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행길
어느덧 선명한 햇살이 감히 창문을 넘으며 살을 뜨겁게 달구는 여름이다.
난 침대에 누워 있다 도저히 그 열기를 참을 수 없어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나, 진짜 더워 죽겠네..."
여름만 되면 언제쯤 겨울이 올까 달력을 뒤지는 것을 반복한지도 어언 6년이다. 그 정도로 난 여름을 싫어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살까?)
허나, 창밖 너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도로를 보고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난 땀과 열기로 가득찬 방을 나가 거실로 향했다. 역시나 거실도 다를 바는 없었다.
(아 좀 시원한 거 없나...)
기분 좋은 냉장고 바람을 맞으며 그것을 뒤적거리던 와중에 문득 내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산..이나 가볼까..?)
평소에 운동을 죽을 만큼 싫어했던 나였지만, 시원한 산바람이 온몸을 스치는 상상을 하자 지금의 불가마 같은 집구석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 산을 가는 거야!"
난 그 충동스런 성격에 걸맞게 이내 컴퓨터를 키고 무작정 인터넷에 산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어디가 좋을까..?"
포털에 산이라는 한 글자를 검색하자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들이 화면에 펼쳐졌다.
그 중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역시나 맨 위에 뜬 블로그였다.
"시원한 지리산으로의 여름 여행이라..."
난 블로그를 클릭해 그것을 대충 둘러보기 시작했다.
[계곡물이 진짜 시원하더라구요~]
(계곡..? 그래, 계곡 좋지!)
사실 계곡은 대부분의 큰 산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지만, 내 단순한 머리는 지리산의 계곡이 유일한 것인 마냥 받아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바로 지리산이야!"
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대충 지갑, 핸드폰 등의 귀중품과 만약을 위한 두꺼운 옷 한 벌, 그리고 평지에 깔 돗자리 하나만을 챙긴 채 집을 나서자, 집 안에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뜨거운 햇빛이 내 눈을 괴롭혀 댔다.
"와, 이건 진짜 미쳤다 미쳤어."
난 한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며 간신히 내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차에 올라 GPS로 지리산을 검색하니 곧 그것이 온화한 기계음으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4시간 걸립니다.]
"헐, 4시간이나 걸려..?"
그 긴 시간 동안 차 안에 갇혀 있을 걸 생각하니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아..아니야, 그래도 집에 쳐박혀 있는 것보단 낫잖아."
난 동시에 노래와 에어컨을 키며 애써 귀찮은 마음을 다잡았다.
(도착하면 계곡 먼저 가야지~)
난 산속에서 시원하게 놀 내 모습을 상상하며 이내 힘차게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두 개나 타며 무려 4시간 만에 도착한 지리산은 그간의 피로감을 싹 지워줄 만큼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야~ 쥑이네~"
그렇게 산을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문득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굶주린 소리가 들려왔다.
4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 한 허기가 이제서야 올라온 것이다.
"하, 이젠 배고파 죽겠네.."
난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대충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렇게 배가 부르자 미처 준비하지 못 한 한 가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 맞다! 여행이라면 먹을거리가 있어야지!)
산에서 절경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편의점에 진열된 모든 음식들이 매력적으로 보여졌다.
난 곧바로 맥주와 기타 여러 간식들을 산 뒤 편의점을 나왔다.
이젠 배낭이 제법 두툼해져 있었다.
"그래, 이거지! 이제야 진짜 놀러 온 것 같네~"
그렇게 한껏 들뜬 마음으로 더위도 잊은 채 난 산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야~ 역시 오길 잘했네. 시원하니 아주 좋아."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바람을 맞으며 올라가는 산길은 처음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등산로를 경시하며 내 멋대로 뛰어 올라가자 얼마 안 가 곧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헉..헉.. 괜히 뛰었나..."
평상시 내 체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작 15분 만에 이렇게 지치다니..)
"하.. 그냥 빨리 계곡이나 가자."
난 표지판이 나올 때까지만 버티자는 집념으로 계속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길을 오를 때마다 뒤로 쏠리는 배낭 때문에 난 등을 굽혀 가면서 오르막길을 걸었다.
(내가 왜 괜히 이런 데를 와서..)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순간 저 멀리서 갈림길과 길을 안내하는 팻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난 기쁜 마음에 가파른 길을 뛰어 올라가며 표지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니, 계곡까지 2km나 남았다고?!"
난 근처에 있던 큰 바위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2km 동안 이걸 메고 가야 한다니..)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시간 낭비에 기름값 낭비잖아..)
결국 헛짓거리의 허전함과 몸의 피로감 중 난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래, 기왕 온 거 목적은 달성해야지)
난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팻말이 가리키는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로 이루어진 그 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이마엔 하나같이 엄청난 수의 땀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러자 나도 곧 저렇게 땀으로 흠뻑 젖을 거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효.. 계곡까지 언제 올라가냐..."
왜때문인지 아까보다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이끌고 그렇게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내 왼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거 물소리잖아?"
그것은 계곡의 물소리였다.
낮은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와 빠르게 흘러가는 물소리가 합쳐진 그 소리는 매우 흐릿하게 내 왼쪽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쪽 길에도 계곡이 있나..?)
난 몸을 돌려 왼쪽 길을 바라봤다.
빛이 잘 들지 않고 무언가 축축해 보이는 그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듯 나뭇잎과 가지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그 쪽을 가리키는 표지판엔 글씨가 거의 다 번져 있어 뭐라 적혀 있는지 읽기가 힘들었지만, 빨간색으로 적혀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길이었지만, 내 머리는 이미 이쪽 길이 완벽한 대책인 것마냥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래, 여기로 가면 더 빠르게 계곡도 가고 몸도 덜 피곤하고, 완전 일석이조잖아?)
난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왼쪽 길로 방향을 돌렸다.
"오~ 여기는 그렇게 힘들지 않네."
아까의 돌길과는 달리 적당한 가파름과 시원한 그늘이 들어선 이 길은 내게 엄청난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 역시 이쪽 길이 답이었어)
한껏 들뜬 분위기로 가벼운 발걸음을 이어가는 내겐 주위의 경치가 모두 조화롭게만 느껴졌다.
허나, 그 음침한 풍경화를 둘러보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한 명뿐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몸에 조금씩 피로감이 몰려오자 문득 주변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높이의 나무들과 축축히 젖은 길, 그리고 간간이 한 줄기씩 새어 들어오는 빛들, 이곳은 지금 바로 저 나무들 사이에서 귀신이 튀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음산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몇 명 봤지..?)
생각해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시끌법적하게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이 길에 들어선 뒤로는 단 한 명도 보이지가 않았다.
"혼자 가는 게 조용하고 더 좋지, 뭐..."
난 서서히 차오르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일부로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걸어갔다.
그 흔한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오로지 물소리와 내 목소리만이 울리는 이 어두운 길이 이상하다고는 느껴졌지만, 왜인지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흐우.. 여기 뭐 이리 추워..."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마냥 시원하게 느껴졌던 이 길이 이젠 한기가 들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해가 지기까진 아직 3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그렇지만 이젠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난 어쩔 수 없이 이끌렸다.
난 배낭에서 두꺼운 옷을 꺼내 입은 뒤 걸음을 재촉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가며 구불구불한 길을 계속 따라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 크기의 소리가 들릴 정도면 바로 눈앞에 보여야 할 계곡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뭐지? 소리는 들리는데 왜 보이지가 않아..?"
그렇게 한참을 찾아도 계곡은 커녕 작은 개울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그새 또 얼마나 지났는지 조금씩 들어오던 빛줄기들이 이젠 붉은 석양을 띠고 있었다.
"안되겠다. 그냥 돌아가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뒤를 돌아 내가 온 길을 바라봤다.
"뭐..뭐야, 이거?!"
내 뒤에 남아 있는 길을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선명히 보이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뒤를 돌아보니 그 흔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이쪽인가? 아니면 이쪽...?"
마치 머릿속에 무언가 지나간 듯 지금까지 왔던 과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몸을 한 바퀴 돌려 봐도 다 똑같이 보이는 풍경에 이젠 방향감각마저 희미해졌다.
그 와중에도 선명히 들려오는 물소리는 계속해서 내 머리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난 패닉에 빠져 그냥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태양빛에 쫒겨 단순히 그저 길인 것처럼 보이는 곳을 밟아 가며 달렸다.
터질 듯 요동치는 가슴의 고통도 느끼지 못 한 채, 반쯤 희미해진 정신으로 달리는 내 옆으로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무슨 소리지..?"
규칙적인 리듬으로 스스슥거리는 그 소리는 사람의 발에 쓸리는 수풀 소리였다.
(사람이다! 다행이야!)
난 근처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기에 난 곧바로 사람의 실루엣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훤칠한 키의 남자의 모습이었다.
"저..저기..."
내가 말을 걸자 남자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내 쪽을 바라봤다.
"아..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길을 잃었는데 혹시 내려가는 길을 아시나요?"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저기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난 괜히 무안해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어두워서 길이 잘 안 보이네.."
어색한 혼잣말을 해대며 핸드폰 화면을 킨 그 순간, 난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뭐야?!!"
여태까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내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반사적으로 빠르게 뒤걸음질쳤다.
마음 같아선 당장 뒤돌아 전력 질주하고 싶었지만, 결코 그에게서 눈을 떼선 안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오..오지마!"
내가 뒤로 물러가는 속도를 높이자 그 남자는 천천히 손을 내 쪽으로 뻗으며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씨..씨발!!"
난 결국 뒤를 돌아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말라고!!!"
차가운 바람이 볼을 가르며 동시에 귀에선 그것의 소리가 휘몰아쳤다.
전방엔 심하게 흔들리는 팔 때문에 덩달아 요동치는 핸드폰 불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씨발!!!"
내 발소리 뒤로 선명하게 이어지는 그 남자의 발소리에 난 다리에 더욱 힘을 주며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갔다.
그 순간, 뭔가 발등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이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아..안돼!!)
난 손으로 땅을 짚으며 재빨리 일어섰다. 그 과정에서 난 뜻하지 않게 내 뒤를 아주 잠깐 볼 수가 있었다.
"허억!!"
사람이 극한의 두려움에 빠지면 몸이 굳어 버린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난 이제 두 손을 이용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그로부터 도망쳤다.
손에 있는 핸드폰의 액정이 깨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짐승처럼 네 발로 빠르게 기어오는 그 남자의 모습에 난 살기 위해 뛰는 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허나, 몸은 마음만큼 따라주질 않았다.
"헉..헉.."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더 이상 낼 여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리에 서서히 힘이 빠지며 느려지는 나와 달리 내 등 뒤에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하염없이 커져만 갔다.
"하아... 아..안돼..."
그렇게 그 남자의 숨결이 바로 내 등 뒤에서 느껴질 때쯤, 모든 것을 포기한 내 앞에 조그만 오솔길이 나타났다.
(사..살았다!!)
난 없던 힘까지 짜내며 거친 산길에서 평탄한 그 길로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길에 오르니 내 양옆으로 하나씩 쌓여 있는 커다란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난 몸을 곧게 세우며 평지로 된 그 길을 따라 다시 힘겹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뒤쪽에서 분명히 들리던 남자의 웃음소리가 이젠 전혀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뭐..뭐지?)
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그는 오솔길에 오르지 못 하며 그저 주위를 뺑뺑 돌고만 있었다.
이젠 날 죽일 듯 노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옆으로 아까 그 돌탑들이 눈에 띄었다.
"설마.. 돌탑 때문에...?"
확실히 커다란 두 개의 그것 뒤로 길 양옆엔 조그만 돌탑들이 줄을 세우고 있었으며, 남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피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런 곳에 누가 돌탑을 쌓은 거지..?)
조금 안심이 든 나는 이 길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며 길을 걷는 속도를 편하게 줄이기 시작했다.
(이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렇게 수많은 의문을 품으며 난 끝 모를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하늘은 어느새 해가 지고 새하얀 달이 그 빈 자리를 채운 뒤였다.
절망적이게도 핸드폰은 액정이 깨지고 이젠 배터리마저 나가 버렸다.
난 어쩔 수 없이 자연의 빛을 이용하며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돌탑에 비치는 희미한 달빛을 따라 길을 걷는 것은 역시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거 얼마나 가야 되는 거야.."
도저히 종점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을 그렇게 한참을 걷자 마침내 저멀리서 길의 끝이 보였다.
허나, 그것이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와, 이건 또 뭐야."
길이 끊어지는 곳엔 하늘에 닿을 듯 높이 펼쳐진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믿기 힘든 점은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들이 마치 발광하듯 달빛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빛나는 거지..?)
그렇게 궁금증을 품으며 계단에 발을 올리자 순간 발 아래서 진동이 느껴졌다.
"뭐..뭐야, 이거?!"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돌로부터 어떠한 맥동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불쾌하다기보단 무언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음악 같은 느낌이었다.
(발이 왜 이렇게 가볍지?)
의아하게도 거의 60도가 다 되는 이 계단을 오르는 것 또한 전혀 힘이 들지가 않았다.
마치 순탄한 내리막길을 걷는 듯한 그 감각에 신기해 하며 잠깐을 걷자, 어느새 눈 앞엔 웬 커다란 절이 나타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난 곧 이 이상한 환경에 대해 생각하길 멈추고 절 안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 계세요? 아무도 없나요..?"
(뭐야, 여기.. 왜 절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환하게 불이 켜진 이 거대한 절 안엔 나밖에 없었다.
작은 건물, 큰 건물, 심지어 변소까지 확인해 보았건만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가 않았다.
(혹시 저 곳엔 누가 있으려나?)
난 마지막으로 체크 안 한 가장 큰 건물로 향했다.
"와, 이 건물은 진짜 크네."
매우 고풍스런 디자인 때문인지 몰라도 건물 자체에서 어떤 신성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건물 안엔 방이 없었으며 그저 중앙에 거대한 불상만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도를 드리는데 사용된 듯 보였다.
난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계세요...?"
대답은 없었다.
그 뒤로 한참을 이어지는 침묵에 실망하며 도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린 그 순간, 오른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뉘이신지요?"
난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웬 스님 한 분이 서 있었다. 흐릿한 미소가 담겨진 인자한 표정의 스님은 정말이지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 스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산에서 길을 잃..."
"어쩌다가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는지... 쯧쯧.."
"네..?"
난 당황하며 스님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니, 애초에 여긴 어디죠?"
그러자 스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일단 따라오시지요."
난 스님을 따라 건물 옆의 작은 요사채로 들어갔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그렇게 자리에 앉자, 스님이 내게 얼굴을 마주한 채 아까와는 전혀 다른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이곳은 이승이 아닙니다."
"네..네?!"
난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전 그냥 등산 중이었다고요... 그럼 도대체 여긴 어디죠..?"
이어지는 스님의 말에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이곳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그 중간의 길입니다. 처자께서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신지는 저도 잘 모르겠으나, 동시에 이곳에 있을 만한 이유도 딱히 없습니다."
날 바라보는 스님의 걱정스런 시선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처자의 등에는 아직 밝게 빛나는 구슬이 보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것을 보존한 채로 산을 둘러싸는 계곡을 넘어 간다면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 뒤로 이어지는 스님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산엔 저승에 갈 준비를 하는 망자들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승으로 돌아갈 생을 원합니다. 만약 그들에게 들킨다면 그들은 처자의 생을 빼앗기 위해 죽을 듯이 쫒아 올 것입니다. 절대로 그들과 접촉해선 안 됩니다. 혹여나 그들의 손이 조금이라도 닿는다면 생을 잃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난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결코 내 몸을 지탱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 받으십시오. 이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스님은 내게 작은 등불을 건네주었다.
그 조그만 불꽃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참아 왔던 눈물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괜히 산을 와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고 있는 내가 참으로 한심하고 또 불쌍했다.
그렇게 울고 있는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진 내 앞의 자리엔 움푹 패인 방석만이 허전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등불에 의존한 채 산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절대로 그들과 마주쳐선 안 돼...)
난 스님의 말씀을 수십 번 되새기며 천천히 길을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순간 내리막길이 끝나며 이어서 드넓은 평탄한 지대가 나타났다.
(아.. 좀 살 것 같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해방감 때문인지 몰라도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고, 곧 머릿속은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올랐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가 이 저승길에 오르게 된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때 난 왼쪽 길로 방향을 틀었어)
장담하건데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그때 그 갈림길에서 왼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는 음산한 길을 따라가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행동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여전히 한 가지 큰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그럼 도대체 언제부터 이 일이 시작된 거지?)
그것만큼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왼쪽 길에 들어선 뒤로 어느 시점에서부터 난 이 말도 안 되는 곳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결코 짐작할 수도 없었다.
(혹시.. 물소리를 들었을 때부터인가?)
그럴듯한 가정이었지만 물소리가 처음 들린 곳은 갈림길이었으며, 그때에는 내 옆에서 사람들도 지나가고 있었다.
난 답을 낼 수 없는 추측들을 포기하고 이내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아까는 물소리가 계속 들렸는데... 잠만! 물소리?!)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줄곧 들려오던 물소리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래! 계곡!!"
탈출구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금은 들리지 않는 그 물소리의 근원이 바로 스님이 말한 그 계곡이었던 것이다.
그곳만 찾으면 난 여기서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빨리 아까 왔던 길을 찾아야 해)
난 이미 지워진 흔적들을 쫒아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평야는 끝나고 또 지독하게 이어진 내리막길이 날 마주했다.
(기억을 떠올리자.. 기억을 떠올려...)
난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며 내가 있었던 그 자리를 머릿속에 그려 보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거긴 축축하고 또 검은 나무들이 많았어!!)
난 한 줄기 희망을 품으며 습기가 찬 낙엽들과 가장 어두운 나무들을 찾아 꼼꼼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아까와는 달리 비교적 습하게 느껴지는 공기에 난 바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만져 봤다.
"여기 있다! 축축한 길!!"
난 겨우 찾아 낸 그 습기 찬 길을 따라 무작정 뛰어가기 시작했다.
살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희망에 이미 머릿속은 새하얗게 지워진 뒤였다.
그렇게 망자들과 마주쳐선 안 된다는 스님의 충고도 잊은 채 어두운 산길을 달리는 내 앞으로 곧 알 수 없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뭐야, 여긴..? 이런 곳이 있었었나...?"
그것은 상당히 큰 시골 마을이었다. 아니, 시골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완전한 조선 시대 풍의 촌락이었다.
중앙의 넓은 흙길 양옆으로 펼쳐진 수많은 초가집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간간이 보이는 기와집은 시대감각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선명했다.
그렇게 당황하며 마을을 바라보는 와중에 순간 내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느껴졌다.
"뭐..뭐야 저기?!"
그것은 사람들이었다. 마을 중앙에 광장 같은 곳에서 수많은 망자들이 줄을 지어 원형으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허공에 의미 없는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이따금 들려오는 그들의 곡소리는 꽤나 먼 거리였음에도 뇌리에 박힐 정도로 크고 분명했다.
(저길 어떻게 지나가지..?)
난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망자들은 광장뿐만 아니라 마을 곳곳의 집 안에서도 보였지만, 확실히 외곽쪽에선 그 수가 현저히 적은 것 같았다.
난 이내 마음을 먹고 마을 입구를 지나 가장자리로 빙 돌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한두 번 내 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왜인지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의 빛을 전혀 보지 못 하는 듯하였다.
(이제 이곳만 지나면 돼..)
한참을 돌아 마을의 반대편에 왔을 때쯤 상당히 귀족스러워 보이는 기와집이 내 앞에 나타났다.
집 주변엔 망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집 안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보네)
난 안심하며 기와집의 대문 앞을 지나 마침내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의 끝까지 도달했다.
〔 끼이익 〕
그때 정말 거짓말 같이 기와집 안방의 문이 열리며 작은 하얀 실루엣이 그 안에서 나타났다.
"뭐..뭐야?! 허억!!"
새하얀 소복을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과 내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공허한 눈길은 무심히 내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날 지켜볼 때 드는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뒤로 한참을 이어지는 정적에도 왜인지 난 땅바닥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노인의 시선이 내 등 쪽을 향하며 그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려 웃기 시작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참으로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한순간 웃음을 뚝 그치더니 이내 엄청나게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구슬 내놔!!"
백발의 노인이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렁찬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에 내 존재를 알아챈 다른 망자들이 마을에서부터 몰려오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난 앞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 다리의 피로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뛸 수가 있었다.
다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자들의 절규가 내 두 다리를 쥐어잡을 뿐이었다.
[살고 싶어.. 제발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한 번만 가족을 보게 해 줘...]
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허억!!)
구슬픈 문장을 읊어 대며 죽일 듯이 날 쫒아 오는 그들의 괴악한 모습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싫어! 안 돼!!"
난 다리에 힘이 빠지지 않도록 일부로 의식해 힘을 주며 산길을 내달렸다.
허나, 산의 가파름은 20대 여인이 달리기엔 그리 쉬운 환경이 아니었다.
"허억.. 허억..."
점점 체력이 고갈되며 늦춰지는 나와 달리, 뒤의 수많은 그들은 마치 날아오듯 연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안 돼...)
내 발걸음 뒤로 들려오는 한탄은 어느새 살기 어린 협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년아, 거기 안 서?! 구슬 빨리 내놔!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다..]
그들의 외침은 갈수록 더 커져만 갔고 극복할 수 없는 공포감에 다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하아.. 안 돼,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절망하며 거의 기다시피 오르막길을 뛰는 내 뒤로 그들의 손짓이 닿을 듯 말 듯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그 절박한 순간, 내 앞에 기적 같이 계단이 나타났다.
등산로처럼 잘 정비된 그 통나무 계단은 경사를 기울여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살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난 달리는 속도를 한층 높여 계단으로 뛰어 올랐다.
이어서 무리하며 넓은 보폭으로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내려가자 야밤의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부딪혔다.
그 와중에도 망자들의 외침은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 연신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물소리다!!!)
순간, 저 아래서부터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온 신경을 다리와 귀에 집중한 채 흐릿한 그 소리를 따라 길을 헤매어 달리기 시작했다.
"차..찾았다!!"
얼마 안 가 내 왼편에서 달빛을 받아 난잡하게 반짝이는 물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갈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젠 내 등 바로 뒤에서 놈들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난 이제 등불까지 내던진 채 양 팔로 나무들을 밀어내며 몸에 가속도를 주었다.
잡힐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추격전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계곡만을 응시한 채 그곳에 가까워지자, 뒤에서 외쳐 대는 그들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들려왔다.
[안 돼.. 제발 가지 마!!!]
난 슬피 울어 대는 망자들을 무시한 채 계곡 바로 앞까지 뛰어갔다.
"끄..끝이야!!!"
그렇게 마침내 계곡에 들어서며 발을 담구는 그 순간, 하늘에서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온 공간을 떨리게 만드는 그 엄청난 소리 뒤로 하늘에서 갑자기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하필 지금..."
그것은 비라기보단 거의 창과 같았다.
고드름만한 굵기의 거센 물방울들이 내 어깨와 머리를 강타해 댔으며 그 충격에 난 앞으로 전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아..안 돼!!"
이윽고 계곡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며 인근에 빽빽이 세워져 있던 나무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괴물과도 같은 물살에 난 하염없이 끌려갔고 날 따라오던 망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려줘!! 빨리 구슬.. 구슬!!!]
한밤의 늑대처럼 울부짖는 그들의 절규가 내 귓가에 아주 선명히 맴돌았다.
이런 와중에도 구슬을 찾아 대는 그들이 이젠 오히려 역겹게 느껴졌다.
그렇게 왜인지 서서히 작아지는 주위의 소리와 함께 내 시야도 점차 어두워져 가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햇살과 선선한 산바람이 내 몸을 감싸안아 왔다.
그 기분 좋은 감각에 난 천천히 눈을 뜨며 흐릿하게 번진 시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제멋대로 자란 굽은 나무들과 못생긴 바위들, 그리고 하늘의 틈으로 물 새듯 들어오는 하얀 빛줄기까지.
"여..여긴?!"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누워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세 방향으로 뻗친 길들과 그 중앙에 있는 표지판 두 개, 왼쪽을 향한 곳엔 글자들이 붉은색으로 번져 있었으며 오른쪽을 향한 곳엔 계곡이라는 단어가 무심히 적혀져 있었다.
"드디어..드디어 돌아왔어..."
잡고 있던 모든 긴장이 다 풀리자 이어지는 몸의 반응은 힘이 빠져 버린 다리와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어 대는 내 모습이 결코 좋게 보일 리는 없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생각에도 없었다.
단지 이제 끝났다는 그 생각 하나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난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길을 이루는 계단들과 울타리를 본지 약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몇 년 만에 보는 고향 집처럼 너무나 반갑게 느껴졌다.
그렇게 잽싸게 입구까지 내려오자 주차장에 외로이 서 있는 내 차가 눈에 들어왔다.
난 빠르게 차로 뛰어가며 곧바로 열쇠를 꺼내 차 문을 열었다.
평소엔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고 구박만 하던 차가 이젠 마냥 고맙게 느껴졌다.
난 차에 들어가 운전석에 앉은 뒤 눈 앞의 전경을 바라보며 이내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정신이 편안해지며 아까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단순히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건 그냥 악몽이었을 거야."
그러다 문득 아까 봤던 스님이 떠올랐다.
너무나 평온해 보였던 그 얼굴이 어쩐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자, 마치 날 반기듯 골골대는 엔진음이 이어서 들려왔다.
"그런데 지금 몇 시지?"
난 시선을 내려 차에 있는 디지털 시계를 바라봤다.
[88:88]
"뭐..뭐야?!"
모든 빛이 들어온 디지털 숫자 특유의 그 문양에 난 당황하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그곳엔 시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시침, 분침, 초침, 그 어떤 바늘도 없이 숫자만 적혀 있는 그 시계는 도저히 내가 알던 물건이 아니었다.
"자..잠깐만..."
난 그때 깨달았다.
산을 내려와 지금까지 날 제외한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가 않았다는 것을.
살기마저 느껴지는 여름의 햇빛은 그저 무심히 검은 본넷을 달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 서서 힘겹게 대화를 해대는 두 명의 남자는 옷이 다 축축하게 젖어 표정이 좋아 보이지가 않는다.
"나 참, 이 여자 차 두고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이봐 박형사, 정말 CCTV에 찍힌 거 맞아?"
"네.. 분명 3일 전에 이 쪽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그럼 저쪽에서 나와야 하는데 왜 저쪽 CCTV엔 찍히지가 않았냔 말이야?!"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이 코스는 길이 하나에 그리 길지도 않아 헤매었을 리가 없는데..."
"아니,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 여자?"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운동을 목적으로, 놀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단순히 취미로 온 그들은 버티기 힘든 여름 날씨에도 줄지어 산을 오르고 있다.
이 길을 여러 번 걸은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처음 밟아 보는 길이리라.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작은 갈림길에 들어선다.
그의 앞으로 보이는 두 개의 표지판, 한쪽은 글씨가 붉게 번져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가 양옆 길과 팻말을 번갈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이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렇게 이어지는 그의 '초행길'은 갈수록 어두워져 결국엔 흔적마저 남지 않을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