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치특보를 지낸 김광일(65) 변호사는
노무현 대통령과 끈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이다.
1970년대부터 부산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김변호사는 노무현 대통령을 인권변호
현장으로 이끌었고, 정치무대 입문도 도왔다.
그럼에도 그는 2002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해 반노무현의 선봉에 섰다.
당시 그는 입당을 하면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열 가지 이유」라는 성명을 낸 바 있다.
그의 이 성명은 선거 분위기에 말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광일 변호사가 당시 주장했던 것이 단순한 흑색선전이 아니라 진실이 상당히 들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고방식이나 행동패턴에 대한 그의 평가는 1년간의 집권 기간을 거치면서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3월12일 오후 전화로 그의 심경을 물었다. 김변호사는 현재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첫 대답은
『나 개인적으로는 함량 미달의 인물을 정치에 입문시켜 국가적 불행을 초래한 원초적 책임으로 고민해 왔는데, 이번 탄핵안 가결로 다소 부담이 덜어졌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탄핵안이 통과했다는 것은 우리 국운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중정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로 갈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상식을 갖고 균형감각을 갖춘 올바른 지도자를 선출해 국가발전을 이루는 발판이 돼야 한다』
25년이 넘는 인연
―이번 대통령 탄핵은 국가적 불행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문제가 많은 대통령이 앞으로 4년간 우리나라를 이끌면서 나타날 부작용보다는 현재 고통스럽지만 관계를 끊는 것이 우리 국익에 더 부합한다.
우리 국민들은 그동안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박정희 대통령 유고등 통치자의 부재로 인한 여러 차례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이 있다.
고건 총리가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도 생존 능력을 보여 줬고 행정 경험도 풍부한 경륜 있는 사람이라 욕심부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으면 위기상황이 나올 이유가 없다.
문제는 노무현의 집권 이후 기성 정치권을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당장 대안이 눈에 안 띈다는 점이다. 국민들의 불안감도 바로 이로부터 출발한다』
―「원초적 책임」이란 표현을 했는데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를 설명해 달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를 알았다. 1978년인가 1979년인가에 그가 사법연수원에 다닐 시절 내 변호사 사무실에서 3개월간 시보 교육을 받았다. 내가 지도 변호사였다.
당시 나는 시국 관련 사건을 많이 맡아 당국의 요주의 대상이었는데, 시보로 온 그를 의식이 있는 친구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전혀 그런 의식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공부해 개인영달이나 생각하는 속물로 판단했다.
그가 판사직을 1년 만에 그만두고 부산에 변호사 개업을 할 때도 내게 찾아왔다. 개업비용을 빌려 달라고 해 좀 빌려 줬는데 두 달 만에 갚았다.
그는 부산 법조계에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사건 수임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는 영리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등기·저당 등의 업무는 사법서사들이 주로 했는데, 그는 변호사로서 그 일거리를 처리했다. 부산 법조계에선 그를 「이단아」로 취급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란 점이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 있는데
어떻게 그런 변신이 이뤄졌나.
『그가 인권변호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나 때문이다. 1979년 부마항쟁 이후 부산에서 부림사건이 터졌을 때 변호사들이 필요했다.
나는 이 사건 당사자로 지목받아 당국의 압력으로 학생들의 변호를 맡을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변호사 5명에게 부림사건 관련 학생들에 대한 변호를 요청했다. 그런데 추후에 이호철 등 몇 명이 더 검거되면서 이들을 변호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노무현 변호사에게 이들의 변호를 부탁했고 이것이 그의 인권변호사 활동의 시작이다』
★법정에서 감정통제를 못 하는 것보고 실망
―그 이후에도 인권변호 활동을 같이 했나.
『사건을 맡긴 후 노무현에 대한 실망이 컸다. 법정에서 감정통제를 못 해 행패부리듯이
변론을 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
그 이듬해 부산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을 때 서울서 인권변호사들이 대거 내려왔지만 부산에선 나설 변호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를 끌어들여 나까지 3명이 변호에 나섰다.
노무현은 당시 「무료 변론을 해봐야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더라」며 피하는 입장이면서도 변론에 나섰다. 반면 문재인은 의식이 있는 데다가 적극적이었다.
노무현에게 일을 맡기면 문제를 일으켜서 주로 문재인에게 일을 많이 맡겼다. 문재인은
신중해서 일을 잘 처리했다』
―정계 입문을 어떻게 했나.
『인권변호사 활동은 그 후에도 계속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이 YS파와 DJ파로 분당되면서 YS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서울 재야는 김대중을 지지했지만 부산 재야는 YS를 명시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YS는 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때 내가 수락하면서 노무현을 아울러 추천했다.
그것이 노무현의 정치 인생 출발점이다. 그리고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다』
―13대 국회에서 노무현 의원은 5공 청문회를 통해 스타가 됐다. 결국 그것이 국민들에게 강하게 각인되며 나중에 대통령까지 오르게 한 발판이 됐다.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국회의원이 됐지만 나의 그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다. 5공 청문회 당시 나는 그에게 여러 차례 주의를 줬다.
「당신은 감정 자제가 잘 안 되니까 결코 흥분하지 말라. 계속 조용히만 있으라. 딱 필요한 말만 하라」
그때 노무현은 나의 당부를 잘 지켰다. 차분히 말하는 훈련을 쌓고 결국은 「청문회 스타」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나로서도 그의 변신이 놀라웠다.
3당 합당에 반대해 YS와 결별해 「꼬마민주당」에서도 그와 같이 일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통치자가 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변호사-정치인을 거치며 오랜 기간 연관을 가졌으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노무현은 머리가 굉장히 좋다.
그러나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이 뒤섞여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했고 국회의원도 됐다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기면서 비정상적인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다.
반면 열등의식도 강하다. 「내가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는데 남들이 날 얕보지나 않을까」 하는 열등의식이 항상 잠재해 있다.
이런 경우 겸손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가진 자, 배운 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진전했다.
그가 말이 많아 항상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바로 열등의식에 대한 보상작용으로 뭔가 아는 체를 계속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월의식도 강해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을 하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태도가 나온다.
이런 여러 요인이 얽혀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인 균형감각이 그에게 없다.
지난 1년간 국민들이 보아 온 노무현 식의 행태는 바로 이런 비정상적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대선 이전에 적극적으로 알려 당선을 막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2002년 초반 민주당 경선에서 그가 승리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분위기가 이상하게 나가더니만 정몽준씨와 후보 통합까지 하게 되면서 나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 「노무현만은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뒤늦게 한나라당에 합류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사실 대통령이 됐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노무현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선전과 위장에 아주 능하다
―그래도 대통령까지 된 것은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노무현은 자기 생존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과시와 선전술 그리고 위장에 아주 능하다.
정치를 하면서 자신이 아주 순진한 사람, 깨끗한 사람으로 위장하는 데 성공했다.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속아 넘어갔다.
이에 비해 이회창씨는 너무 자신을 선전할 줄도 모르고 기교도 없었다. 선전술에서 거의 제로 상태에 머물러 있어 정치인으로선 문제가 있었다.
광주사태 청문회 때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며 난동을 벌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감정을 못 이겨 우발적으로 일어난 소동으로 보지만 나는 그것이 계산된 난동이었다는 것을 잘 안다.
노무현은 남이 자신을 앞지르는 것을 참지 못한다. 청문회가 제대로 이뤄져 새로운 청문회 스타가 나타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를 포함한 4당의 발언 예정자들은 그날 발언도 못 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보여 준 여러 가지 행동도 돌출성이라기보다는 철저한 계산 속에 이뤄졌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법률가의 입장으로 볼 때 이번 국회의 탄핵소추가 타당하다고 판단하나.
『탄핵 사유는 직무와 관련된 헌법·법률 위반 행위여야 하는데 전체적으로는 소추 사유가 약하다는 인상이 든다.
야당이 다른 비리까지 포함해서 정리를 잘해 탄핵 소추를 해야 하는데, 좀 서둘렀다는 감이 든다.
그러나 선거법 위반에 관해서는 위법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최고책임자가 특정 정당을 지지 발언한 것은 탄핵 사유가 된다. 헌법재판소가 이런 경우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다』
탄핵 부결돼도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한 셈
―헌재가 국회의 탄핵소추를 부결하거나 기각·각하시켜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권한을 회복할 경우 정국 불안은 더욱 가중될 가능성이 있는데.
『설령 그런 경우가 나오더라도 노무현은 이제 정치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봐야한다.
대통령의 권위는 국민의 지지로부터 나오는데 그렇게 상처받은 대통령이 남은 임기를 마저 채운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다.
물론 그의 성격으로 보아 끝까지 버틸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럴 경우 최악의 정국으로 이어지면서 경제위기가 다시 올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세계화 시대인데 국민의 신망을 잃은 대통령을 인정해 줄 외국 원수가 어디 있겠나』
―노무현 대통령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예상하나.
『종전 그가 보여 준 정치행태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까지의 태도를 반전시켜 화합을 이루는 자세를 보이기는 힘들 것 같다.
오히려 오기가 발동해 더 투쟁적이고 대립각을 세우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3월11일 기자회견을 보면 그의 이상성격이 그대로 나타난다. 정치의식이 비틀려 있어 쉽사리 고치기 힘들다.
이런 투쟁자세는 결국 국민적 저항을 유발하고 결국은 국가의 쇠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제일 걱정스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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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이었구요...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문재인 수석이랑 바꿨으면 좋겠단 생각이듭니다.
오유의 순수하신 우리님들 이래도 계속 그에게 속고 이용당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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