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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sisa_905985
    작성자 : 늙은아빠
    추천 : 39
    조회수 : 1279
    IP : 211.182.***.253
    댓글 : 34개
    등록시간 : 2017/04/24 10:05:56
    http://todayhumor.com/?sisa_905985 모바일
    부산 중년이 대구의 중년 오유인에게 드리는 편지
    옵션
    • 창작글

    안녕하세요?

    부산에 사는 40대 후반 남자입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산청이 고향인 아버지, 진주가 고향인 어머니는 신혼 때부터 부산에 자리를 잡고 자식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87년 대선 때 아시다시피 부산경남은 김영삼, 대구경북은 노태우, 광주전라는 김대중, 충청은 김종필 후보에게 가장 많은 표가 나왔지요. 주변 어른들의 영향으로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던 저도, 군부독재의 후계자 노태우가 6월 항쟁을 무력화시키는 게 분하고 또 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산, 마산 등 PK는 야당 도시였지요.

    88년 청문회 때는 노무현 의원에게 매료되었습니다. 90년 3당 합당 이후 부산은 민자당-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여당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PK 유권자의 다수는 92년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표를 던졌고, 이어지는 대선과 총선에서 부산은 완전한 여당 도시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어느새 저는 부산 지역의 주류 정치성향과 다른 소수에 속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저는 지역주의에 대해 양비론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는 언론의 영향을 받은 바 컸습니다. 노무현을 필두로 한 통추, 꼬마 민주당 계열이 가장 호감 가는 정치 세력이었고,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는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 전남대 강준만 교수의 단행본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읽으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조중동이, 특히 조선일보가 양김 씨 중 디제이에게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 그리고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3당 합당 이후 부산에서 야당 의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수치스러웠습니다. 정치와 근현대사에 지식이 자라며, 왠지 호남인들에 대한 부채 의식이 늘어갔습니다. 좀 우습지만 저는 호남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품었고, 실제로 전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장인 어른은 한동안 저와 정치 이야기 하기를 조심스러워 하셨는데, 제가 부산 사람이지만 지역감정에 물들지 않았다는 걸 아시고 세상 이야기를 폭넓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3당 합당 이후 노무현이 부산 동구 총선에서, 부산시장 선거에서, 부산 북강서을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는 것을 지켜보며, 저는 절망했습니다. 노무현 본인은, "농부는 밭은 탓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저는 도저히 그 밭을 마음으로 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야당 정치인들을 빨갱이라고 폄하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부산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경부터 서울에서 기자로 직장 생활을 하였습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과 단독 인터뷰를 하였는데, 88년부터 마음 속으로 지지, 아니 연모하던 정치인이다 보니 인터뷰다운 인터뷰를 하지 못해서 데스크에게 혼이 났습니다. 팬심이 저도 모르게 많이 드러나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기자를 그만두고 나름의 방법으로 노무현 후보를 도왔습니다. 그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몇년 뒤 저는 부산으로 내려와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지긋지긋한 지역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구경북과 마찬가지로 부산경남 유권자 일반에게 여전히 노무현과 민주당은 친북좌파 정당이었고 호남당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김정길과 무소속으로 출마한 오거돈이 부산시장 선거에서 절반에 가까운 득표를 하였고, 민주당 총선 후보들도 점차 득표율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지난 총선에서 경남을 빼고 부산에서만 다섯 명의 더민주 국회의원이 당선되었지요.

    이제 19대 대통령이 될 문재인 후보는 부산경남에서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 후보입니다. 드디어 김대중-노무현을 잇는 민주개혁세력의 적자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부산경남의 주류가 된 것입니다. 단지 여론조사상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라 직장에서도, 아파트 주민들, 각종 모임에서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서면 유세에서 김홍걸 박사가 등단하였을 때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걸 보면서 눈물이 나더군요.

    어떤 분들은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 김대중의 아들 김홍걸, 두 사람 모두 과거 큰 흠결이 있는 사람이라 이들이 문재인을 지지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은 충분히 일리가 있고 존중합니다. 그러나 수도권 등 타지역에 계시는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지지자들에 비해 지역감정의 주술에 사로잡힌 부산경남 지방에서 한탄과 절망을 거듭하던 이들은, 김홍걸, 김현철 씨가 김부겸 의원과 함께 광주 5.18 묘역에 참배하는 것이 실로 가슴 벅차게 느껴집니다. 

    노무현이 16대 대선에서 승리할 때도 부산경남에서 받지 못했던 지지를 문재인이 받고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변화입니다.

    대구경북의 중년 벗이여, 제가 3당 합당 이후 20 여년간 느끼던 그 답답함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신 줄 압니다. 저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고 변화의 기미를 발견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하지만 부산경남이 바뀌고 있듯이 대구경북도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김부겸 외에도 민주개혁 정당의 후보들이 당선되고,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보다 당당히 밝힐 날이 올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응원합니다.

    가스렌지 불을 켜두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듯 보이던 물이 100도씨가 되는 순간 갑자기 폭발적으로 끓듯이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이는 지역감정도 노력이 쌓이고 쌓이면 한순간에 절반은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게 역사의 진보가 일어나는 방식인 듯 합니다.    


    늙은아빠의 꼬릿말입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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