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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lovestory_93402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507
    IP : 14.58.***.139
    댓글 : 3개
    등록시간 : 2022/07/09 15:50:01
    http://todayhumor.com/?lovestory_93402 모바일
    [BGM] 너를 꺾는다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성금숙, 훔쳐서 쓰다




    초록이 죽고

    초록이 번진


    풍경을 훔쳤다


    내막 없는 슬픔처럼 아름답게

    서어나무 가슴에 뻥 뚫린 구멍


    벌레에 잠식당한

    둥근 무늬들


    못자국처럼 몸에 파인

    네 흔적을 실크로 가렸다

    은폐할수록 그 속에 발이 빠져서

    소멸되고 있을 때


    숲에서 벌레에 먹힌 서어나무 구멍이

    이끼를 키우며 사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생기를

    북돋는 숨소리


    그 풍경을 훔쳐서

    내 몸속에 지녔다


    훔친 생기를

    수시로 나의 표정에 썼다

    발칙하게도

    나는 점점 발랄해져가고 있다

     

     

     

     

     

     

    2.jpg

     

    박준, 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3.jpg

     

    하재연, 로맨티스트




    어제는 당신을 만났고

    오늘은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일까지 이곳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햇빛이 이렇게 맑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 친구는 자살을 했다

    장례식에서 우리는 십 년 만에 만나

    소풍을 떠나는 꿈을 꾼다

    기차를, 기차를 타고

    내년 겨울 우리는 모두 다른 나라에서

    어떤 나라의 겨울은 또 다른 나라의 겨울과

    어떻게 다른지

    눈이 녹고 나면 강물은 더 차가워지는지

    떨어진 벛꽃의 분홍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쭈글쭈글한 아기를 낳고

    그 조그만 아기를 업고서

    시장을 볼 것이다

    몇 개의 봉지를 들고 거리에서 만나

    우리는 모든 걸 감추거나

    모든 걸 드러낸다

    햇빛이 이렇게 눈부셔서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친구들은 빅토리를 그리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당신도 다른 나라에서 돌아와

    흰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하객이거나 문상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살아간다

     

     

     

     

     

     

    4.jpg

     

    김호성, 광합성




    턱 아래서 바람은 조용해진다

    바닥에 엎드린 잎사귀들에게 말을 건다


    우리의 손가락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다

    처음 모서리를 배우는 것


    흙냄새가 난다

    손을 비벼서 살아 있는 정원을 만들 수 있다

    기울어진 화분에 피가 고여 있다

    그곳에 빠뜨린 너를 건져 낸다


    혀가 길어질까 흰 피부를 적실수록 뼈가 보인다

    가장 늦게 도착하는 무늬에게 의지할까

    흔들리는 앞니를 꺼내 화분 속으로 던지고


    부풀어 오르는 손가락을 붙잡는다

    이렇게 차가워질수록 너와 나는 순서가 바뀐다

    눈부시게 날아드는 나비 떼의 속도


    두 손을 모은다

    기어 다니는 붉은 날개처럼

    시큼시큼 녹아내리는 나는


    너를 꺾는다

     

     

     

     

     

     

    5.jpg

     

    오은, 너의 꽃말




    물을 자주 주었는데도

    꽃이 시들었다


    너의 표정에서 생기가 증발했다


    볕을 자주 쐬게 해 주었는데도

    꽃이 시들었다

    꽃이 병들었다

    하늘거리던 내 기억 하나가 사라졌다


    양지바른 곳에 심었는데도

    나무가 어두워졌다

    한 그루의 거대한 그늘이 되었다


    네가 했던 말들이 굴지성을 갖게 되었다


    물이 흐르는데도

    별이 쏟아지는데도

    꽃이 죽고 나무가 거꾸러졌다


    우리의 이름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작아서 눈치챌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더 나쁜 쪽으로

    더 아픈 쪽으로


    꽃을 피우던 마음과

    나무를 키우던 마음은

    땅속으로 땅속으로


    너의 꽃말은

    우리가 심었던 나무의 말은


    미처 움틀 준비가 안 됐는데

    어김없이 오늘도 동이 텄다

     

     

     

     

     


    통통볼의 꼬릿말입니다
    kYOH2dJ.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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