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만4천명을 태운 배들이 남으로 향했다. 그 탈출 행렬에 문재인의 부모도 있었다. 3일만에 도착한 곳은 거제도. 1953년 1월, 문재인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몸을 풀 여유도 없이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집 엄마가 문재인을 업고 어린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네모난 상자에 설탕가루, 실, 술약 같은거를 이고 팔러 다녔어요"
어떻하든 타향에서 살아남야했던 문재인의 부모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이들을 업고 부산 영도로 향했다. 당시 영도는 피난민들의 집결지였다. 문재인은 어머니의 연탄배달을 돕는 가난한 아이였다. "참 가난했거든요? 근데 그 친구 교복은 항상 하얬어요. 까만 교복이 아니라 여러번 빨아서.."
부산 남향 초등학교, "문재인 후보는 65년도 21회 졸업생입니다" 키 작고 몸 약한데다 유난히 말 수 적었던 문재인이 두각을 나타낸 건, 중학교 입시공부를 시작하고 부터다.
자랑스럽게 입학한 경남 중학교, 문재인은 처음으로 빈부격차를 경험한다. 문재인은 앞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말없이 늘 듣는 쪽. "옛날에는 굉장히 조용해서 학교다닐 때는 없는 줄 알았을 거에요. 학교 독서실에만 난로를 피워줘요. 집에 가서 공부할 여건이 안되는 학생들이 공부했는데 항상 재인이가 거기에서 공부했거든요"
명문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모범생과 거리가 멀었다. 그 시절 별명이 '문제아' 하지만 어떤 친구에게 문재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정 깊은 학생이었다. "소풍을 가는데, 저는 잘 못 걸으니까 못간다고 포기를 했는데 재인이가 나를 업었어요."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발표 이후, 전국이 반대 시위로 들끓었을 때 고등학생들도 '교련 거부운동'이 한창이었는데 문재인도 그 속에 있었다. "순응하는게 아니라 거부할 수 밖에 없었어요. 3선 개헌도 반대했는데 그건 당연히 반대할 수 밖에 없었죠"
지독하게 가난했던 소년은, 가난 속에서 일찍 철이 들었다. 가난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혼자가 아닌, '함께' 벗어나고 싶었다.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다. "저 문재인,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양말행상, 달걀 보따리 장사하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살았습니다. 서민을 아는 사람, 국민의 눈물을 아는 사람,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 누구입니까!"
2. 정의의 문을 열다.
문재인은 재수 끝에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은 낭만의 전당이 아니었다. 점점 암울해 가는 시대. 신입생 문재인의 고민도 깊었다. "눈이 매우 강렬할 친구였어요. 사회가 갖고있는 문제점, 그것을 풀고싶지만 풀 수 없는 상태의 답답함, 그러나 앞으로는 꼭 풀것이라는 열망"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발표로 유신을 반대하는 대학마다 탱크가 들어서는 살풍경이 벌어졌고 계엄령이 선포됐다. "독재를 하다하다 뽑힐 자신이 없으니까 유신체제가 출범이 되고 거기에 반대하는 각계의 반대가 73년 내내 벌어지고 74년 정초에 '대통령긴급조치'라고 해서 유신헌법에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정하자고 주장만해도 징역 15년에 처하는 탄압이 있었습니다"
유신반대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1974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등 대규모 공안사건들이 조작됐다. 그 해 문재인은 구국선언문을 작성했다. "그 때 시위하는 것은, 3대가 집안이 망한다는 각오를 해야되요. 자기 출세를 포기하고 감옥을 간다는 각오를 했어야했는데, 법대생의 로망인 사시를 포기하면서 운동의 선두에 선겁니다" 문재인이 직접 작성한 < 구국 선언문 > 中
일신의 안일함을 도모함에는, 진정 침묵이 금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우리의 빛나는 눈동자는, 자유, 민주의 구원한 목표를 응시한다. 심장을 터뜨리고라도 부르짖어야 할, 지성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여기에 다 모여있는데, 당시 총학생회장이 연행되는 바람에 안타났어요. 우왕좌왕하고 흩어지려고 하니까 그 대오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재인이 여기를 뛰어오른거에요. 높이는 이거지만 자기 인생은 여기에서 바뀐거죠" 체포된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섰던 자리, 결단과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문재인은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학내시위를 주도하자 구속되었다. 유신반대 운동을 함께한 대학동기 분 "제가 감옥가서 1년 4개월의 징역을 살고 재인이 집에 갔는데, 고문 안당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저는 전기고문도 당하고 박종철처럼 물고문도 당하고 그랬는데.. 집에서 옷을 벗어보라고 하더니.. 만지고 주무르고 하더라고요.. 진짜 괜찮냐고...평생을 우리가.. 대학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45년간.. 늘 같은 길을 걸었던 거게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지만 또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체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징집이 된 것이다. 6주간 훈련 후 배치된곳이 특전사령부였다. 당시 특전사에서 함께 복무한 동기들이 모였다. "군생활 34개월을 같이 근무했어요. 차렷 자세를 하다보면 무릎이 붙어야되는데, 재인이는 오다리에요, 그래서 밤에 잘 때 도복끈으로 다리를 묶고자고 그랬어요. 끙끙끙 앓는 소리도 나고 그랬는데 다음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탁탁 털고 있어났죠" "과묵했었고 사람들한테는 따뜻했어요" 공중낙하, 수중침투, 고급인명구조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도, 폭파과정 최우수상, 화생방훈련 최우수상을 받았다. "일반 병사한테 우수상을 잘 안줍니다. 근데 문재인이 워낙 뛰어나다보니까 도저히 안줄 수가 없었죠" 군대가 그에게 준 선물은 용기와 자신감이다. "사격을 잘하는 사람들은 사격을 들어가서는 먼 산 먼 하늘을 쳐다보는게 잘 보이거든요. 그게 버릇이 되니까 이렇게 한 거에요"
양심에 따른 실천과 군에서의 경험은 나라사랑에 대한 마음을 굳게 만들었다.
"군대피하는 사람들이 종북입니다. 방산비리 사범들이 종북입니다.
국민을 편갈라서 분열시키는 가짜보수세력이 종북입니다.
특전사 출신인 저보고 종북이라는 사람들이 진짜 종북입니다."
전역했지만 복학의 길은 막혔고 취직은 쉽지 않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저희 아버님이 그때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잘 되는 모습을 보시지 못한채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셨죠" 49제를 마친 문재인은 해남 대흥사에 들어간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지고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듬해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그해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긴급조치가 해제되 복학한 문재인은 시위를 주도하다 또다시 구속된다. 그리고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는다.
3. 만남의 문을 열다.
첫 만남 후 7년동안 한결같은 사랑으로 문재인 곁을 지킨 사람이 있었다. 2년 후배 김정숙이었다. "시위를 주도하다가 최루탄을 얼굴 정면에 맞고 기절을 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제 얼굴을 닦아주고 있는거에요. 그게 제 아내입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재인은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했다. 누구보다도 아내에게 미안했다. "오랜 연애기간동안 결혼 후 지금까지 늘 기다리고 견뎌주고 도와주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이니까, 저로서는 미안하도 고맙고 그렇죠"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한 문재인은 대형로펌의 제안을 거절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한 사람을 만난다. 변호사 노무현!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이 사무소는 경남일대에 노동사건을 총괄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부산 경남의 노동 사건이나 시국 사건들은 거기로 다 왔어요. 퇴근하실 때도 늘 가방에 일거리를 가지고 갔어요. 토요일 일요일도 출근하는 건 예사였어요"
노무현과 문재인! 1987년 열린 범국민 추도대회, 부산에서 두 변호사가 연행됐는데 둘의 조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노무현은 투사이기때문에 진술거부.
"문재인변호사는 변호사답게 조목조목 다 반박하셨대요. 노무현 변호사는 길거리에 드러눕고 했는데 문재인변호사는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다.' 문재인변호사는 그런면에서는 진짜 신사였죠."
당시 부산 경남지역 '노동판례 모음집'을 보면, 변호사 문재인 이름이 끈임없이 등장한다. 문재인만큼 노동변론을 많이 한 변호사는 드물었다. 억울하고 답답한 처지를 호소하기 위해 숱한 노동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박신미(무료법률상담받은 분) "80-90년대 신발사업이 사양화되면서 회사가 문을 닫고 폐업할 때인데 그때 당시에 회사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하고 싸움이 일어나게 된거죠. 10여명 구속, 몇명은 기소된 상황에서 찾아간 곳이 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이었습니다. 얘기를 다 경청해주시고 변론도 해주셨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우리도 이제 변호사 빽이 있다.'고 너무 좋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전 부산양산 해고노동자 투쟁위원장 "노동자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도와주고 하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제가 더 놀랐던 것은, 개별노동자들만 걱정하고 챙기시더라고요. 전국적 사안이나 전체적 이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어요. 저 분은 사람이 소중했던 거에요"
인권변호사로 유명했지만, 승소율도 상당히 높았다. 동료 변호사들이 꼽는 성공의 비결 "법률가로서 뛰어나고 논리적인 것도 탁월했지만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죠. 굉장히 치밀하고 꼼꼼하고 끈기 있으시고 사건을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는 그런 분이시구요, 억울한 사건, 다른 사무실에서 '도저히 안된다' '할 수 없다'고 한 사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상당 부분 성공했고요"
문재인이 변호를 맡았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가 1989년 일어난 '부산 동의대 사건'이다. 도서관을 점거, 농성하는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이 투입되었다가, 여러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속피고인만 77명, 문재인은 공동변호인단을 꾸려 변호했다. 동의대 사건 해직교수 "문재인 변호사는 모든 재판에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문재인 변호사가 사용하는 용어는 법정의 용어가 아니에요. 다른 용어로 변론을 진행합니다. 그러면 재판부, 검찰, 방청객 다 감동하죠." "최종수비수같은 든든한 빽같은 그런 사람이죠"
"모든 국민의 인권이 보장받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힘 없고 빽 없는 사람도 원칙 지키고 상식 지키면, 잘 살 수 있는 그런 세상 만들겠습니다"
4. 꿈의 문을 열다.
2002년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문재인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하였다.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치밀하게 일했다. 조기숙 교수 인터뷰 "이 분이 정책에 대해서 굉장히 이해가 깊으세요. 그리고 별걸 다 기억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굳이 옛날 서류를 찾아볼 필요없이 무슨 정책이 나오면 '이거는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변해서 이렇게 결론을 냈잖아요' 그래요, 그래서 안심이 되는거죠. 이 분이 말씀하시면 아 기억이 정확할거야"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들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모든 사안에 대해서 토론과 의견을 요구하시는 건데, 아이디어와 생각이 많으신 노무현 대통령과 그리고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해야 일을 진행하는 문재인 비서실장 밑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정말 공부를 많이 했다고 봐야죠"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두 분의 공통점이에요. 뭐냐면 낯가림이 심해요. 그래서 친한 체를 잘 못하세요. 사실은 정치인은 악수 잘하고 잘 몰라도 아는체하고 이런게 표와 직결되잖아요. 그냥 그윽한 눈빛으로 소통하려고 그러지 입으로 고맙다고 그러고 그런 소리를 잘 안하시죠"
문재인은 철저한 자기관리 주변관리로 유명했다. 그래서 오해도 사고 미움도 받았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더 원칙을 지켰다. 경남 중고 동창 "일체 전화를 안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받고 말을 들으면은 (청탁을) 할 수 있으니까 동창이고 동기고 완전히 다 끊었대요"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 "그냥 원칙주의자세요. 약간의 '타협' 이런 얘기를 하면 핀잔을 받아요. '뭐 그렇게 얕은 수를 쓰려고 하냐, 그냥 정공법으로 갑시다' "
청와대에 들어온지 1년만에 이가 10개나 빠질만큼 격무에 시달렸던 문재인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히말라야로 떠난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 대한민국은 촛불로 물들었다. 귀국한 문재인은 법정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학을 맡았다. 김기춘은 대통령 탄핵소추 위원단이었다. 청와대로 돌아간 문재인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재임하며 한결같이 노무현 곁을 지켰다. 둘은 서로가 있어 숱한 고비를 넘겼다.
5. 부활의 문을 열다.
자연인으로 돌아간 노무현은 봉하마을에서 평화로운 인생2막을 꿈꾸었다. 문재인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치욕스러운 검찰수사를 지켜보며 문재인은 가슴이 타들어갔다. 하지만 결코 그 고통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통하고 억울하고, 검찰수사도 다 동행하셔서 검찰수사가 어땠는지를 다 아시는데, 그게 어떻게 원통하고 분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거를 그렇게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어떻게 저렇게 의연하고 담대하실 수 있나, 저는 그게 문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절제력과 의연함에 국민들은 감동했고 위로를 받았다. 김경수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제가 직접 문 후보께서 우시는 걸 본 건, 대통령 서거때도 못봤고요, 그랬는데 영화 '광해'를 관람하시고, 한동안 나오시지를 못하셨어요. 떠나가는 가짜 광해를 보고 절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인데, 거기서 터지셨더라고요. 우리는 대통령님을 그렇게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대통령님께 작별 인사도 못한거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터진 눈물, 그리움과 회한, 미안함이 뒤섞인 오열은 멈출 줄 몰랐다. 그는 아직 친구를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동아대 사거나 해직 교수 "장례를 치르고 8월에 만났어요. 첫마디가 "지금 참여전부 5년동안 뭘했는지 생각을 해보니 그냥 새하얗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좋은 머리로 새하얗대요, 아무 생각도 안난대요"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랬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 문재인의 '운명' 中
6. 정치의 문을 열다.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저에게 남기신 유언이셨어요. 민주당의 힘만으로는 정권교체가 어려우니 범야권이 대통합해야 이룰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문재인은 더이상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부산 사상구에서 민주당을 걸로 당선되 정치의 문을 열었다. 노영민 의원 "운명이라고 하잖아요. 그 운명이 친구 노무현의 죽음, 김대중 대통령의 잇따른 죽음,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 본인이 살아오면서 도망치지 않았던 역사에 대한 책임감, 그런거 아닌가 싶어요"
총선 승리 두달 만에 18대 대선출마 선언,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보다는 국민의 의지가 더 컸던 도전이었다. 김경수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그 때는 의무감이었던 거 같아요. 의무감과 책임감. 대선을 끝까지 치러내신 본인의 동력인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표현하셨거든요"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숱한 고비, 안철수와의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정숙 여사님 "그날 떨어지고 나서 저희는 울 수도 없었어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제가 아침에 첫마디 했습니다. "여보, 우리 눈 치우러 나가자, 그래서 이 눈을 치우면서 우리를 지지해주었던 분들 그 아픈 마음 함께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거두어줄 수 있다면 눈 치우는 마음으로 그렇게 조금은 도와주고 싶다'...그 때 처음으로 눈을 치우면서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뼈저린 후회가 밀려왔다. 준비가 부족했다는 깨달음, 당과 자신이 하나되지 못했다는 반성,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건, 정권교체를 열망하던 국민들이 받은 상처였다.
7.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함께하는 일 말고는 어떤 말도 어떤 위로로 함부로 건넬 수 없었다. "내 자신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에서 뭣하러 사냐고요 내가!" 문재인은 통곡하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아이들은 왜 구할 수 없었는지 아직도 답을 듣지 못한 유족들. 말보다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곡기를 끊은 유민 아빠를 살리기 위해 문재인은 단식일 시작하며 '세월호 특별접 제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비극은 끊이지 않았다. 백남기 농민이 시위 중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귀한 목숨을 더이상 잃지 않아야 했다. 국가가 응당 감사해야할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분 "우리 같은 사람들 신경쓰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고 국사 일을 더 돌보세요" 문재인 "이보다 더 중요한 국사는 없습니다"
"아픔이 치유되어간 3년이 아니라, 아픔이 갈수록 커져간 3년이었습니다. 촛불도, 새로운 대한민국의 다짐도 세월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세월호의 아이들이 촛불광장을 밝혀준 별빛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민주당 당대표 출마선언. 시대를 바꾸고 정치를 바꾸기 위해 다시 대선 도전을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부터 개혁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온갖 우려 속에서도 당대표 출마를 결심했다. 조기숙 교수 "당 대표가 되면 상처만 남지, 성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에요 언론환경을 보면. 그런데도 이 분이 끝내 하신 이유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던거 같아요. 안심번호로 공천을 한거, 그게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제1당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이었다고 봅니다"
"내가 진흙탕에 뒹굴어서 나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상처받을 수도 있고 욕을 들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거는, 대선에 이길려고 보니까 당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이게 당시 후보님의 말씀이셨어요"
2016년말 사상초유의 국정농단 사건이 밝혀졌다. 광장은 촛불로 뜨겁게 타올랐다.반 년간이나 지속된 촛불시위,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촛불 속에 늘 문재인이 있었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그는 국민과 함께하고자 했다. "이게 나라야, 외쳤을 때 정치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정치가 못한 일을 촛불이 했습니다. 그것은 구시대의 대청소와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설입니다. 이제 정치가 길을 제시할 때입니다"
역사적인 헌법재판소 판결. 탄핵은 대다수 국민의 요구였다. 그리고 치열한 경선을 통해 문재인은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분열의 시대와 단호히 결별하고 정의로운 통합의 시대로 나가겠습니다"
"권력의지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문 후보는 '선한 권력의지'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권력의지 자체가 선해야 한다. 어떻게 쓰임이 있는 권력의지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이 흔들리지 않는 분, 그리고 그 원칙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을 뚜벅뚜벅 헤쳐나가시는, 그래서 정치를 기존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계산하지 않고, 본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기로 정치를 만드신거 같아요"
문재인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압도적인 정권교체 확신한 비법이 있습니다" 그는 시민들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시민들은 기꺼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2017년 5월 9일 대한민국은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을 선택했다.
저항이 클 수 있기에, 앞으로 그가 걸어갈 길은, 걸어온 길보다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타협하지 않는다는 약속,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 뜨거운 여정이 지금 막, 시작됐다.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보면,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길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의로웠고 누구보다 용감했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던 문재인의 길.
이제 그 문재인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문을 열었습니다. 깨어있는 시민들은 함께 그 문을 통과하며, 함께 세상을 바꾸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