞지. 라는 안일한 생각에 그의 당선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내려가는 노무현의 뒷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아름답다고 인기를 얻는건 정치가가 아니라 연예인이지라는 생각으로 바라보았을뿐.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은 마치 독재할 권력을 얻은듯이 행동하였고, 한나라당 이외의 사람들은 지배당하는 의무밖에 없는 피지배층으로 전락하였다. 한나라당 이외의 사람들은 권력을 모조리 빼앗기게 되었고, 거기에는 원칙도, 임기도,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명박의 천박한 언행은 놀랍지 않았으나, 그것이 다뤄지는 방법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대통령이 무식한 발언들을 쏟아내어도 그것을 욕하는 언론은 침묵을 지켰고, 그나마 조금씩 흘러나오는 통로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표현만으로도 꼬투리잡혀 욕먹던 노무현을 욕했던 내자신이 민망해지던 순간. 대통령이 그보다 더한 표현으로 더한 무식한 행동을 보일수도 있다는 고정관념을 넓혀준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그것이 언론에서 별 문제가 안되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충격.
광우병 사태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를 표하였지만, 그것은 국민의 반대가 아니라 "반정부 세력의 책동"으로 취급되어 진압당했다. 왜 반정부 세력은 국민이 아니라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되는걸까. 수많은 시민이 반대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는 정부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세뇌시킨 탁월한 선동 세력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는 참신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걸까.
그리고 대운하, 대운하....만인이 반대하고 무슨수를 써도 진행하는 정책이지만 정작 찬성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기이한 일방통행의 상징물. 대운하. 이것을 위해 만인이 찬성하는 복지 예산을 삭감해도 여전히 "서민을 위한 정부"를 외치면서 목도리 걸어주는 대통령은 부조리의 화신이었다.
노무현의 죽음이후 감정적인 추모열기가 과열되는 것은 불편했지만, 그는 충분히 추모를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분향소마저 남겨놓지 않고 친정부 단체를 동원해 쓸어버리고 전경으로 이를 보호하는 유치한 연극을 보면서 국가에 대한 회의까지 들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행태를 비난할때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너 노빠지"라는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 그런식으로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느새 노빠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여전히 진보였다고 보지 않는다.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든, 그를 따르는 사람이 어떻게 보았든 그는 중도"실용"주의노선을 지켜왔고 그의 갈지자 행보는 결국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가 다시 부활하여 대통령이 되더라도 진보를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겪게 될 것이고 나또한 그의 행보에 반대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진보세력을 정치세력으로서 인정해주었고, 한국 정치의 구악인 지역감정을 분쇄하고 정책 정치로 나아가게 하는데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노무현 시절에 그나마 진보계열은 10석 전후의 의석을 가져서 현실정치에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진보계열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존중했던 노무현의 덕이였다. 그덕분에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당연하게 자리잡힌 줄 착각되었고, 상대가 민주당이 되었든 한나라당이 되었든, 정책 대결로 진보의 위치를 늘려가는 것이 가능해질줄 알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저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들이대면서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눌러버리려는 쪽과는 정책을 들이대고 토론을 거는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NL과 PD도 구분못하고 "친북좌파노빠"와 같은 식으로 전선을 형성하여 득달같이 달려들어 색출하고 없애려 드는 사람과 무슨 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링위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울수 있었던, 노무현은 진보가 존경할만한 적수였다. 그와 정책대결을 하고, 논박하는 것은 치열하기는 하지만 즐거운 일이였고, 그러한 싸움은 정치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뒤통수를 의자로 내려치려고 하고, 호시탐탐 반칙만을 일삼으려는 쪽과 다투는 것은 피곤하기만 할 뿐, 필요한 행위는 아니다. 나의 존재 자체에 문제삼고 없애려하는 세력과 무슨 타협을 하고 시합을 벌인단 말인가. 그들을 인정하려 하였고, 그들과 논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실수였다.
좌/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좌우를 제대로 가릴 수 있는 민주주의라는 토대다. 이조차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과 좌우를 나눠서 토론하기 보다는 이를 배격하는 것이 현명한 일. 링이 제대로 만들어져야 제대로 싸울수가 있지 않나.
"이명박 정부가 70년대로 돌려놓았다"란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좌/우, 진보/보수의 문제를 민주주의/반민주주의 의 문제로 회귀시켜 버렸다. 놀라운 귀소본능이고, 그덕분에 우리는 민주주의따위는 필요없이 밥만 주면 되는 우매한 대중이 되어버렸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번 지방선거의 단일화를 지지한다. 비판적 지지가 아니라, 진보의 생존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에.
원래는 다음정권까지 한나라당이 잡으면서 나라를 말아먹는 것이 진보진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무차별적인 색출과 탄압으로 진보진영이, 아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앞으로 7년을 버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나서 상당수는 한나라당에, 일부는 진보쪽에, 일부는 민주당계에 투신되었던 것처럼, 아마 야만의 시대가 지나도 다시금 좌우로 나눠서 열심히 싸워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 말로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본다. 어느 한쪽으로 통일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므로. 경계해야 할 것은 분열되는 국론이 아니라, 통합된 국론과 여기에 찬성하지 않으면 배제시키는 링이다.
노무현, 그가 행했던 많은 정책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정치판을 제대로된 링안으로 끌어들여서 많은 선수들이 공정하게 싸울수 있었다. 그는 진보의 좋은 상대자였으며 인정할수 있는 적수였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뒤늦게 깨달은 미욱한 나는 이제 다시 그를 그리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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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출처:http://bsknight.egloos.com/293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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