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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술이 들어가도 말할 수 없고 친한 친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 이유는 많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를 바라볼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 이야기 자체가 가진 껄끄러운 분위기 때문에, 혹은 어떤 사람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모두에 해당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매년 겨울눈이 내릴 때 쯤 찬바람을 맞으면 그 때의 기억과 함께 어두운 마음 속 저 바닥부터 스멀스멀 죄책감이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하다. 사실 수년 동안 남에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본 적도 손에 꼽는다. 많은 시간 망설인 이유에는 나 스스로 때문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그녀가 이 글을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타인으로부터 영혼 없는 값싼 동정을 받을 까봐 걱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번 기회에 글을 쓰는 건, 그녀가 잊혀 질까봐 그리고 나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어떻게 끝맺음을 해야 할지 짐작도 안 되지만, 글의 시작은 분명하다.
내 기억 속 그녀는 항상 겨울 풍경에 서있다. 처음 만난 날도,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날도 그렇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특목고에 합격한 나는 추운 날씨를 핑계로 스스로 다짐했던 운동은 내팽겨 치고 집에서 컴퓨터만 잡고 살았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낸 건 고등학교 합격자 카페였다. 당 년도 합격자들이 모여 서로 채팅하고 선배들에게서 학교이야기를 미리 듣는 건 재미가 쏠쏠했다. OT도 하기 전이라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이미 채팅을 통해 친해진 사람도 있었고, 그녀는 그 중에서도 서로 제일 먼저 알게 된 같은 반 친구였다. 매일 새벽 2시를 넘어 퀭한 눈을 뜨고 카페 채팅방에 들어가면 항상 그녀가 있었다. 한쪽이 지쳐 먼저 잠들 때까지 흰 화면의 글씨를 읽다 잠들었다.
서로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많지는 않지만 상당한 공통 관심사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난 그녀와 대화하는 걸 즐기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입학한 후 얼굴을 대면했을 때는 서로의 상상과 맞추기 위해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유지했다. 해리포터를 연상시키는 동그란 안경, 여자치고 꽤 큰 키에 옅은 주황색이 감도는 짧은 단발머리. 외모와 비슷하게도 평소에 너무나 쾌활하고 성격이 털털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친구도 많았다. 남자와 여자사이에 진짜 친구는 없다며, 한쪽이 짝사랑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J와 나는 서로에게 애정 없이 우정만을 공유한 친구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학교에 들어가 동성친구가 더 생겨서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말을 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문자를 통해 대화하는 우린 정말 친한 친구였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안 건 3학년 가을이었다. 수능이 다가오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던 어느 날, 학교에 소문이 돌았다. J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었다. 1학년의 여자애와 음악실에 단 둘이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발견했다는 소문이었다. 근원도 알 수 없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듣던 친구 중 하나가 나에게 던진 J와 친하지 않았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그저 당황하며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녀가 동성애자든 아니든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을 때 그녀를 걱정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었고 친구들이 나까지 이상하게 볼 것이라 생각한 건 내 치졸함과 겁이 많은 성격 때문이었다.
항상 말로는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똑같은 사람이며 동성애를 차별하는 건 인종차별과도 똑같은 저질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했으면서 정말로 친구가 나를 필요로 했을 그 순간에 나는 친구를 배신했다. 나와 J의 친분이 드러나면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도 향한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기에 더욱 비겁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친구를 버리고 3년 동안 마음으로 사귄 친구를 모른 척 하는 건 아둔하고 겁쟁이나 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수나 잘못이 그러하듯 나 또한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했다.
그 날 이후로 J와 친구가 된 이후로 항상 하던 인사나 잡담을 안했다. 그녀가 교실에 들어오면 미묘하게 그녀를 인식하고 말을 걸지 않는 반 친구들을 따라 나 또한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가 없을 때 몇몇 거친 친구들이 그녀를 비판하고 모욕하는 걸 보면서도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분노했어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그들과 언쟁을 시작한 순간 그들의 화살이 나에게도 향할 것을 알기에, 비겁하게 뒤에 숨어버렸다. 얼마 후 가족까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교칙에 이성교제가 금지되어있지만 공공연히 사귀는 연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J와 그녀의 연인은 눈에 밟혔나 보다. 불순이성교제라는 명목으로 학교에 불려온 J의 부모님은 많이 울다 가셨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온 세상이 적이 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그녀가 소외되어갈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능이 다가온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분명 그녀와 연락할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치졸한 놈이었을 뿐. 시간이 지나 수능이 끝난 후엔 아무도 그녀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수능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 결국 난 졸업할 때까지 그녀와 다시 이야기하지 못했고, 그녀의 고민을 물어볼 작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J가 얼마나 슬퍼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도, 안부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무신경에 의해 3년간의 우정은 깨져버렸다. 그 땐 대학도 다르니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안일한 착각에 불과했다.
졸업 후 집에서 무료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오후 문자 메세지 하나를 받았다. 수많은 말줄임표를 지나 문자를 끝까지 읽었을 때 문자를 읽기 바로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J가 투신자살 했다는 내용과 연세대학교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한다는 내용.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친 것과 같다는 문학적 표현이 사실감 있게 다가왔다. 평소 감수성이 풍부했지만 눈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제일 큰 목소리로 J를 욕했던 친구가 정장을 입고 창백한 표정으로 안내를 돕고 있었고, 선배들 후배들 선생님들 모두 숨죽인 채 울고 있었다. 왜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지 스스로 책망만 하고 J의 영정사진에 말없이 절한 후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왜 그녀가 죽어야 했을까.
며칠간 우울해 있던 나에게 부모님이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크게 충격 받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다고 하는 말을 들은 날 자기 전 침대에서 베개를 물고 숨죽여 울었다. 장례식장에서 울어주지 못 해 미안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잠든 날 꿈에서 그녀를 보았다. 오랜만에 한참을 재밌게 얘기하다 잠에서 깬 이후에야 그녀가 죽었고 다시는 함께 이야기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J가 죽은 이유가 나에게도 있음을 알았다. 한사람이라도 그녀의 편이 되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그녀를 싫어한다고 해도, 적어도 나만은 그녀의 친구로 남아있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저승이 있다면 그녀가 행복한 곳으로 가기를 빌어줄 종교가 내게는 없다는 사실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제일 슬프고 후회스러운 것은 그녀가 나와 친구가 된 것을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그녀에게 실망을 줬다는 사실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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