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그거를 어디에 뒀드라? 아니, 방금 찾던 물건이 뭐였지? 내가 뭘 찾으려고 이 가방을 뒤지고 있었누?”
벤치에서 가방을 뒤적거리는 사람은 마치 고목처럼 주름지고 깡마른 할머니였다. 피부가 검고 주름이 깊은 특유의 외모 덕분에 뇌리에 깊이 남아서인지 요즘 들어 공원에 부쩍 자주 오시던 분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새색시처럼 고운 한복을 차려 입으신 게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신 걸까?
“분명 1분 전까지 찾으려고 생각하던 물건인데. 이상하네. 언제나 이랬어. 1분, 아니 10초 전에 필요해서 찾으려던 물건이 어느새 귀신에 홀린 듯 사라져버려. 늙으니까 건망증이 아주...”
평소엔 엄마 손을 잡고 산책 나온 아이들과 무리지어 있는 비둘기 떼를 하염없이 바라보길 즐기던 분이셨다. 오늘은 뭔가를 잃어버리셨는지 물건을 찾느라 분주하다.
난 가방 속을 뒤지던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한 번, 두 번 불렀지만 본 척도 하지 않으셔서 목소리를 높였더니 버럭 역정을 내셨다.
“뭬야! 나 귀 안 멕었어.”
“순찰 중인 경찰인데, 어르신 도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경찰? 경찰이 물건도 찾아줘야?”
“뭔가 잃어버리셨군요. 잃어버린 물건이 뭔지 전혀 기억이 안 나세요?”
“물건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내가 무슨 물건을 찾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그랴.”
옷도 잘 챙겨 입으셨고, 발음도 연세에 비해 정확하신 것 같다. 평소의 언행을 생각해봐도 정신이 이상한 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일까?
“일단 물건 이름을 흘려듣기라도 하면 기억이 날 텐데... 이거 참 미안하우.”
“음, 지팡이는 있으시고, 틀니도 있으시고, 혹시 안경이 아닌가요?”
“난 원래 안경 안 껴.”
"지갑인가요?"
"아이구, 난 그런 거 안 써. 이제 지갑에 넣고 다닐 돈도 없어서 기냥 호주머니에 넣고 댕겨."
“그럼 뭘까요?”
“모르니까 찾는 거제. 내가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지, 내가 왜 공원에서 가방을 뒤지고 있는지 기억이 안나. 기억이.”
아, 오늘 옷을 잘 차려입고 계신 걸로 보아서 누군가를 만나러 나오셨을 수도 있겠다. 요즘은 나이 드신 분들도 심심찮게 로맨스를 즐기는 풍조가 유행한다고 들었다.
“아, 다 늙어서 누굴 만난다고 그랴? 정신 사나워지니까 저리 가슈. 총각.”
할머니가 별로 도움을 탐탁찮아 하시기에 나는 일단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
순찰 겸 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미끄럼틀 위에서 담배를 피우던 고등학생 몇 명이 날 빼꼼히 내려 보더니 반대쪽으로 침을 뱉었다. 요즘 미성년자들은 경찰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딱히 제재를 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내가 공원을 한 바퀴 걸어 돌아왔을 때도 할머니는 가방과 벤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할머니. 전 순찰 때문에 먼저 갑니다. 조심하세요. 요즘 공원에 무서운 애들 많이 돌아다녀요.”
“무서운 애들?”
“네, 얼마 전에 노숙자 하나가 고등학생들한테 구타당해서 죽어있던 걸 발견했거든요."
"쥑여야? 쥑였다고?"
"네, 머리도 새파란 것들이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요. 거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고등학생 녀석들이 살인도 모자라서 어디서 농약을 구해서 자살로 위장을 하려고 했나 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속임수를...”
난 말 끝을 흐리고 불량 학생들이 모여 있던 쪽을 돌아보고 혀를 찼다. 끔찍한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개처럼 때려서 죽이다니. 설마 저 아이들 중에 그렇게 나쁜 아이들은 없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던 중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쓰러진 노파의 눈과 코와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에 걸쳐있던 검정색 병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화려할 정도로 섬뜩한 죽음의 색깔이 단색의 한복을 마치 색동옷처럼 물들여 가고 있었다.
방금 내가 무심결에 꺼낸 단어에서 노파는 자신이 공원에 온 이유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노파는 자기가 찾고 있던 물건을 떠올림과 동시에 자신이 해야만 했을 일을 한 것이었다.
난 구급차를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의 구멍들에서 피를 역류해내며 죽어가는 빨간 노파의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