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해전
영국의 해군사관학교를 비록한 세계 여러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세계 4대 해전으로 불리는
기원전 408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 1592년의 한산 해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 4대 해전을 아무리 살펴뵈도 한산해전만한 해전이 없네요.
다른 해전들은 모두 아군도 어느정도 피해를 입었는데
한산해전만이 피해가 없었으니 말이죠.
그런데도 트라팔가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의 으뜸으로 꼽는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무엇인지 참..................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 제독의 살라미스 해전
제 3차 페르시아 전쟁중인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시킨 해전.
페르시아 함대는 750척,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함대는 380척이었다.
테르모필레-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한 페르시아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아티카를 점령하였으나
살라미스의 그리스군 공격이 여의치 않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거짓 정보를 보내어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하여 11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는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이 사망 또는 부상하였다.
이에 반해 그리스 함대는 46척의 함선을 상실하였다.
이 살라미스 해전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그리스는 해전에서,
스파르타는 육전에서 승승장구하여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2. 1588년 영국 하워드 제독의 칼레 해전
세계사적인 영향이 아주 컸던 전쟁으로 이 전쟁을 계기로 전세계를 지배하던 바다의 왕자
스페인이 쇠퇴하고 그 후 400년간 영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바다의 왕자로 군림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스페인해군은 당시 최강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어 무적함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영국의 함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여 상선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박의 총동원령을 내린상태였다.
스페인은 최정예 함대 130척, 이에 대응하는 영국은 상선등 모든 선박을 합하여 100여척 미만이었는데
보통 80여척 정도로 추정한다. 전투 결과 스페인의 무적함대 80척이 격파 또는 나포되고
도망간 나머지 54척도 크게 파손되었으며 1만 5천명이 사망했다.
이에 비해 영국은 그 피해가 확실치 않으나 매우 경미하였으며 사망자는 천여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영국군은 적벽대전에서 주유와 황개가 했던 것처럼 격랑 속에서 스페인 함대를 향해
8척의 화공선(火攻船)을 발진시켜 스페인 함대가 화염공격을 피하기 위해 닻줄을 끊고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 함대의 대열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영국해군은 이렇게 산개된 스페인 함대와 계속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포를 쏘아
스페인 해군을 격파하였다.
3.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우리한테는 자존심 상하지만 세계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는 해전이 바로 이 트라팔가 해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한산 해전이 더 뛰어난 해전이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이 영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스페인과 연합하여 영국과 일대 해전을 준비하였다.
프랑스 - 스페인 연합 함대는 총 33척 이에 맞선 영국의 함선은 27척이었다.
전투 결과 영국함대는 1척이 파손되고 전사자 약 1600명인 데 비하여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5척이 침몰하고 17척이 나포되었으며 사망자는 8000명이었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직전 넬슨 제독은 전사했으며 넬슨 제독은 전사하면서
"난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 했노라" 고 했다고 한다.
이 해전으로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단념하였다.
4. 1592년 이순신 제독의 한산 해전
임진왜란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제독이
바다의 재해권을 장악하고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총동원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주력 해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일본의 전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제 1 진이 74 척, 구키 요시타카가 이끈 제 2 진이 40여 척,
제 3진의 가토 요시아키의 지원 함선까지 총 110척이 넘었다.
이에 맞선 조선의 해군은 이순신은 원균과 이억기의 지원 함선을 포함해 90여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산 해전과 한산도 대첩을 구분을 못하는데
한산해전은 이순신 제독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진을 격파한 해전이고 뒤이어
구키 요시타카의 2진을 격파한 해전은 안골포 해전.
그리고 한산 해전과 안골포 해전을 합하여 한산도 대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몇 척으로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여
학익진이라는 전혀 새로운 진법으로 총공격을 가하여 74척의 일본 함선중 69척을 침몰시켰으며
일본군 사망자는 90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 측은 단 한척의 피해도 없었으며
인명피해도 약간명에 불과였다.
뒤이어 계속된 안골포 해전에서도 일본은 크게 패함으로써 일본의 해군은 완전히 전멸되었으며
조선이 재해권을 쥐게 되어 바다를 통해 보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된 일본 육군도 후퇴를 해야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 것을 명한다.
지금까지 거론된 세계 4대 해전...
하지만 이 보다 더 뛰어난 해전은 명량해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그리고 그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모조리 말아먹은 조선 해군....
오직 부서진 12척에 병력 120명만이 남은 상황.
모두가 조선 해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선조도 조선 해군을 포기하고 이순신에게 육군으로 싸울 것을 권장하였다.
일본도 제 아무리 이순신인들 12척으로 어찌 이길 수 있겠느냐고 장담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수 있사옵니다."
라고 하며 조선 해군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함 12척과 군사 120여명의 병력으로 전함 133척, 군사 3만여명의 적군을 맞아 싸워 이긴
불가사의한 승리 명량 해전. 일본은 전함 31척이 격침되고 나머지 함선도 크게 파손되었으며
8천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은 단 한척의 전함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전사자 2명과 부상자 3명으로 경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적의 승리에 대해 그다지 경외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
과연 이순신 제독은 어떻게 이러한 승산없는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었을까?
-> 참고로 장군이라는 명칭은 공군과 육군에게 해야 하며
해군에게는 제독이라는 명칭이 맞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이순신 제독이라고 해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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