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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91757
    작성자 : 환상괴담
    추천 : 15
    조회수 : 2629
    IP : 121.177.***.178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16/12/10 13:59:00
    http://todayhumor.com/?panic_91757 모바일
    [환상괴담 3.0] 어느 날 둘리가 왔다
      [불합격입니다, 애초에 안 될 걸 잔뜩 기대하고 계셨다면 조금 죄송합니다.
    귀하는 인재가 아니니까 불합격이나, 굳이 위로해드리자면 우리와 맞지 않는 인재라 그렇다고 해드리죠.]
     
    " 아악! "
     
    길동은 고개를 휘휘 저은 뒤 화면을 다시 쳐다본다.
     
    [ 불합격입니다. 귀하의 인재성은 우수하나 저희 기업의 인재상과는 상이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어
    부득이 불합격 통보를 드리게 된 점 아쉽고도 죄송합니다. 그러나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귀하의 앞날에 건승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겠습니다. 소정의 사례비를 동봉하였으니 심심한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
     
    " 지랄하네! 옘병! "
     
    참을 수 없단 듯이 괜히 책상을 내려치지만 아픈 건 자기 주먹뿐이다.
     
    " ... "
     
    전화를 들어 항의 전화라도 할 듯 노려보지만,
     
    " 하아... "
     
    결국 탓할 건 자기 자신뿐이다.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야.
    점수가 모자라서?
    그럼,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거야.
    난 천재 아니잖아, 따라가느라 나 죽을 것 같아,
    공부하다 죽은 놈 없고 노력하다 죽은 놈 없다지만ㅡ,
    다들 '죽을 것 같은데', 같은데ㅡ... 같다는데ㅡ...
     
    길동은 이번 기업 채용에서 불합격할 경우 아무 일자리라도 구해서 반년 정도 돈을 벌겠노라 생각해둔 터였다.
    하지만 잔뜩 기대한 이번 결과마저 물거품이 되버리자 앞선 다짐은 이미 걸레짝 마냥 너덜거리고 있었다.
     
    " 몰라, 다 집어치우자, 어?! 뭘 더 어떻게 할까? "
     
    탈락할 때마다 '눈을 낮추라'는 배려 없는 조언이 갈수록 아파왔기에 그야말로 줄만 서면 들어갈 수 있는 일자리에 마저
    써놓은 이력서들을 마구 구긴 뒤 바닥에 던져버렸다.
     
    " 몇 번째냐고... "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지만,
    차라리 하루 이틀 울고 위로 받고 나면 웃을 수 있었던 이전의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우울감이었다.
    길동은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그의 자존감은 이미 땅으로, 땅 속으로 꺼져들어가 멀고 먼 바닥의 아래, 또 그 아래에 흘러있었다.
     
    딩ㅡ동.
     
    귀에 들리지만 반응하지 못 한다.
     
    딩ㅡ동. 딩ㅡ동.
     
    " ...? "
     
    이번에는 초인종 소리를 알아챘는지 힘겹게 일어난 길동이 문 앞으로 다가간다.
     
    " 누구세요. "
     
    - 길동아, 나야, 나!
     
    " 누구신데요...? "
     
    문을 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지 길동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 짜잔! 보고 싶었어, 길동아! "
     
    " 으아악! "
     
    발 끝에서 들려온 소리에 길동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자 눈에 들어온 건 초록색 덩어리였다.
    미끈매끈거리는 피부, 통통하고 길다란 꼬리, 당췌 들어본 적도 없는 생물ㅡ..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 나 둘리야! "
     
    " 씨, 씨팔. "
     
    그랬다. 둘리다.
    듣고보니 둘리였다.
     
    " 길동아, 너 생각보다 좋은 집에 사는구나ㅡ? "
     
    " 뭐.. 뭐야, 저게...? "
     
    길동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집 안으로 불쑥 들어가버리는 둘리.
    신난 듯 꼬리를 흔들대며 어느새 집을 둘러보고 있다.
     
    그러나 태연한 둘리와 달리 길동의 심장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 게다가 방문객이 둘리라니.
     
    " 야. "
     
    조심스레 길동이 외쳐보자 둘리가 혀를 빼꼼 내민 채 길동을 쳐다보며,
     
    " 왜? 나 목 마른데 마실 거 없어? "
     
    " ... "
     
    탈락 메시지를 볼 때처럼 순간적인 착각인가 싶었더니 뻔뻔히 마실 것까지 달라는 둘리.
    그제서야 길동은 정신이 아찔해지며 어린 시절 매일 밤마다 빌었던 소원이 떠올랐다.
     
    ' 내가 어른이 되면 둘리 같은 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 '
    '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매일 매일 놀러 다니며 지구를 모험하고 싶어요 '
    ' 저는요, 이름은 고길동이지만 둘리를 괴롭히지 않고 저희 집에서 같이 재밌게 살 거에요 '
    '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신님, 꼭 저에게 둘리를 보내주세요. '
     
    기적이라는 걸까,
    취업 하나도 지독하게 도와주지 않는 하늘이, 내 어릴 적 소원을 들어준 게 저 초록 괴물이란 말인가,
    징그럽다. 만화가 아니라 실사로 만난 둘리는 너무나도 징그럽다. 초록색 피부와 커다란 덩치,
    묘하게 사람을 닮은 생김새가 녀석을 더욱 이질적으로 보이게 한다.
     
    " 길동아, 마실 거 빨리 줘! "
     
    '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
     
    쟁반 위에 쥬스 한 잔을 담아 가져오던 길동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 오우, 땡큐 베리마취. 길~똥. "
     
    편하게 누운 자세로 쥬스를 받아든 둘리가 곧장 쥬스를 핥아대고,
    길동은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유기견 신고센터를 검색한 뒤 전화를 건다.
     
    " 유기견 신고를 하려는데요. 여기 봉계동 테크로마트 앞 주택가요. "
    ...
    " 아니에요. 제 개 아니에요. 근데 개가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꼬리가 좀 커요. "
    ...
    " 예? 아, 아뇨. 개 맞아요. 개 맞는 거 같아요. 견종은 모르겠어요. 좀 데려가주세요. 불쌍해서 그래요. "
    ...
    " 무슨 119에요, 물지는 않아요, 개가 크긴 큰데 성격은 순한 거 같아요, 저기요, 좀 데려가세요! 제발! "
    ...
    " 네, 감사합니다. 빨리 와주세요. "
     
    ' 누가 봐도 개는 아니지만 동물보호 센터에서 어떻게든 해주겠지.
    원래 내 식구도 아니고, 저런 걸 데리고 살 수는 없어.
    난 나 한입 먹여살리기도 벅차다고ㅡ.. 모은 돈도 다 떨어져가고.
    부모님께는 뭐라고 설명할건데? 결혼도 못 간 자식 걱정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주무셔. '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극복할 수 있었다.
    둘리를 쫓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리의 존재로 인해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
    둘리의 룸메이트? 만화 속에서 걸어나온 둘리와 함께 토크쇼도 나가고, 영화도 찍고,
    초능력으로 우주 여행도 하면서 살면 되는 걸까? 어릴 적의 꿈처럼?
    저기요, 신 나으리. 아니지, 신 씨발나으리.
    사람 소원 들어주려면 그간 떨어진 면접 중에 하나만 붙여줬어도,
    나, 차도 사고, 장가도 가고, 집도 사고 그냥 당신에게 원망없이 살아갔을거야.
    아니지, 감사하면서 살겠지, 매일 하늘을 향해 백 번 절도 할게.
    근데 이게 뭐야.
    둘리? 하하하..
    일억년전 옛날이 너무나 그립다는 저 놈 소원이나 먼저 들어줘서 지 애미나 만나게 해주지,
    왜 나한테ㅡ..
    왜 하필 나한테!
     
    화장실 안에서 생각 정리를 마친 길동이 마침내 거실로 나오자,
    둘리는 허락도 없이 냉장고를 열어놓은 채 빵을 꺼내어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 음냐음냐, 쥬스를, 마시니까, 쩝, 배도, 고파서! "
     
    ... 어느새 둘리의 뒤에는 이불을 꺼내온 길동이 서있었다.
    곧장 둘리를 이불로 덮은 길동이 둘리를 꽁꽁 싸매려 했지만,
     
    " 길동아! 뭐하는 거야! "
     
    둘리의 완력이 생각보다 엄청 났기에 길동은 속수무책으로 나뒹굴 뿐이었다.
     
    " 으아악! "
     
    땅바닥에 내려꽂힌 길동이 아픔을 속으로 참아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제압해서 동물보호센터에 보내지 않으면 언제 이 녀석을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른다.
     
    " 길동아! 왜 이러냐구! "
     
    길동과의 계속된 힘씨름 끝에 발톱을 꺼내든 둘리가 길동의 얼굴을 할퀴어버렸다.
     
    " 갸아악. "
     
    길동은 얼굴을 감싸쥐며 뒷걸음질 쳤다.
     
    " 괘, 괜찮아? 미안해, 마법으로 낫게 해줄 수 있으니까... "
     
    둘리가 조심히 다가서자 다시 길동이 둘리를 넘어뜨렸다.
    이번에는 길동에게 한참이나 유리한 자세였다.
     
    " 케엑...! "
     
    길동의 두 손이 둘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있는 힘껏, 더 세게, 
    그럴수록 둘리의 저항도 같이 거세졌다.
    휘두르는 꼬리가 길동의 등을 몇 번이고 망치질해댔다.
     
    ' 제발 기절해라, 제발! '
     
    빠드득ㅡ.
     
    " ... "
     
    둘리의 목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길동이 떨리는 손을 놓자 힘없이 둘리의 혓바닥이 늘어졌다.
     
    " 으... 으아... "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모든 게 잘못되어간다.
    길동은 급히 휴대전화를 든다.
     
    " 전화.. 받아.. 빨리 받아.. 앗, 네. 아까 그, 유기견 때문에 전화했던, 네, 맞아요 네! "
    ...
    " 아뇨, 안 오셔도 됩니다, 개 사라졌어요. 안 오셔도 됩니다. "
    ...
    " 거의 다 오고 말고 간에, 개가 없어요, 처음부터 개는 없었어요! 장난전화였다고! "
    ...
    " 장난전화였다고, 메롱, 메롱. 약오르지 까꿍. 이해 안 돼요? 장난이라고! 장난! 개 없다고! "
    ...
    " 둘리야. 둘리! 둘리라고! 거짓말 같냐? 내가 미친 것 같아? 그래,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
     
    " 허으으... "
     
    휴대전화를 집어던진 뒤 길동은 방 언저리에 주저앉았다.
    어릴 적 소원이 이뤄진 어느 행복한 날의 오후에.
     
    ...
    ......
     
      어느새 밤이 깊었다.
    그러나 길동의 방 안에는 조명 하나 켜져있지 않다.
    건너편 으리으리한 빌딩에서 번져온 인공적인 빛만이 길동의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그 덕분에 실루엣 두 개가 간신히 분간이 된다.
    조각상처럼 멈춰있는 두 그림자.
     
    길동의 생기 없는 눈동자는 차갑게 식은 둘리의 입가에 맺혀있는 핏방울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 기력도 남지 않은 길동이 무심히 노래 부른다.
    귀 기울여도 듣기 힘들 작은 목소리로...
     
    쏙쏙쏙 방울 빙글빙글 방울 여기저기 내방울 내방울
    쏙쏙쏙 방울 빙글빙글 방울 여기저기 무지개
    파란하늘 많고 빨간하늘 많고 둥글둥글 내방울 내방울
    파란하늘 많고 빨간하늘 많고 둥글둥글 무지개
    이리저리 구름따라 마음대로 두리둥실 두리둥실 춤추며
    아름다운 꽃잔치에 바람타고 두리둥실 두리둥실 춤추며 와
    산너무 먼나라까지 바다건너 먼나라까지 이리저리 춤을춘다...
     
    길동은 담배를 입에 물려다 '퉷'하고 뱉어낸다.
    발 밑에 굴러다니던 이력서에 시선이 잠시 머무르더니,
    라이터가 엉뚱한 곳에 불을 붙인다.
    불이 옮겨붙는다.
     
    ...
     
      " 하아! 상황 종료입니다. 불씨 하나 없어요. 다행히 유류나 전기 화재가 아니었네요. "
     
    소방관 김 씨는 같이 출동한 동료 장 씨 옆에 다가와 앉았다.
    주택가에서 발생한 방화, 그로 인한 화재 진압 작전에 투입된 그들이었다.
     
    " ... 피해자는 아마 집주인인 것 같고, 또 하나는 뭐야? 개는 아니던데. "
     
    " 글쎄요. 감식반도 당황하던데... 뭘까요. "
     
    " 아무튼 불이 빨리 꺼졌으니 다행이지 뭐. "
     
    " 형님, 저기 재 날리는 것 좀 보세요. 어디까지 가는 걸까요? "
     
    " 그러네. 불도 없고 바람도 없는데 희한하네. 저러다 달까지 가겠다. "
     
    " 멀리도 가네요. 에휴, 저게 별똥별이면 소원이라도 빌어볼텐데. 오늘 같이 사람 죽은 날엔... 그럴 맘도 안 들겠어요. "
     
    왠지 모르게 반짝이는 재가 그 끝을 가늠할 수도 없이 멀리,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은하수가 그러하듯이. 
    환상괴담의 꼬릿말입니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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