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엔, 돌아보니 이상했던 일들을 적었었는데,
이번에는 당시에도 공포였던 일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반말은 양해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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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말했듯, 난 외국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다른 한국인들과 주로 어울렸는데,
대학교에 다닐 때도 학교 내의 한국 학생들이 모여 만든 한인클럽 친구들과 친했다.
내가 2학년 때 생겼으므로, 뭐 사실 이미 친한 사람들이 만든 클럽이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캠퍼스 타운으로, 학교 친구들은 거의 다 근처에 살았다.
당시 나는 친한 후배들과 자주 어울렸고,
후배들 밥 잘 해 먹이는 왕언니가 되어있었다.
그 날도 친구들과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단체로 노래방을 가자고들 했서,
차 세 대에 나눠타고, 당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노래방에 가서 재밌게 놀고,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니, 그랬다고 한다.
나에게는 이 기억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타고있던 차가 사고를 당해 나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 날의 기억은 통째로 흐릿하고, 특히 사고의 기억은 없다.
주변인들에게 들은 바로는,
차 세 대의 주인들, 나의 철없는 후배놈들은, 그 새벽, 차도 별로 없는 도로에서
경주하듯 서로 견제하며 속력을 높였고,
그 중 제일 철없던 놈이 내가 타고있던 차 앞을 급히 막아서면서
내가 타고있던 차가 그걸 피하려다
오른쪽 가드레일을 뚫고 절벽 비슷한 지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큰 사고였다.
차에는 네 명이 타고있었고, 차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낡은 중고 Civic의 에어백은 터지지도 않았다.
조수석에 탔던 나는 목뼈가 바스라졌고
뒷좌석에 탔던 여자 후배는 갈비 뼈 두 개, 척추 두 개가 골절됐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사고이지, 공포는 아니었다.
공포스러운 일은 사고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차 앞으로 끼어들었던 사고의 주범,
즉 우리의 선배, 후배, 매일 보고 매일 어울리는 절친들은,
우리의 생명보다 본인들의 안위가 우선이었고,
신고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은 서둘러 우리 동네로 돌아간다.
앞차의 그들은 하나같이,
바로 뒤에 따라오던 우리 차를 본 적도 없고,
자기 차를 받을까봐 차를 급하게 돌리는 것도,
그리고 가드레일을 찢고 도로에서 사라지는 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죽고 사고가 조용히 묻히길 바랬을 그들의 마음이,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묻고 싶다.
그들은 왜, 사고를 인지하지도 못했으면서,
그 길로 내 동생에게 가
야, 니네 언니 죽은거 같애, 하며
끔찍한 표정을 지어보였던 것인지.
왜 내 동생을 태우고 근처 응급실을 돌며 나를 찾았던 것인지.
사시같이 떨고있는 내 동생을 옆에 두고,
아, 씨발, 그 차에 내옷 다 들어있었는데,
라며 차 걱정을 했던 것인지.
기절했다 깨어난 운전자가 직접 911에 신고를 해서 구조될 때까지,
우리는, 거기, 어둠과 고통과 공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나중에 견인된 당시 사고 차량)
(을 찍어서 당시 싸이월드에 올렸던 사진)
다행히 우리 넷은 모두 살았지만,
가장 부상이 심각했던 나는 목뼈가 열 몇 조각으로 부숴져 신경에 박혔고,
팔 다리를 못 움직이는 것은 물론,
생년월일을 묻는 간호사에게 1888년 1월 1일 생이라고 하며
헛소리만 하고 있었다.
동생이 응급실에서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병원에서는 나의 신원도 나이도 파악하지 못하고,
전신마비이고 곧 죽을거라며,
몰핀만 미친듯이 주사하고 있었다.
내 동생은 내가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봤다며,
수술해야 한다고 난리 난리를 쳤고,
아주 긴 동의서에 동생이 서명을 하고 난 뒤,
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를 당시 핸드폰으로 촬영한 사진)
감사하게도 난, 목에 쇠를 박는 큰 수술을 하고도
새끼손가락 하나 마비되지 않고 살아났고,
목부터 허리까지 깁스를 하고 퇴원했다.
간호사들은 날, 목숨이 아홉개라며, 고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난, 살아난 것이 감사하지 않았다.
사고 후 후유증과 당장 해결해야 할 생활비,
그리고 무엇보다,
뻔뻔한 가해자들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립.
내가 마주해야 했던 것들은 가혹했다.
내가 집으로 불렀던 가해자들은
더이상 내가 알던 이쁜 후배들이 아니었고,
우리 삼촌 변호사야, 니 맘대로 해, 라며
식탁을 다 엎어놓고 떠났다.
내가 입원 해 있던 동안, 무슨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알 수 없었고,
좁디 좁은 우리 학교 한인사회에서 나는 매장되어 있었다.
내가 수술실에 들어갈 때 펑펑 울며 어쩔 줄 모르던 나의 룸메이트에게
나를 적으로 돌린 그들과의 술자리가 더 중요했고,
한 집에 살고있는 나와는 눈도 맞추지 않았다.
가끔 마주치는 학교 사람들은,
아, 니가, 그랬다며? 이참에 돈이나 땡겨보려고, 후배들 고소하니까 좋냐?
걔네들 보험비 오를건데, 미안하지도 않냐?
조소하며 나를 스쳐갔다.
나는 목뼈를 잃었는데, 그들은 친구들의 보험료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들의 선택적 우정이, 나는 무서웠다.
나는, 그들의 뻔뻔함에 힘입어,
그나마 있던 미안한 마음도 없이,
차에 타고있던 나머지 세 명과 함께 고소를 준비했고,
이번엔 동생들마저 선동해서 친구들을 고소한,
돈에 환장한 애가 되어 있었다.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우선 1차 가해자인 우리 차 운전자를 고소해야 하고,
운전자 보험사에서 다른 차 운전자를 고소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에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고,
나에겐 비싼 병원비와 수술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타고 있던 차 운전자는
나랑 정말 친하던 남자 후배였다.
그는 나에게 엄청나게 큰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더이상 운전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를 거의 매일 불러냈고,
그는 억지로라도 친구차를 빌려 운전을 해서 나를 찾아와야 했다.
괜찮아, 니가 잘못한 거 아니야, 미안해 하지마,
나는 매일같이 그를 위로했고,
나의 위로가 힘이 되었던 걸까,
유학생 신분이던 그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돌연 한국으로 도주했다.
1차 가해자가 없어진 상황.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재판을 시작해야 했다.
변명이라도 듣고 싶던 난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그의 어머님과 통화를 하게 됐다.
그러게, 너 죽었으면 우리 ㅇㅇ이 어떻게 할 뻔했니, 살았기 망정이지,
엄마에겐 자식 걱정이 우선이라지만, 이 말이 서늘했다.
후배의 위치를 묻는 나에게, 서늘함은 더해졌다.
돈 땜에 그러니? 보험회사에서 돈나오면 그거 줄게, 됐니?
목소리가 앙칼졌다.
고립된 나에게 몇 안남은 내 편.
같은 피해자.
그의 배신이 무서웠다, 정말.
나는 그와의 연락을 포기하고 불리한 싸움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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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잊으려 노력하며 잘 살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공포 그 자체였어서 공게에 적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안전벨트는 생명띠이고,
저는 참 명이 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