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만오천구백삼십.... 육만오천구백삼십일.... 육만오천구백삼십이....
육만오천.......몇까지 셋지?’
잠시 고민했지만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까짓거 다시하지 뭐. 어차피 남아도는게 시간인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멍청한 일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특별히 무언가 다른방법이 있는건 아니었다.
제법 건강하다 자부한 나지만 의사는 너무 늦게 왔다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날리곤 6개월 이라며 시한부 선고를 내려 버렸다.
‘살고 싶다’ 라는 생각보다 ‘죽고싶지 않다’ 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 마음은 냉동인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을 동기가 되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냉동하여 미래에 그 병이 치료가 가능해 지면 해동시켜 치료하고 미래에서 살게한다.
SF영화 같은 이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커다란 냉각캡슐에 누워 눈을 감을 때 까지도 난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칠천오백구십삼......칠천오백구십사.....칠천오백......
후.... 지겹다 그만하자.’
숫자세기를 멈추고 냉각 캡슐 안에서 정신을 차린 그 순간을 떠올렸다.
긴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나면 순식간에 미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문제가 일어났다.
잠이든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의식이 깨어나 버린 것이다.
소리를 질러 밖에 내 상태를 알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몸을 움직일수도 없고 어떠한 감각도 없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다시 잠에 들지도 못했고 의식이 흐려지지도 않았다.
통제할 수 없는 몸 안에 갇힌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머리를 최대한 굴려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나의 일대기를 서사시처럼 재해석해보기도 했고
내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어 머릿속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노래를 만들기도 했고 소설을 써보기도했다.
외부로부터 모든 자극이 차단된 데다가 잠조차 자지 못하니 못할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느낌상 한 10년 정도 하니 질려버리고 말았다.
10년 이후 부터는 명상을 시도했다.
아무생각을 하지 않고 완전한 무아의 경지에 도달 하는게 목표였다.
그건 3년정도만에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5년 정도는 노래를 부르거나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그 이후에 생긴 취미가 숫자 세기다.
얼마나 큰 숫자 까지 셀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
이건 의외로 재미가 있어 7년 정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질리고 말았다.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몇 년도가 되어야 내 병을 고칠 수 있을 만큼 의학이 발전할까?
2030년? 2050년? 어쩌면 100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내가 아직 냉동되어 있는 것은 맞을까?
나쁜 생각에 사로잡힌 그 순간 아무런 자극이 없던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디보자.... 2016년 10월 12일 냉동.....
나이는 33살..... 남자고.... 병명은......”
완전히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의학용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빛을 느낄 수 있었고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감각이 있었다.
약간의 이명음이 있지만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수술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들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눈이 매우 부셨지만 난 억지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술실처럼 보이는 곳 한가운데 내가 누워있었고
수술복을 입은 남자 한명이 내 프로필이 써있는 것으로 보이는 차트를 들고 있었다.
한참차트를 보던 그는 내가 내는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오! 정신이 들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잠은 잘 주무셨나요?”
몇십년 만에 듣는 유쾌한 인사에 난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좋게 대답을 하려 했지만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냉동에서 막 깨어난 상태라 말하기 힘들 겁니다. 천천히 하세요.”
한참을 웅얼거리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이 몇 년도 입니까?”
내 첫마디였다.
“깨어난 분들 대부분이 가장 처음 그걸 물어보시더군요.”
남자는 노래하는듯한 즐거운 톤으로 말했다.
“우선 대답해드리면 지금은 2028년입니다.”
2028년!
내가 잠들었던 시간까지 다 포함해서 12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지만 이제와서 그런건 중요치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제 병을 치료할 방법은요? 개발된 겁니까?”
수술복을 입은 그의 모습에 난 기대감에 찬 채 말했다.
남자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치료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절대 개발되지 않을 것 같네요.”
남자의 대답에 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수술복을 입은 남자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그 모습에 난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절 놀리는 겁니까? 아직 치료를 못한다면 왜 저를 깨운겁니까?”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2020년이었습니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게 말이죠.
전쟁은 몇 달만에 끝났지만 그 피해는 다른 전쟁과 비교할게 아니었죠.
핵무기를 미친 듯이 퍼부었다고 하면 어떤 상황인지 짐작 하실 겁니다.
지상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벙커나 이런 지하 시설물에 극소수의 인간만이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남자는 한쪽에 주욱 늘어놓은 수술도구들을 점검하며 계속 말했다.
“살아남은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식량이었습니다.
아마 다른곳에선 지금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아사했을 겁니다.
비축해둔 식량에는 한계가 있을테니 말이죠.
하지만 기쁘게도 저희 시설에선 아사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난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시설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고기가 냉동되어 있습니다.
시설내 발전기만 있으면 몇백년은 끄덕 없이 유지되는 식량인 것이지요.
저희에겐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자는 커다란 주사기를 하나 들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슬픈 표정은 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죽을 운명이었어요.
핵전쟁 이후로 당신의 병이 치료될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구요.”
남자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내 팔에 주사를 찔러 넣었다.
“웃으십시오. 기뻐하세요.
당신의 피와 살은 남은 인류에게 훌륭한 양분이 될 것입니다."
"물론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이죠.”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