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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劉載興 | |
생애 | 1921년 8월 3일 ~ 2011년 11월 26일 (9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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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본관 | 강릉(江陵) |
별명 | 호(號)는 국헌(菊軒)·자헌(自軒) |
종교 | 불교 → 개신교 |
부모 | 유승렬(부), 정열(모) |
배우자 | 윤의상 |
자녀 | 슬하 2남 3녀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1년 ~ 1945년 (일본군 육군) 1949년 ~ 1960년 (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일본군 육군 대위 대한민국 육군 중장() |
근무 | 육군 제2군단 육군 제3군단 육군본부 육군 제1군사령부 연합참모본부 |
지휘 | 육군 제2군단장 육군 제3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1군사령관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대한석유공사 사장 한국골프협회 고문 |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이다.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에서 출생하였고 다섯 살 때인 1925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충청남도 공주에서 성장하였다. 평안북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제55기)를 졸업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주 태국대사로 있던 1962년 9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였다. 1963년 주 스웨덴 대사에 임명되었다.[8] 이어 주 이탈리아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0년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에, 197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퇴임 후 1974년부터 6년간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있었다. 1978년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83년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1991년 성우회 회장이 되었다.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2011년 11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출처 : 위키백과-
-현리전투-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됐을 때 벌어진 전투로, 유재흥은 3사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전체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게 되었고,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 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며 철저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가 서툴러 군에 명령을 하달할 때 "돌아가라"를 "또라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리 전투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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