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란 성을 가진 절도사가 있었다.
이 절도사가 아직 벼슬길에 오르기 전의 일이었다. 관직이 없어 그저 홍생이라고 불리던 터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산 속을 지나게 되었다.
"허!"
급한 길도 아니어서 산 속 경치를 두루 살피며 걷던 홍생은 탄식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산 속에서 비를 만났으니 어쩌면 좋을꼬?"
홍생은 난감하여서 걸음을 빨리하였고 빗방울은 굵어졌다.
산 속 오솔길을 허둥지둥 가다 보니 자그마한 집이 보였다.
홍생은 기꺼워서 단숨에 뛰어가 주인을 찾았다.
"여보시오. 주인장!"
얼마 만에 나온 사람은 젊은 여승이었다.
나이는 열일곱쯤 되어 보였고. 머리는 깎았으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 자태가 황홀하여 홍생은 비를 맞고 서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기가 암자였군....."
"예"
여승은 목소리도 또한 아름다웠다.
"길 가던 사람이 비를 만났으니 잠시 쉬어 갈까 하오.
"들어오십시오."
홍생은 안으로 들어가 두루마기를 벗어 말리게 하고 쭈그리고 앉았다.
여승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은 홍생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암자가 작기는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산 속에 암자가 있는 것은 괴이할 게 없으나 어찌 혼자 계시오?"
"혼자가 아니라 셋이 있습니다. 두 분은 마을로 시주를 받으러 나가셔서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여승은 혼자 있기 적적하던 터라 그런지 대답을 잘하였다.
"혼자 적적하시겠소이다."
"예. 시주를 받으러 가셔서 빠르면 사나흘. 늦으면 이레나 여드레가 걸릴 떄도 있습니다."
"더욱 적적한 일......"
밖에서는 빗소리가 요란하였다.
가끔 천둥 소리도 들려왔고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도 요란하게 들려 왔다.
저녁이 되자 여승은 찬은 없었으나 깔끔하게 밥상을 차려다 주었다.
홍생은 달게 먹고 피곤을 풀고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여승이기는 하였으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단둘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만 하였다.
홍생은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여승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승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고 그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흠!"
홍생은 신음하며 여승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여승은 고개를 떨구어 외면하였을 뿐 잡힌 손목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여기에 힘을 얻은 홍생은 여승의 허리에 팔을 감았고 여승은 눈을 감고 홍생의 품에 안겨 왔다.
홍생은 이날 밤을 여승과 함께 보냈다.
"비가 맺어 준 인연이로다."
이튿날도 홍생은 이 암자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으리, 이미 속인이 된 몸이오니 데리고 가십시오."
여승은 홍생의 무릎을 잡고 애걸하였고, 홍생도 쾌히 승낙하였다.
"암, 어찌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그러나 지금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니 데리고 갈 수 없고
내년 이 달 이 날에 내가 이리로 오지. 다 마련하고서 데리러 올 것이니 일 년만 기다려라."
"예. 꼭 믿고 있겠습니다."
이날 밤에 얼싸안고 자리에 누웠을 때 여승은 또 다짐을 받았다.
"일 년 후에는 꼭 나으리께서 데려가셔야 합니다."
"암."
"만일 안 오시면 아마도 이 몸은 죽을 것입니다."
"흉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기다리다 원통하게 죽었으니 아마도 뱀이 될 것입니다."
"허허....점점 더 흉한 소리를."
홍생은 손으로 여승의 입을 막았다.
홍생은 꽃 같은 여승과 사흘을 지내고서 떠나게 되었다.
비도 멎었거니와, 이 암자에 있는 다른 여승들이 돌아오기 전에 떠나야 했고 또 갈 길이 바쁜 까닭이었다.
여승은 얼마를 따라오며 연방 눈물을 흘렸다.
"나으리, 일 년 후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년 이 달 이 날에 꼭 오지."
"나으리."
애절하게 작별을 하였고, 홍생은 돌아서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꿈 같은 사흘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그 후에 홍생은 여승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한편 여승은 일 년을 꼬박 기다렸고 홍생이 나타나지 않자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병들어 누워서도 홍생만을 기다리다가 여승은 마침내 죽고 말았다.
홍생은 그 후에 벼슬길에 올랐고 절도사가 되어서 먼 남쪽으로 부임하였다.
어느 날 홍생은 방 안에 들어온 자그마한 도마뱀을 발견하였다.
"여봐라. 방안에 벌레가 들어왔다."
하인이 달려와서 도마뱀을 잡아다 땅에 던지고 밟아 죽였다.
다음 날은 실같이 가는 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허. 괴이한 일이다.!"
다음 날도 역시 방 안에 뱀이 들어왔다.
오늘 것은 어제보다 약간 켜져 있었다.
이번에도 하인을 시켜 잡아 죽이게 하였으나 홍생은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허참. 전날에 내가 산 속에서 비를 만났을 때 여승과 사흘 동안을 지낸 일이 있으렷다.
그때 여승이 기다리다 죽으면 뱀이 되겠노라고 말했었는데...."
비로소 지나간 일이 생각나며 겁이 나서 많은 하인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만일 뱀을 보거든 당장에 죽여라."
이튿날도 뱀은 나타났고 달려들어 동강을 내어 죽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뱀은 매일 나타났고 날이 갈수록 점점 큰 것으로 변해 갔다.
"이를 어쩌누?"
아무리 막으려 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자 홍생은 깊이 탄식하였다.
"모조리 죽여 없앨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면 어쩐다?
차라리 방 안에 놔두는 것이 소란을 떨지 않는 길일지도 모르지."
홍생은 이렇게 생각하고 궤를 짜서 그 안에 뱀을 넣어두게 하였다.
매일 새 뱀이 나타나고 이것을 막으려고 법석하던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홍생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였다.
홍생의 방 안에는 언제나 뱀이 들어있는 궤가 놓여 있었고,
어디에 갈 일이 있으면 하인을 시켜 이 궤를 메고 뒤를 따르게 하였다.
어느덧 홍생은 (뱀 절도사)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자자하였다.
"괴이한 일이지. 참."
"어떤 여인에게 못할 일을 해서 저렇게 됐다는군.
아녀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 않나."
"허. 아무튼 망측한 일이야?"
홍생은 접접 정신이 혼미해졌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말이 아니게 야위어 갔고 눈만이 퀭해졌다.
그러니 기력을 쓸 수 없었고 읍식도 잘 먹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죽고 말았으니 말라 죽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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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교훈: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ㄷ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