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건달들이 스님 혼자 사는 절간에 찾아왔다.
건달의 우두머리쯤 되보이는 자가 대뜸 스님께 물었다.
스님도 건달도 중생일뿐 깨달음을 구하고자 이 산골에 찾아온것
이라 생각했다.
건달 : 스님 무엇을 깨달으셨죠?
스님 : 내 오랜 수행으로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소.
풀은 자라서 풀이 되고 염소는 자라서 염소가 되오.
건달 : 그런거 말고 다른 거 깨달은 게 없소?
스님 : 많지요. 지렁이도 좋은 흙을 찾아가고 매말랐던
냇물은 다시 채워지오. 자연은 이렇게 순환하면 그 법칙을
잃지 않습니다.
건달 : 뭔가 심오한듯 속뜻이 있는척하지만 그딴건 애들도
알고 있지 않소? 수십년간 산 속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자연의 이치뿐이요? 그러고도 극락왕생을 바라오?
자기자신에 대해 깨달은 게 없오??
스님 : ....
아무말이 없는 스님은 생각하기를 이 건달이 내게 무엇을
시험코자하는지 생각했다.
건달 : 스님. 딱 3일 주겠오. 3일 후 이 시간 진정 깨달은 게 없다면
목이 잘려 죽게 될 것이오.
건달은 이 말이 빗말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새끼손기락을 도끼로 찍어 잘라냈다.
스님은 참 의아했다.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인가?
3일 내내 건달들은 절간에서 먹고자며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스님은 도망 갈 수도 없었고 시간의 흐름에 초조해지고 있었다.
나는 정말 죽은 목숨이구나! 처음으로 죽음의 예고 앞에 많은 생각이
스쳐가고 입맛도 없고 식은땀만 났다. 건달들의 눈빛을 보자하면
살기가 띄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답이 뭔가? 죽음 앞에 태연한척 죽겠다고
꾀를 부리면 살려줄 것인가? 아니면 부처의 길을 가고자하는
소생을 괴롭게하는 그들에게 호통을 치면 먹힐까?
잠도 오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예기된 때가 온다.
미칠것 같다. 그 동안의 고행도 출가도 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으려고 내가 이 곳을 왔는가? 후회한들 소용이 있는가?
나는 죽는다... 날이 밝으면 죽는다.
날이 밝자. 건달들은 뭉치를 들고 있고 도끼와 머리를 담을 바구니를
준비했다.
건달 : 자 보시오. 3일 전에 자른 내 손가락이오. 내 이 손가락이 아깝지 않을만한 대답을 듣고 싶소. 자. 말하시오.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
깨달은 것을 말하시오. 어서!
스님 : ...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제발... 깨달은 게 없오.
그저 속세를 끊었을 뿐. 배고프면 먹고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자고 고된 수련 후에는 만족하고 음란한 생각이 들면 자위하고 춥거나
밥을 짓는게 귀찮을 때는 불평하고... 무소유라 주장했지만 옷과 신발과 숟가락도 가지고 있고 아프면 약을 지어먹었오. 결속 속세에 있을 때나 그
렇지 않을 때나 나의 삶은 변한게 없고 환경이 달라져도 나는 속세에 있는
사람과 다를게 아무것도 없오. 다를게 없오... 나는 이 고행을 통해 스스
로 특별한 사람이라 착각하면 살은 것 같오.
깨달은게 없오. 내 진정 살고 싶소. 제발 살려주오...
건달 :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오. 고맙소. 사람은 거지로 있을 때나
부자로 있을 때나 악하거나 선하거나 아이거나 노인이거나
모두가 다 같은 똥을 배설하오. 부자라고 선하다고 향기로운 배설을
하는 자가 없오. 속세에 있는 사람이든 속세를 떠난 사람이든
스스로 택한 고행이 아닌 외부로 강압된 고통은 누구라도 벗어나고
싶은 똑같은 인간이오. 만국을 구했더라도 스스로 자부하지 말아야
하오.
스님은 건달의 말을 듣고 난 뒤 눈을 떠보니 스님은 자리에 누워
있었고 밖에 나가보니 건달들이 왔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스님은 그 날 자리를 정리하고 속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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