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에게 드리는 꿈
3. 아베 노부유키(2)
조용하면서도 결연한 여운형의 말에 더는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이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인선이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여운형의 지도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인선문제는 임정의 형식적인 추인만 남아 있었다. 하부조직의 구성은 선임된 각 위원장들의 협의 하에 결정하도록 하고 하부조직원들의 확대에 힘을 쏟기로 했다. ‘대동단결해 왜적을 쳐부수고, 부왜세력을 철저하게 박멸해 완전한 자주독립을 도모함’을 강령으로 삼아 비밀결사를 결의했다.
여운형이 제안을 했다.
“모두들 고생하셨소이다. 자, 우리 자축하는 의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합시다.”
모두들 입은 놀리면서도 소리는 내지 않고 팔만 번쩍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임정과 우리 건국연맹을 위해서 만세를 외칩시다.”
그렇게 조금 움직였는데도 다들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땀을 한번 훔치고나서 여운형이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잘 아시겠지만 지금부터 시작이오. 우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칩시다. 뭉쳐서 싸우는 것만이 왜놈들을 물리치고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오. 동지 제위께서는 더욱 분투해 주시기 바라오.”
이번에도 소리내지 않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내무위원회에서는 각 지역단위로 위원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조직은 확대돼 갔다. 거기에는 연통제가 큰 힘이 됐다. 연통제는 임정 수립 때 시작해 국내외를 연결했던 비밀 행정망으로 전국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 등을 두어 독립운동을 수행했던 조직이었다. 지역조직의 확장은 연통제를 복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방대해질 수밖에 없는 조직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조만간에 왜국이 패망한다는 사실과 부왜분자들과 배반자들은 반드시 처단한다는 점을 철저하게 인식시켜 이탈이나 변절을 방지하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전파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것은 건국연맹 지도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왜놈들이 곧 망한다더라, 하는 식의 떠도는 소문처럼 막연한 것이 아니라 왜놈들이 발악하는 짓거리들과 전황 등 구체적인 예를 들어 누구라도 왜국의 패망을 믿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개별 맹원들에게도 각자의 임무가 주어졌다. 당면한 맹원들의 임무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맹원으로 만들고, 위의 사항들을 주지시키는 일이었다.
총독 고이소가 내각총리가 되어 왜국으로 들어가고 아베 노부유키가 후임총독이 되어 소리 없이 경성으로 들어왔다.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폭살시도 이후, 총독들은 거동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총독과 고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아베는 39년에서 40년에 걸쳐 약 5개월간 내각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내각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상태로 실각하고 만 역대 왜국 내각 중에서 가장 약체에, 가장 단명한 내각이었다. 능력을 의심받는 이런 인물이 총독이 된 이유는 마땅한 인물이 없는데다 급박한 전황 속에서 조선총독의 자리를 두고 오래 논의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능하기 때문에 조선은 더욱 불행해질 가능성이 컸다.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전임 총독들보다 더욱 악랄하게 조선의 숨통을 조이려 들기 십상이었다.
“모두 기립하십시오. 총독 각하께서 나오십니다.”
총독의 비서 시게노가 말에 옷매무새를 재빠르게 손 본 도지사들이 군인들처럼 절도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베는 정무총감 엔도의 안내를 받으며 총독부 회의실로 들어섰다. 부임 후 도지사들과의 첫 대면이었다. 한반도의 실정을 파악하느라고 한 달여가 소요됐던 것이다. 아베는 육군대장출신답게 형형한 눈빛으로 도지사들을 둘러보았다. 눈빛 만으로도 도지사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부터 총독 각하를 모시고 임시도지사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신임총독 아베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취임 후 한 달이 지난 이틀 전의 각도 재무부장 회의에서였다.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총독부의 최우선과제였고, 뚜렷한 재원확보가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세무행정의 강화만이 방법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약탈을 해야 했다. 그것이 도지사들보다 먼저 재무부장들을 만난 이유였다.
아베가 입을 열었다.
“에, 친애하는 도지사 여러분, 먼저 일선에서 땀 흘리는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오. 에, 여러분도 알다시피 본인은 중차대한 시기에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땅을 밟았소. 에, 지금은 전시요. 그것도 철천지 원수 연합국놈들을 맞아 힘겨운 전쟁을 치르는 중이오. 에, 이런 현 상황을 지사 여러분은 분명히 직시하고, 타개해 나가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오. 전쟁은 원래 물자전이오. 물자가 풍부한 나라가 그렇지 않은 나라를 이기게 돼 있다 이 말이오. 에, 그러면 소위 연합국들보다 땅덩어리도 적고 자원도 부족한 우리 대일본제국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에, 첫째, 전시물자의 생산력을 한층 강화해 적국의 생산능력을 능가해야 하오. 둘째, 식량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하오...... 에, 이 모든 것은 결전에 임하여 조선땅의 관공리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할 때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오......”
아베가 언급한 방침은 한반도를 전쟁물자 조달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을 쥐어짜겠다는 말이었다. 우려가 현실로 바뀌고 있었다.
임시도지사회의 이후, 연이어 각종 규정과 법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일 먼저 총독부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했다. 대상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조선 내 여성들이 대상이었다. 그동안에도 여자사냥이 끊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놓고 여자들을 전쟁에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젖먹이가 있는 과부가 정신대로 끌려가는 일도 있었다.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중 다수가 종군성노예가 되어야 했다. 종군성노예의 참상을 소문 들어 알고 있는 여성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종군성노예로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어 ‘저축협력명령’이 공포됐다. 금전소득이 있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저축이라는 이름으로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말은 ‘협력’이었지만 ‘강제‘였다. 왜국이 패망하면 받을 기약이 없는 돈이었다.
또, 하루가 멀다 하고 부왜단체들이 중심이 된 관제궐기대회들이 열렸다. 이 시기에 부왜단체들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전개했다. 왜어를 모르는 정신대・ 징용・징병대상자들에게 왜어를 가르치고, 애국기헌납운동에 핏대를 세웠으며, 적국을 항복시키기 위한 ‘결전생활운동의 실천요강‘을 만들어 항상 결전복장 갖추기를 강요하고, 반전주의자들을 잡아내고, 피마자 등 석유대용품을 생산하고 이용하도록 강요하는 등의 일을 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천사항들은 가뜩이나 힘든 이 땅 민중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왜국 압제의 특징은 조선을 하나의 전리품으로 보는 데 있었다. 조선인들은 그 전리품 속에 들어 있는 부속품들일 뿐이었다. 부속품을 사람으로 취급할 리 만무했다. 조선은 하나의 거대한 전리품 창고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를 시작으로 총독들이 하나같이 군인출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왜국군부가 정권을 유지하는 데도 안정적인 식민지 지배는 필수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군을 신속하게 운용할 수 있는ㅡ군대의 생리와 체계를 잘 아는 군인출신의 총독이 필요했다. 3・1 운동 후에 관료출신도 총독이 될 수 있다고 규정을 바꾸었지만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조선인들에게는 복종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한 데라우치의 일성은 총독들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확대・강화되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