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아트 슈피겔만의 책 ‘쥐’를 읽고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책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여러 책을 뒤적이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읽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 책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자유란 있을 수 없고, 진정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고 말이죠. 자유와 운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서로 상반되며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원제가 ‘운명없음’이라고 하니 책 제목에 책의 모든 주제가 한 번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겠죠.
이 책에서는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서의 일들과 주인공이 겪은 비참한 상황들이 담담한 어조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점이 이 책이 이제껏 홀로코스트를 다뤄왔던 다른 문학 작품들과 다른 점이며, 이 책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도 결코 인간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어느 순간 다가온 재앙이 아니라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책들을 보면 홀로코스트를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생각을 하고, 그에 따라 희생자인 유태인들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거대한 운명의 힘에 짓눌려 자유를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비참한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그 사건, 즉 홀로코스트가 자연 재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흔히 사람은 거대한 힘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을 운명의 탓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그런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피해자로 묘사되곤 해온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책 ‘운명’에서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란 어느 순간에서건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결코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수용소의 극한 상황 속에서조차 자유는 존재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고, 게슈타포에게 저항을 할 수도 있으며, 노동을 거부할 수도 있으며 낮잠을 잘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예상되는 결과가 죽음이기에 그들은 순종을 선택했을 뿐이죠. 단지 그 뿐입니다. 자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것이죠.
누군가는 말할 겁니다. 그게 어떻게 자유로운 거냐고.
물론 그들에게는 많은 제약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선택권이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극이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로 충분히 극복해내고 저행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용소의 유태인들도 어느 순간 다가온 운명에 억눌리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승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 자유를 가지고 있죠.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는 우리의 몫이고, 선택에 따라서 모든 것은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의 선택에 의해 발생된 일에 대해서 운명처럼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죠.
불평과 불만이라는 것도 자기 합리화와 변명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일이라면 우리는 하지 않으면 되는거 아닐까요? 학교가 다니기 싫은데 학교를 다녀야 되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는 학생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학교에 대해서 불평하는 학생들은 마치 학생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학교를 무조건 다녀야만 하며 거기에 대해서 학생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식의 생각을 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니기 싫다면 안 다녀도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기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하고요. 학교를 다니지 않을 때 생길 자신의 피해, 장래에 대한 불안, 남들의 시선 등등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겠죠. 결국 선택권은 있었고, 여러 길 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길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죠.
실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꽤 있고, 현재도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것인양. 학교 다니기 싫다고 불평하는 것은 한심한 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왕 선택한 일이라면 그것을 즐겨야 되겠지요. 뭐, 즐기는게 힘들지도 최소한 그것을 받아들이려고는 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도 운명적인 일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순차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일이며, 그 안에서도 역시 많은 선택의 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운명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을 하면서 순차적으로 사건들을 만들어 나간 것뿐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인 죄르지는 자신이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끔찍했던 경험만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며, 그걸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르지에게 있어서 그런 경험들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한 경험이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살아간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을 잊으라는 것은 그런 선택을 했던 죄르지 자신에 대한 부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수동적으로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당한 것이 아닌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그 경험에는 물론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겠지만, 그런 속에서도 한 가닥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유를 가지지만 불행히도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은 아닙니다. 자유롭다고 해서 뭐든지 선택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가난해서 굶어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쓸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쌓아놓고 있는 사람도 있죠. 이 두 사람의 선택의 자유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배불리 먹고 싶다고 그런 일이 가능해지지는 않겠죠. 결국 자유라는 것도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자유로 한정되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마치 사람이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하늘을 날 수는 없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는 배불리 먹을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비단 가난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걸 극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죄악이고, 인생에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난하다면 그걸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싫다면 배불리 먹고 싶은 생각을 관둬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서의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누구도 원망할 필요는 없겠죠.
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에 대해서 더 생각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이미 지나간 것이 날마다 태엽처럼 감기고 풀리면서 단조롭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매일 만나는 친구와 만나서 강의실에 들어가고 어제와 같은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하곤 합니다. 저는 역시 어제처럼 책을 읽기위해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치죠. 마치 어제의 일을 지금 다시 기억하는 것 같은 오늘. 우리의 인생이 자유롭고 거기에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펼치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이미 보았고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보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제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저는 제가 내일 할 일이나 내일 나에게 일어날 일들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무한히 반복되는 이상한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어제와 오늘,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이 단지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날씨가 따뜻하다는 것 정도의 차이라면 마땅히 설명할 것이 없겠죠. 우리의 두려움이 우리 스스로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자신 이외의 외적 요인에 잘못을 돌리곤 합니다. 잘못된 사회구조라든가. 결코 그 무엇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자신의 자유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일어난 일들이니 거기에 대한 책임이나 벌어진 일들을 감내해야 할 주체도 자신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겪어내는 방법 또한 내 자유이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운명이라며 체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제 인생에 대해서 선택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운명이란 없다는 말은 얼마나 희망적인가요.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가 그 결과를 향해 나아간 것이 될 것입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패배를 무릎쓰고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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