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2학년, 여름.
군대가기 전에 탕진할 용돈이 필요했던 저는
을지로 극장가근처 허름한 건물 2층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참 한가한 노래방이었습니다. 요즘말로 꿀알바..라고 할까요.
사장님은 주말에 한번 나와서, 3층에서 도박. 노래방엔 일절 무관심, 가끔 술심부름+용돈 ㅋ
종일 손님도 거의 없었습니다, 많아야 하루에 4~5팀?
낮시간에는 몇년째 일하고있다는 누나가 오후2시에 오픈, 저녁8시에 퇴근,
저는 저녁8시에 출근, 새벽2시에 청소하고 셧터내리면 끝,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얘기가 시작인데
우선, 노래방 구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액셀 ㅈㅅ)
노래방, 구조가 대충 "ㄴ" 자 형태로 되어있었습니다.
한쪽 끝에 입구가있고, 다른쪽 끝 구석에 화장실이 있는 형태,
(카운터가 출입문쪽에 있어서 4번방과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 구조)
1
유독 4번방에서는 사건사고가 많았습니다.
카운터에서 잘 안보이는 방이라,
손님들이 술을 사와서 마신다거나 하는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정작 이상한건, 사나흘에 한번꼴? 정도. 기판에러라고 해야할지..
손님이 댄스곡을 부르는 도중에 음악이 꺼지고
난데없이. 코러스가, 육성코러스로. 트롯트의 코러스 "우후~우우우~♬" 하는 여자합창단(?)의 구슬픈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한번 살쩍 나오는게 아니라,
버퍼링걸린것처럼 반복적으로. 우후우우우- 우후우우우- 우후우우우-
노래방 기사님이 오셔서 기계점검도 몇번했는데 당연히 기기에 이상은 없다고....
찜찜했죠,
제 전 타임에 알바를 하는 누나는 너무 대수롭지않게
"4번방에 귀신이있어 ㅎㅎㅎ" 하며 넘어가길래 더 뭐라 말은못했습니다,
가끔,
4번방에 손님이 없는데 갑자기 "우후~우우우~♬" 하고 코러스가 나와서 제가 기겁을 하기도했죠,
참 신경쓰이는 방이었습니다,
2
어찌됐건 저는 2시에 클로징을 하는데
클로징을 위해서는. 그 4번방옆 화장실에 3번을 들러야 했습니다,
a 각 방의 재떨이를 모두 회수. 화장실에서 헹구고 나와 각 방 청소 (당시노래방은 금연이 아니었어요)
b 화장실로 다시 가서 대걸레를 빨아가지고 나와서,
c 복도 대걸레질을 끝내고 다시 화장실에서 빨아서 널어놓기.
종일 비가 추적추적 오락가락해서 손님이 한팀도 없었던 어느날 2시,
클로징을 위해 재떨이를 씻으러 화장실에 갔습니다. a 작업.
세면대에 웬 여자 머리카락이, 길게, 두세가닥 늘어져 걸쳐있더라구요.
뭐 낮타임에 손님이있었나 하고, 뭔가 퍼석퍼석한 머리카락을 바닥에 버리고 재떨이를 헹궜습니다.
각 방 청소를 끝내고 다시 대걸레를 가지러 화장실에 갔죠. b작업.
화장실 문을 열고 잠깐 굳어있었습니다.
아까버린것같은데. 왠지 머리카락 서너가닥이, 방금전과 비슷하게 세면대에 걸려있었습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이런거구나, 싶더군요.
그래도 쿨한척.
아까 머리카락이 안떨어졌나보다, 하고.. 그래도 기분나쁘니까 세면대청소도 하고, 여튼 대걸레를 빨았습니다.
자.. 이제, 복도 대걸레질을 끝내고. 화장실에 널어놓으러 가야하는데
기분이 묘하더군요.
평소에 엄청 둔한편인데.. 제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게 느껴졌습니다,
조심스레, 대걸레끝으로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는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 화장실 세면대에 머리카락이 떨어지고있는 중이더라구요
마치 세면대 앞에서 누군가 머리를 빗고있는것처럼, 한가닥 한가닥 떨어지는게 보였습니다.
어느새 세면대에 열댓가닥?한웅큼가까이? 머리카락이 쌓이고있던..
가방이고뭐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쳤습니다,
노래방밖으로, 2층에서 1층으로, 건물밖으로,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가로등도 거의 없고, 길에 사람도 하나도없고, 숨은 가빠오고 미칠것같더라구요 무서워서,
가방을 두고왔고 창문이 열려있고 셔터가 올라가있고 뭐 그런거 신경쓸 겨를조차 없이
그냥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고싶었습니다, 충무로쪽으로 냅다 뛰었어요.
큰길에 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후들거리며, 혹은 부들거리며 비맞으며 떨고있었습니다.
계단을 뛰쳐내려와서, 가방생각에 건물앞에서 멈칫했을때
열린 노래방 창문으로 4번방 코러스가 들려왔었거든요. "우후~우우우~♬" 하고.
다음날.
낮타임 누나가 가방도 안가져가고 셧터도 안내려놓고 퇴근했냐고 물어오는데 딱히 할말은 없고...
근데 당장 그날 새벽2시까지 혼자 버틸 자신이 없어서
솔직히 얘기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근데ㅎㅎㅎㅎㅎ
당일에 바로 관둔다는데 알바누나는 그걸 납득하고 사장님께 바로 연락을 하고
사장님도 바로 가게로 나오더니 군말없이 일급여로 정산해주더라구요
이사람들 뭔가 알고있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처음이 어니었겠죠 분명.
끝입니다.
뭐 귀신이라던가 그런 대단한걸 본건 아니에요,
실상 본건 머리카락 몇가닥정도뿐.
하지만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허름하고 손님없는 노래방은 못들어가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