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우리 이제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그동안 나 많이 좋아해줘서 고마워"
"정현아.. 나 너 없으면 안되는거 알잖아..이러지마 제발"
"오빠 미안 더 이상 연락 안했으면 좋겠어"
벛꽃이 피기 시작한 2015년의 봄날, 나의 봄날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너무나도 좋아했던 그녀였기에 이별 후 나의 하루하루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힘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날들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이별의 충격으로부터 어느정도는 벗어났지만 아직 가슴 속의 먹먹함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다
길가를 어지럽히던 분홍 벛꽃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렇게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찾아왔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오면서 영원히 치유받지 못할 것 같았던 내 마음에도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요. 설탕 빼고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금방 준비해드릴게요 ^^"
바리스타였던 나에게 새로운 직장이 생긴 것은 그무렵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곳은 집에서 도보로 1시간, 버스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크지 않은 매장이었기에 사장님과 몇 안되는 직원들끼리 오손도손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반복될수록 이별의 상처는 점점 희미해져가는것 같았다
출근할 때는 일부러 1시간 정도 일찍 나와서 걸어가는 것을 즐겼다
원래 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1시간 정도는 힘들지 않게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하고 나서 퇴근할때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에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일하는 매장에서 우리집까지 가는 버스는 42번, 92번 이렇게 2대 밖에 없었다
배차 간격은 둘 다 10분 정도였는데, 나는 새로운 매장에 일한 뒤로 항상 집에갈때면 42번 버스만 이용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보면 종종 92번이 먼저 오곤 했지만 그냥 보내고 언제나 42번을 타고 집에 간 이유는 바로 헤어졌던 그녀와 언제나 함께 타고다녔던 버스가 92번이었기 때문이다
가슴 속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 버스를 타면 꾹꾹 눌러놓은 상처가 벌어져 그때의 좋았던 기억이 떠오를거 같아서, 그렇게 너무 슬퍼질거 같아서 피하고 싶었던거같다
아직까지 그 친구와 했던 추억들과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부끄럽지만 정말로 나는 그랬다
새로운 매장에서 일한지도 어느덧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평소대로 마감을 하고 집에 가려고 매장을 나선 것은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나는 집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버스도착시간을 알리는 어플을 실행했다
'42번 버스 도착 시간 5분 남음 / 92번 버스 도착 시간 10분 남음'
42번 버스가 먼저 온다고 되어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으로 보아 정류장에 도착하면 곧 42번 버스가 올 것이었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도중 나는 평소와 다른 감정에 휩싸였다
헤어진 그녀가 너무 보고싶었다
아니 평소에도 보고 싶었지만 왠지 그날은 감정이 추스려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와의 추억이 너무 그리웠고 계속 떠올랐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추억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른 감정에 내가 왜이러지 하면서 적응이 되지 않던 와중에 어느덧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1분 뒤에 42번 버스가 내 앞으로 와서 정차했다
나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92번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그 날 느꼈던 감정은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지만 그 날 밤의 나는 92번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서 그녀를 생각하고 싶었다
창밖을 보면서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추억과 마주보며 마음껏 슬퍼하고 싶었다
평소에 그렇게 피해가고 돌아가려 했었던 것들을 마주보고 싶어진 것이 어째서 그날이었던걸까
추억으로부터 안전한 버스가 먼저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픔을 각오하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42번 버스를 그냥 보낸지 10분이 지나도 92번 버스는 오지않았다
추운 날씨에 오들오들 떨면서 한 생각은 "그냥 탈걸..괜히 보냈다" 였다
92번 버스가 도착한 것은 15분이 지나서였다
나는 버스에 탄 다음에 자주 그녀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창문 밖에는 그 시절의 나와 그녀가 웃으며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정현아.."
"삐뽀삐뽀삐뽀"
갑자기 요란스런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그러고보니 좀 아까도 이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때 창밖으로 보인 것은 갓길에 정차한 42번 버스, 그리고 구급차였다
앞서간 42번 버스는 큰 사고가 있었는지 앞 유리창이 모두 깨진채였고 버스 앞부분 역시 심하게 찌그러진 상태였다
버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몇몇 승객은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이동되었다
다친 사람 중에는 정류장에서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도 보였다
내가 탄 92번 버스는 순식간에 현장을 지나가버렸다
나는 놀라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버스는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멍한채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몸을 물에 적시니 그때서야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작스런 감정변화에 평소에 그렇게 피해다녔던 버스를 일부러 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로 인해서 사고를 피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우연스러운 이 사건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냥 나는 옛 여자친구가 그래도 멀리서 내가 잘 되길 빌어주고 있어서 이렇게 위기를 피한 것이 아닐까하고 편한대로 생각해버리기로했다
ps. 이야기에서의 여자친구의 이름, 버스번호를 제외한 내용은 모두 실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