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이렇게 살았습니다
-방송 (라디오) : 5.3(수) BBS 8:00~8:20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불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기호 1번 문재인입니다.
오늘은 음력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아침에 불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게 되어 정말 큰 인연이고 영광입니다.
저는 불교와 인연이 깊습니다.
군 제대 이후 해남 대흥사에서 풍경소리와 불경소리를 들으며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대흥사의 두륜산 정상에서 땅 끝 마을과 다도해를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에 놀라게 됩니다.
국토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대흥사에서 저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작설차와 다도를 배웠고 제 인생의 가르침인 ‘신해행증’을 배웠습니다.
불교에서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신해행증’이야말로 대통령이 될 사람이 갖춰야할 마음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불자여러분께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듯이 대통령은 국민을 믿고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며 국민의 행복을 실천하고 국민의 행복을 완성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부처님처럼 저 문재인, 부족하지만 힘들고 상처받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세월호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보며 얼마나 슬프고 분노하셨습니까?
대통령 뽑을 때 제대로만 검증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입니다.
국민들은 그런 아픈 경험을 겪으면서 지금 대선후보들을 검증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봐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꿈을 갖고 살아왔는지 국민여러분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머니>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저희 부모님도 빈손으로 피난 와, 참 힘들게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거제에서 부산까지 그 먼 길을 저를 등에 업고, 달걀을 머리게 이고 팔러 다니셨습니다.
아버지가 장사에 실패한 후엔 어머니가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시장에서 좌판 장사를 하기도 하고, 연탄 리어카를 끌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는 부산역 암표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을 듣고, 꼭두새벽에 어린 저를 깨워 앞장세웠습니다.
그런데 암표 장사하는 분들을 오랫동안 지켜보시고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부산역까지 꽤 먼 길을 둘이서 걸어갔다가 터덜터덜 돌아오던 그 날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나중에 왜 그랬냐고 여쭤보니, 어머니는 그냥 “못 하겠더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차마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가난 속에서 일찍 철들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치관도 가난 속에서 생겼습니다.
제가 공인이 되었을 때, 저 스스로에게 엄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청와대에서 일할 때는 학교 동창회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 변호사도 하지 않았고, 사외이사나 법무법인의 고문 같은 것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두고, 너무 고지식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원칙을 지켜도 손해 보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상식대로 하면 성공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국민 누구나 정의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피부로 느끼는 세상, 꼭 만들겠습니다.
<인권 변호사>
저는 유신반대시위 때문에 대학에서 제적되고, 구속되고, 강제징집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때문에 판사 임용이 안 되고 바로 변호사를 하게 됐지만,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주력산업이던 신발업체의 여성노동자들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회사가 점심시간을 주지 않아 점심을 거르기 일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재봉틀 밑으로 쥐가 다니고, 화장실에 칸막이도 없다고 했습니다.
야근을 해도 수당을 주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회사에 시정을 요구했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회사에서 잘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 법정에 섰습니다.
“판사님! 손톱에 바늘이 꽂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재봉틀을 돌려야 합니다. 노동자에게도 인권이 있고, 근로기준법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노동자들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 후 저는 울산, 창원, 거제, 포항, 멀리 구미까지 많은 노동자들을 도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저만큼 많은 노동변론을 한 변호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되돌아보니, 고마워해야할 사람은 오히려 저였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저는 인권변호사, 노동변호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서 ‘세상을 바꾸는 용기’,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인권변호사를 할 때 크게 깨친 것이 있습니다.
저를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딱하지만 제가 해결해줄 수 없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처음엔 저도 “제가 도와드릴 길이 없습니다”라고 냉정하게 말을 잘랐습니다.
그러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면서 말을 더 듣게 됐는데, 많은 분들이 설령 제가 해결해주지 못하더라도 사연을 끝까지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후련해하고, 고마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 어디를 가도 속 시원하게 말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억울함을 들어주고 맞장구쳐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말 잘하는 정치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경청하는 정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청이야말로 최고의 소통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국민을 위로하는 정치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저 문재인, 국민과 눈을 맞추며 경청하겠습니다.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 되겠습니다.
<국정 경험 5년>
국민 여러분!
경험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고 합니다.
저는 참여정부 5년 동안 국정운영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민정수석을 두 차례 하고,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까지 하면서, 안보, 국방, 외교, 복지, 문화, 행정 등 국정 운영 전반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200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을 일주일 앞두고, 대구에서 지하철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192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였습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전이었지만, 민정수석 내정자였던 저는, 대구로 달려갔습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대구시와 협의하면서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여러 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사고를 수습했습니다.
그 사건을 거울삼아 참여정부는 안전을 안보에 포함시키는 포괄안보 개념을 세우고 역대정부 최초로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지하철의 좌석 등 내장재를 전부 불에 타지 않는 불연재로 교체하고, 재난관리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얼마 후, 그때 만났던 유가족 가운데 한 분이 연락도 없이 제 집에 불쑥 찾아오셨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제가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국민에게 국가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도 제게는 큰 보람입니다.
저는 준비위원장으로서, 북한을 상대하며 회담의 실무를 이끌었습니다.
회담이 좌초될 위기도 있었지만 차분히 준비했고 북핵 폐기를 포함하여 분단 사상 최고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실전 경험이었습니다.
밖에서 비판만 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저 문재인은 준비된 후보입니다.
국정 운영 전반을 경험했고, 국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매달려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저 문재인, 든든한 후보입니다.
다양한 의제와 국가적 어려움을 해결해 오면서,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위기대처능력을 갖췄습니다.
<운명에서 소명으로>
많은 분들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렇게 정치 안 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등 떠밀려서 정치하게 된 것 아니냐? 그러니 권력의지가 약한 것 아니냐?”
사실, 옛날의 저는 정치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저는 정치 안 할 거라고, 거듭 다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정치보다 더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드디어 청와대에서 나오게 됐을 때 저는 히말라야로 떠났습니다.
자유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 사태로 돌아왔습니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를 마쳤을 때 저도 자유의 몸이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김대중 두 분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가 제 운명을 바꿨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저는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당과 제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뼈아프게 반성하고, 성찰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참담한 실패를 보면서, 책임을 더욱 통감했습니다.
세월호와 국정 농단 사태로 국민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더더욱 송구합니다.
그래서, 절박해졌습니다.
더 단단히 준비했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의 공과 과를 돌아봤습니다.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했습니다.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경제와 안보에서도 유능했습니다.
남북평화시대를 만들었고, 성평등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과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삶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깊은 책임을 느낍니다.
저 문재인, 민주정부 10년의 공은 공대로 계승하겠습니다.
부족했고 실패한 부분은 반면교사로 삼겠습니다.
지난 4년, 정치 경험도 풍부해졌습니다.
당 대표가 되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당을 혁신해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당은 총선에서 승리했고,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했습니다.
국민에게 가장 지지 받는 명실상부한 수권 정당이 됐습니다.
지금 저는 절박합니다.
정치가 제게 운명처럼 다가왔다면, 이제 2017년의 저 문재인은, ‘국민의 삶을 바꾸는 것’을, 역사적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의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로 바꾸겠습니다.
5060 세대가 불안해하지 않고, 인생 제2막을 시작할 수 있는 나라,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정권교체 해서, 나라다운 나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겠습니다.
저 문재인,
깨끗해서 자랑스런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공정해서 믿음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따뜻해서 친구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끝으로 국민여러분,
4일부터 5일까지 치러지는 사전투표에 적극 참여해 주십시오.
참여하는 국민만이 자신의 삶을 바꾸고 아들딸들의 미래도 바꿀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