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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91667
    작성자 : 복날은간다
    추천 : 72
    조회수 : 16176
    IP : 123.254.***.182
    댓글 : 47개
    등록시간 : 2016/12/02 07:26:52
    http://todayhumor.com/?panic_91667 모바일
    [단편] 알려주는 크레파스
    옵션
    • 창작글
    33살 모태솔로 홍혜화. 그녀는 이번 소개팅에 사활을 걸었다.

    그동안 그녀가 왜 소개팅에 실패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여중, 여고, 여대, 직장까지 여자뿐인 직장을 다니며 남자 경험이 모자랐던 그녀는, 소개팅만 나가면 쫄보가 되곤 했다.
    이번만은 달라야 했다! 이번 소개팅마저 실패하면 그녀의 인생에 더 이상 남자는 없을 것이라 각오했다.
    다행히 소개팅남과의 카톡 대화도 좋았고, 사진도 교환하여 서로 호감을 확인했다. 이미 그녀는 소개팅남과의 노후계획까지 짜놓은 상황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지금 홍혜화가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 내 남자의 두 얼굴! 데이트 폭력! ]

    " 으으...! "

    남자를 모르는 홍혜화는 사실, 남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 같은 게 있었다. 물론 반대로, 남자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주말이면 만나게 될 소개팅남, '김남우'는 말이다.

    홍혜화는 김남우의 사진과 카톡 대화들을 보면서 김남우를 궁금해했다.  
    턱선이 살아있는 얼굴형은 남자다운 인상이었고, 일자로 다문 입술과 깊은 눈매는 진중한 느낌을 주었다. 카톡 대화도 단답형이 많아, 어딘가 좀 과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람은 알 수 없으니까.

    " 그래, 괜찮은 사람일 거야. 이모가 아무나 소개해줬겠어? "

    홍혜화는 애써 고개를 끄덕거리며 끔찍한 TV 채널을 돌려버렸다. 한데,

    " 으이? "

    [ 평범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사실은 살인범? 두 얼굴의 남편! ]

    " 이건 또 뭐야아~ "

    울상이 된 홍혜화는 TV를 꺼 버리고 외투를 챙겨 입었다. 단 게 땡겼다. 바람도 쐴 겸, 동네 편의점이나 갔다 오기로 했다.
    홍혜화는 길을 걸으면서도 온통 소개팅 생각에 빠져 땅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쑥! 전단지를 든 손이 튀어나왔다!

    " 엇! "

    깔끔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살짝 놀란 홍혜화는 얼떨결에 전단지를 받아 들었다. 전단지에는 귀여운 악마 캐릭터와 함께 문구가 적혀있었다.

    [ 상대방에 대한 16가지 이야기! 제대로 알려드립니다! ]

    홍혜화는 '이게 도대체 뭐야?' 라는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 우리 고객님, 궁금한 사람이 있으시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걱정되시죠? 알고 싶으시죠? 그 궁금증을 채워드립니다! 만족도 높은 서비스! "

    마치 홈쇼핑 판매자처럼 주절대는 사내의 모습에 홍혜화는 경계했다. 꺼리듯이, 옆으로 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 됐어요! "
    " 언제라도 찾아주세요~ "

    사내의 목소리를 등 뒤로 하고, 홍혜화는 별걸 다 본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며 전단지를 보다가,

    " 어? 편의점 2층이잖아? "

    약도의 위치가 편의점 2층을 나타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데야?'라는 생각에 간판이라도 볼 생각으로 편의점 앞에 도착한 홍혜화.

    " 으잉? "

    2층엔 간판 대신, 추억의 '16색 크레파스'가 그려져 있었다. 

    " 와~ 저거 국민학교 때 진짜 갖고 싶었던 건데! "

    옛 추억이 떠오른 홍혜화는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얀색 철문에 노크하자,

    [ 열려있습니다~ 들어오시죠~ ]

    어딘가 목소리가 낯익다 생각하며 들어선 홍혜화.

    " 엇?! "

    아까 길에서 만난 양복 차림의 그 사내가 책상을 두고 앉아 있었다! 
    사내는 부드러운 미소로 환영하며 자리를 권했다.

    " 어서 오세요~! 이리로, "

    홍혜화는 어떻게? 나보다 먼저 여기에? 왜? 찜찜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며 사내 앞에 앉았다.
    사내는 책상 위에 양팔을 괸 채로 눈웃음을 지었다.

    " 그래, 궁금하신 분이 계신 거죠? "

    홍혜화는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혹시 뭐 흥신소 같은 곳이에요? "

    사내는 싱긋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그것'을 꺼냈다.

    " 앗! "

    낡은 16색 크레파스. 홍혜화가 국민학교 시절에 봤던 그 옛날 그대로의 크레파스였다!
    사내는 크레파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 한 가지 색깔당 하나의 정보를 알려줄 겁니다. "
    " 엑? "

    홍혜화는 그게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사내는 대답 없이 옛날 스케치북을 꺼내서 홍혜화의 앞에 펼쳐놓았다. 

    " 처음 한 번은 공짜로 해 드리죠. 그분을 생각하면서, 원하시는 색깔을 집어보세요. "

    홍혜화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지만, 사내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약간 찜찜했지만, 손을 뻗어 분홍색 크레파스를 집어 드는 홍혜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 어? 어어어어? "

    크레파스를 든 홍혜화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스케치북 위에 글씨를 써 내려 갔다!

    [ 김남우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동네 여탕을 훔쳐보려다 걸려서 벌을 받은 적이 있다. ]

    " ! "

    홍혜화는 이 신비한 현상에 경악해 입을 벌린 채 사내를 보았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뭐예요 이게?? "
    " 음~ 그냥 간단하게 마법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떠실지? 혹은, 초능력? 외계인의 기술? 악마와의 거래? 하하 "
    " 무슨...! "

    홍혜화는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가 말한 것들이 아니라면 저절로 움직인 자신의 손이 설명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바라보는 홍혜화,

    " 그럼, 이 내용이 진짜예요? 여탕을 훔쳐보다 걸렸다고?! "
    " 예~ 실제죠. 이 16색이 모두, 실제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
    " 이런! "

    홍혜화는 김남우에 대해 살짝 실망했다. 여탕을 훔쳐보려다 걸렸었다니? 홍혜화가 가지고 있던 남자에 대한 환상에 위반되는 기억이었다. 

    " 하지만 뭐... 어렸을 때니까... "

    애써 고개를 끄덕인 홍혜화의 시선이 곧장 남은 15색 크레파스로 향했다. 시선을 확인한 사내는 빙그레,

    " 이제부터는 요금이 붙습니다. "
    " ...얼만데요? "
    " 천원! "
    " 천원요? "

    너무 싼 가격에 얼굴이 밝아지는 홍혜화! 한데,

    " 천원부터 시작해서 두 배씩 올라갑니다. "
    " 천원부터 두 배씩... "

    홍혜화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지만, 천원부터 두 배씩이라 해봐야 큰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소개팅에 나가서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자신이 없었던 홍혜화의 성격상, 반드시 꼭 필요한 크레파스였다!

    " 살게요! "
    " 선불입니다~ "

    홍혜화는 얼른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 하나를 꺼내줬다. 그리고 15색의 크레파스 중에, '파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 우 와,와,와,와! "

    역시나 저절로 움직이는 손! 눈이 커진 홍혜화가 자신의 손을 신기하게 보았다.

    [ 김남우는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보았지만, 수영을 못해서 뛰어들지 않고 다른 사람이 구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 ]

    " 뭐야아? "

    홍혜화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단순히 생각하면 수영을 못한다는 정보겠지만,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

    " 음... 혹시 내가 물에 빠져도 뛰어들진 않을 거란 건가? "

    홍혜화는 잠시 더 생각에 잠겨있다가, 지갑에서 2천 원을 꺼내어 사내에게 건넸다.

    " 음... "

    크레파스들을 보며 고민하다 '빨간색 크레파스'를 집어 드는 홍혜화.

    " 우와...! "

    여전히 놀랍게 움직이는 홍혜화의 손이 쓴 문구는,

    [ 김남우가 28살에 만났던 여자친구는 살해당해 죽었다. ]

    " 사, 살해?? "

    홍혜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 뭐, 뭐예요? 이 남자가 죽인 거예요?! "
    " 그야 모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냥 살해당해 죽었다는 것뿐입니다. "
    " 네? 아니 그럼 왜,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 이유는 없습니다. 이 크레파스는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상관없이 알려줍니다. 뭐 어쩌면, 빨간색이 가진 뉘앙스가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피 색이잖습니까? 하하 "
    " 으... "

    홍혜화의 얼굴이 찜찜해졌다. 하나라도 다른 이야기를 빨리 보고 싶어졌다. 
    4천 원을 건네고, 노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는 계란 노른자를 싫어한다. ]

    " 엑?! 이게 뭐야?! "

    홍혜화의 얼굴이 황당해졌다. 사내는 빙그레,

    " 말했잖습니까? 사소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상관없이 알려준다고요. 그래도, 혹시 그분과 찜질방에서 계란 먹을 땐 노른자를 독차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 "

    홍혜화는 어이가 없어 사내를 노려보다가, 그냥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서 건넸다. '녹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는 주식이 올라, 900%의 수익을 냈었다. ]

    " 900%?! "

    홍혜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와...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와... "

    홍혜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게 자신의 돈도 아니었지만, 얼굴이 상기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세를 몰아, 급히 만육천 원을 사내에게 건네고 '황금색 크레파스'를 집어 드는 홍혜화!

    " 흐~ "

    기대하며 스케치북 위로 움직이는 손을 보았다.

    [ 김남우의 신용도는 항상 최상급이고, 빚을 진 적도 없고, 보증을 선 적도 없다. ]

    " 오! 경제관이 훌륭한 사람이네! "

    더더 밝아지는 홍혜화의 얼굴! 기뻐하며 다시 지갑을 열다가, 멈칫!

    " 음... 3만 2천 원이에요? "
    " 그렇습니다. "

    가격이 살짝 부담되었다. 잠깐 고민했지만, 

    " 에이! 화장품 한번 참으면 되지! "

    돈을 내고 '주황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는 운전 중에 사람을 친 적이 있다. ]

    " 엑!! "

    좋지 않은 내용에 홍혜화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 아~씨! 뭐야? 사람을 쳤다고? 아씨 찜찜한데... "

    홍혜화가 지금 찜찜한 건, 가벼운 접촉 사고인지, 큰 사고인지, 누구의 과실인지조차 안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 짜증나아~ "

    알 수 없는 거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만약 누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입술을 깨물던 홍혜화의 시선이 남은 크레파스로 향했다. 이 남자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남은 색은 9개. 마음 같아선 다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가격이 부담되었다. 다시 또 계란 노른자 같은 사소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정말 짜증 날 것 같았다. 

    " 그만하시렵니까? "
    " ...아아아! 몰라 몰라! 한 번만 더! "

    지갑을 뒤지던 홍혜화는 6만 4천 원을, '카드'로 결제했다. 

    " 무슨... 이런 곳에 카드기가 있어요? "
    " 전단지 못 보셨습니까? 정식 사업장입니다~ "
    " ... "

    '하늘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는 연애 중에 다른 여자에게 한눈판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

    " 오오! 바람은 안 피우는구나! "

    홍혜화의 얼굴이 환해졌다! 김남우와 만나면 적어도 여자 문제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6만 4천 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정보였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홍혜화. 

    " 그래도 마지막이 잘 나와서 다행이네요! " 

    홍혜화는 싱글벙글 가방을 정리하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한데. 한데.
    남은 8색의 크레파스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을 뿐, 홍혜화 혼자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 하나만 더 볼까... 아씨, 궁금해 죽겠네... "

    긴 시간 갈등하던 홍혜화는 결국,

    " 에잇! 하나만 더 보죠! "

    12만 8천 원이 결제되는 순간이었다.
    '살구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는 현재, 일주일 평균 3번의 야동을 본다. ]

    " 으악! "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울상으로 짜증을 내는 홍혜화.

    " 이게 뭐야아~! "
    " 하하 건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
    " 뭐라구요?! "

    괜히 나섰다가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사내는 찔끔했다. 홍혜화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더 안 하고 가십니까? "
    " 예! 너!무! 비싸잖아요! "
    " 그런가요? 하하 "

    홍혜화는 왠지 얄미워지는 사내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한데. 한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홍혜화의 뒷모습. 부들부들 떨며 고민하다가 결국, 홱! 뒤돌아-, 

    " 아~씨! 할부 돼요?! "
    " 물론입니다~! 무이자 36개월까지 가능합니다~ "

    카드를 긁은 홍혜화는, 25만 6천 원짜리 '갈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 김남우는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적이 있어, 개를 싫어한다 ]

    " 개를 싫어한다고? "

    홍혜화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집에서 8년째 키우고 있는 강아지가 있는 홍혜화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지금이야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거니까, 결혼한다면 독립해서 살긴 하겠지만... 그래도 개를 좋아하는 홍혜화와는 맞지 않았다.

    " 아 이런 취향 차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
    " 하하하. 돈값 하는 이야기였습니까? "

    사내는 웃으며 물었지만, 홍혜화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 너무 비싸요! "
    " 그런가요? 하하 "

    비싸다고 하면서도, 홍혜화의 시선은 남은 크레파스들을 보고 있었다.

    " 저 중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
    " 저야 모르죠? "
    " 하~~아...  "

    한숨을 쉰 홍혜화는, 머릿속 계산을 중얼거렸다.

    " 36개월 할부가 되면 한 달에... 에잇! 하나 더 살래요! "
    " 훌륭하십니다~ "

    '하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라는 이름은 사실, 신분이 세탁된 이름이다. ]

    " 뭐어-야?! "

    뜨악해서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나는 홍혜화!

    " 신분세탁?! 신분세탁이라고?! 뭐...! 뭐...! 뭐야 이 남자-?! "

    다시 털썩 주저앉으며,

    " 이게 뭐야아~! 신분세탁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에~! "

    의자에서 몸부림치며 짜증 내는 홍혜화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 사내의 말.

    "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안 만나면 되잖습니까 하하. "
    " 이익...! "

    홍혜화는 흉악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다 몸부림쳤다.

    " 이번 소개팅마저 날릴 순 없다고요! 모쏠로 늙어 죽긴 싫단 말야~아! "

    의자 뒤로 넘어갈 것처럼 몸부림치던 홍혜화는, 벌떡 고개를 세워 사내에게 물었다.

    " 신분세탁한다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니죠?! "
    " 글쎄요. 그야 모르죠? "
    " 어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 그럴 수도 있죠. "

    '아~씨' 인상을 찡그리던 홍혜화는,

    " 하나 더 봐야겠어요! "
    " 훌륭한 판단입니다. "

    1,024,000원짜리 '검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 김남우는 탈모로 인해 부분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

    " 뭐? 대, 대머리? 대머리야?! 대머리였어?! 으앙~! "

    홍혜화는 의자에 널브러졌다!

    " 부분 가발이니까, 심한 대머리는 아닐 겁니다. "
    " 그거나 그거나! "

    홍혜화는 너무 억울해서 사내에게 소리쳤다.

    " 이렇게 비싸게 주고 샀는데 이게 뭐예요?! 대머리라는 거나 알려주고! 뭐야 이게 진짜!! "
    " 흠... "

    생각하던 표정의 사내는, '연두색 크레파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이 크레파스엔 고객님이 마음에 들어 할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겁니다. "
    " ...정말이에요? 팔아먹으려는 수작 아니에요? "
    " 하하하 적어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인 건 확실합니다. "

    홍혜화는 갈등했다. 사실 이대로라면, 주말에 소개팅에 나가더라도 김남우라는 사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취소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있었다. 한데 저 연두색 크레파스에서 나올 내용이 괜찮다고? 무슨 내용일까? 뭐가 나올까?

    " 으으... 이백만 원... 36개월 할부면... "

    입술을 깨물며 갈등했다. 금액이 너무 컸지만, 궁금한 마음도 컸다. 
    갈등하고 갈등하다, 끝내 홍혜화는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 아~씨! 긁어요! "
    "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

    카드를 건네고, 연두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 김남우는 결혼하고 아내와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따로 저축하는 통장이 있다. ]

    " 세계여행! "

    홍혜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렸을 적부터 홍혜화의 꿈이 바로 세계여행이었다!

    " 와! 나중에 아내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돈을 따로 모으고 있단말야? 멋진 남자잖아! "
    " 만족하십니까? "
    " 음... "

    홍혜화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를 몰랐으면 후회할뻔 했다고 생각했다. 김남우에 대한 호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홍혜화. 사내는 이때다 싶어,

    " 그럼, 혹시 다른 크레파스들도? "
    " 됐네요!! "

    그건 정말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홍혜화. 사내는 피식 웃었다.
    홍혜화는 나간 돈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크레파스들이 눈에 밟히기도 했다. 
    그 시선에 사내가 반응해서,

    " 오? 한 번 더? "
    " 됐다니까요! "

    홍혜화는 질색을 하며 물러났다.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 역시, 사람의 호기심은 무섭죠? "
    " ...에휴. "

    말을 말자며 고개를 흔든 홍혜화는, 푹푹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 더 있다간 또 무슨 짓을 할지! 수고하세요! "
    " 하하하 "

    사내는 스케치북을 건네며 홍혜화를 배웅했다.
    홍혜화는 가게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딴 세상에서 빠져나온 느낌이 들어, 스스로 머리를 때렸다.

    " 멍청이! 얼마를 쓴 거야 도대체? 아이고~ "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손에 든 스케치북의 글들이었다.

    " 그래! 이런 정보들을 얻은 게 어디야? 꽤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해! 돈이 아까워서라도, 이 남자랑 결혼까지 하면 되지 뭐! "

    홍혜화는 잘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잘한 일 같았다.

    " 하나만 더 사볼 걸 그랬나...? "

    남은 3가지 색의 크레파스가 궁금해졌지만, '으~' 고개를 흔들었다.

    .
    .
    .
    .
    .
    .

    커피숍에 마주 앉은 홍혜화와 김남우. 
    홍혜화는 지금, 극심한 분노로 인해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홍혜화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김남우가... 


    김남우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일 줄이야!!


    " 아참! 이 얘기도 재밌는데,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여탕을 훔쳐보다가 걸려가지고~ 으하하하! "
    " ... "

    " 아참참! 제 이름이 사실, 작년에 바뀐 이름이거든요? 일종의 신분세탁이랄까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간첩신고를~. . . 제가 또 개를 싫어해요~! 어렸을 때-. . . 사실 저는 통장을 하나 따로 만든 게 있는데-. . . 혹시 주식 하시나? 전 사실 주식 같은 거 안 하는데, 친구놈이 글쎄 10만원만 해보라기에~. . . 혹시, 계란 노른자 좋아하세요? "
    " ... "
    " 그리고 이건 정말 비밀인데... 특별히 홍혜화씨에게만 말해드리는 겁니다! 여기 이 부분이... 사실 가발입니다! 짜잔! 으하하하! 아참, 그리고 제가-. . . "

    부들부들 떨던 홍혜화는 속으로 절규했다!

    ' 그만 말해! 그만 말하라고!! 으아앙 내 돈-!! '


    같은 시간, 편의점 2층. 열심히 이삿짐을 싸고 있는 사내가 귀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 역시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직접 만나는 게 확실하지! "
    출처 생각
    복날은간다의 꼬릿말입니다
    직접 만나지 않고선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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