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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필 아르바이트를 제의받은 적이 있다. 출판사를 창업하고 이듬해였나. 모 기업의 창업자가 은퇴한 이후 자서전 쓰는 걸 도와주는 일이었는데 깜짝 놀랄 만한 고료를 준다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밝히긴 좀 그러니 ‘제이 여사님’이라고 해둘까. 내가 한겨레에 연재하던 칼럼이 마음에 들어 섭외했다고 한다. 마침 돈이 궁하던 차였다. 그해 여름,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제이 여사님이 사는 전원주택에 가서 인터뷰 비슷한 걸 했다.
여사님의 으리으리한 전원주택에는 책이 많았다. 독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 심지어 전자제품을 싫어해서 티비도 보지 않고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았다. 여사님은 나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가끔 북스피어 출판사에 관한 고민을 털어놔도 흔쾌히 조언해 주었다. 다만 본인에게는 손해다 싶을 만큼 입이 거칠고 말이 험했다.
저택에 드나들며 아르바이트를 한 달쯤 했을 때, 나는 제이 여사님에게 받은 계약금으로 애플에서 출시한 1세대 아이폰을 구입했다. 당시 제이 여사님은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그때 이미, 막 인터넷으로 책을 팔기 시작했던 작은 회사 아마존의 가치를 꿰뚫어 봤으니 정말 투자의 귀재라고 해야겠지. 여사님은 다섯 종의 신문을 구독하고 그걸 매일 읽으며 투자할 종목을 고르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틈틈이 정리한 원고를 다듬을 일만 남아서 더 이상 전원주택에 갈 일도 없었다. 급하면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이별이라면 이별인데 제이 여사님에게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었다. 그동안 회사 운영의 노하우를 가르쳐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뭐가 좋을까. 며칠을 고심하던 나는 아이폰을 선물하기로 했다.
아이폰을 들고 갔을 때, 아니나 다를까,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 제이 여사님 앞에서 나는 아이폰 앱을 열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주식 시세를 보여주었다. 여사님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떡 벌렸다. 실시간으로 해외 기사를 읽을 수 있는 방법도 설명해 주었다. 여사님은 마침내 말했다. “자주 쓰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어쨌거나 선물이니까 감사히 받으마.”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이폰에 완전히 푹 빠졌으니까. 마치 60년 동안 금주하던 중에 시험 삼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가 하룻밤 새 알코올 중독자로 돌변한 사람 같았다. 여사님은 거의 매일 나에게 전화해서 자신이 새롭게 터득한 아이폰의 기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집 뒤편에서 자라는 버섯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보내기도 하고 아이폰 메모장에 짧은 일기를 쓰기도 했다.
여사님이 좀 더 일찍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고 나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 나는 이렇게 답장했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라고, 아직 사실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느냐고. 그 대화가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공교롭게도 그다음 주, 어렵게 마무리한 자서전의 원고를 들고 전원주택을 찾았을 때 여사님은 이미 책상에 앉은 채로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전원저택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기겁을 하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멍하니 서재에 앉아 있었다. 제이 여사님의 시신을 지키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무서움이 아니라 그리움이었다. 아마도 그런 그리움이 만든 행동이었을 텐데, 나는 제이 여사님의 아이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훔칠 의도는 없었다. 상심의 반응이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제이 여사님의 유품 하나를 가지고 있고 싶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제이 여사님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정재계의 인사들이 엄청나게 좋은 차를 타고 줄줄이 참석했다. 나는 하룻밤을 꼬박 세우고 장지까지 따라갔다. 운구 행렬이 선영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여사님의 아이폰을 꺼내서 메모장에 이별인사를 적었다. “여사님과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어요. 자서전은 제가 힘닿는 데까지 홍보할게요.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러고는 하관할 때 다른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구덩이 안으로 슬쩍 전화기를 던져 넣었다.
한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 내 아이폰에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빌어먹을 놈아, 내 자서전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북스피어 책이나 많이 팔아라. 말을 안 들으면 엉덩이 껍질이 벗겨져서 피가 날 때까지 때려 주마. 그리고, 나야말로 고마웠다.” 식전 댓바람부터 확 소름이 돋았다. 왜냐면 그건 제이 여사님의 아이폰 번호였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1세대 아이폰의 배터리 수명을 고려할 때 일주일이면 이미 기계가 꺼졌을 텐데. 영혼 통행증을 발부받아 환생이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정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건 한 달 뒤였다. 대관절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신 형제자매님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영혼 통행증>과 스티븐 킹의 <피가 흐르는 곳에>를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둘 다 ‘죽음과 인생의 무게’를 담고 있는, 좋은 작품이에요. 나란히 읽어봐 주시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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