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때부터 나는 선거가 다가오면 항상 힘들었다. 잠을 들지 못하고, 때때로 날을 지새웠다. 그리고 자주 아팠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기에 여러 번의 선거에서 질 때마다 나는 좌절했고 무력감에 시달렸다. 친구들은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하소연하는 나에게 너무 유난을 떤다고 했다. 그때는 모두들 노력하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시기였다. '노력하면 된다'는 자기계발서가 무수히 팔리고 모두들 '간절하면 된다'는 '시크릿'을 믿었다. 20대의 투표율은 삼십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친구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를 탓하기보다 스스로를 닥달하여 무엇인가 이루고 싶어하는 자존심 때문일 것이었다. 진흙탕처럼 느껴지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꺼려지는 결벽증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게 9년이 지났다. 자존심과 결벽증이 만들어낸 정치적 무관심의 결과는 처참했다. 정치적으로 우리세대는 소외되었고 정책적으로 제대로된 직업이나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 세대는 끊임 없는 '노오력'을 해야 되는 세대가 되었다. 지난 9년 간, 20대에게 삶의 목표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이 당연한 소양이 되었다. 그 삶이 얼마나 비루했었던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노오력하여 하루를 벌어 겨우 하루를 사는 기분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는 말할 수 있다. 대출금을 갚느라 사소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아르바이트와 직장에 쫓기듯 살며 침대에 몸을 던져 잠들었다가 다시 아침이 되면 미래를 준비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우울했는지는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다. 9년을 그렇게 살았다.
요즘 들어 20대의 친구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고맙다. 그리고 반갑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견제를 받는 20대의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까지 하다. 내가 20대일 때만 하더라도 20대는 항상 찬밥이었다. 아무도 20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언론에서 20대의 표심을 이제는 다들 신경쓰고 있다. 20대가 지난 총선의 결과를 뒤집었기 때문일 것이다. 50퍼센트에 가까운 투표율만으로 결과를 뒤집어 버렸다. 대선후보들도 20대를 의식하여 공략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쩐다. 정말이다. 그리고 부럽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50대 60대 아저씨들이, 이제 막 사회에 발 딛으려 하는 당신들 눈치를 보고 있다.. 직장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 당신들의 영향력을 깎아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내가 포함된 세대에게 결벽증과 자존심을 자극하여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당신들에게 정치인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선거결과(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처럼 보여주고 투표에 대한 관심을 낮추고 있다.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동정심을 자극하여 선거결과를 왜곡하려고 한다.
나는 당신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 선거를 확실히 이겨야 한다. 삶은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하고 실패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젊은이들에게 보장되어야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이 선거를 이겨야 하는 이유는, 실패 이후의 5년 동안에 당신이 나처럼 오랜 시간 절망하고 고립감을 느끼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때의 나처럼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그 실망의 범주 안에 나 또한 포함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너무나 두렵다.
궁극적으로 당신이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봐 그것이 너무나 두렵다.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새롭게 만나게 된 20대의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겨야 한다. 그러니 당신이 흔들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뉴스를 돌아보며 보수가 결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젊은이의 표가 나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조바심에 쓴다. 당신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믿지 못하는 모순적인 내 마음과 내 말에 부끄럽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