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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으면 시야에 담기는 풍광이 타국의 색으로 천천히 물들어 가는 것처럼, 산천초목을 품던 망막이 서서히 도시 건물의 반사광으로 물들어 갔다.
주름진 눈을 연해 꿈뻑거리는 박 여사나, 틀니가 잘 맞질 않아 소처럼 우물거리길 반복하는 김 씨나, 햇볕에도 몸이 데워지질 않아 목두리를 꼭 끌어안은 이 씨.
차내에 맴도는 여러 감정은, 우리 나잇대 사람들이 으레 풍기는 체취보다도 진해서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시내에 있는 큰 병원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에서 새로이 개발한 인체용 상온핵융합로를 몸에 부착하기 위해서이다. 쇠고기에 칼질하는 것도 익숙잖은 우리가 자기 몸에 칼질한다는 건 당연히 거북스러운 일이다만, 국가에서 의료비부터 시작해 손주들 교육비까지 다 대주고, 행여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식들에게 어려움 없이 살 큰돈을 주겠다고 하니 거절한다는 생각은 붉은 인주와 함께 짓눌려버렸다.
차를 타고 가기를 사십여 분. 병원 밖을 나오기까지는 사십여 일. 우리 몸뚱이는 케이블 티비에서 종종 나오곤 하던 미제 영화의 날라리처럼 바뀌어있었다. 승용차 본네트 감촉의 금속 덩어리를 남들은 훈장 보듯 하지만, 어쩐지 내겐 수인의 이름표 같다. 애써 잊어버리려고 해도 사람이 볕으로 인해 태양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이 녀석 또한 옷을 껴입건 말건 아랑곳 않고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니 나는 파리가 엉겨 붙은 개처럼 인상을 구겼다.
퇴원 수속을 밟는데, 아무래도 지금 나가는 사람이 나와 이 씨뿐인 모양이었다.
"나머진 언제 나온대?"
"며칠 더 있을 거려. 김 선생은 임플란트 박고 온다고, 박 여사는 좀 더 쉬어야 된다나 봐."
"그럼 뭐."
시원한 병원 로비를 나와 무더운 바깥을 걷자니 우리를 태웠던 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썬팅이 되어 있어 잘은 안 보였지만, 분명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이 씨랑 술 한잔 하고 들어갈까 했는데, 일순 소를 다른 축사로 옮기는 트럭이 떠올라 그냥 걸음을 재촉해 동네로 돌아갔다.
이 씨는 오늘 자식들이 퇴원했다고 집에 온다고 해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갔다. 어차피 적적한 거, 나는 평소 하던 대로 동네 슈퍼에 갔다. 동네 슈퍼에 가니 대낮부터 술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포옹으로 반겼을 사람들이 오늘은 손인사로 끝냈다.
임 씨가 말했다.
"봉고차 타고 가길래 운구차 타고 올 줄 알았더만."
"너 상복 없다고 가라대."
모두가 파 웃었다. 인사는 변했어도 술 인심은 그대로다. 술을 따라준 건 전국 팔도의 말을 섞어 써서 별명이 팔도 사나이인 임 씨였다.
"의사가 술 자셔도 된다디?"
"안주 다섯 입에 한 잔. 술만 마시면 술이 속에서 끓는다나 어쩐다나."
"그럼 그걸로 끝내야겠네."
내 수중에 돈이 좀 있긴 하지만, 슈퍼에서 파는 주전부리가 변변찮으니 그 말이 옳다.
"근데 뭐 더운데 낮부터 술을 하고 앉았어."
"너 나온다고 마중 나왔다. 고마운 줄 알어." 임 씨가 말했다. "근데 박 여사랑 김 선생은?"
이 씨가 말했던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걸 들은 사람들은 부럽다고 햐 소리를 낸다.
턱밑으로 욕심 살이 덕지덕지 붙은 임 씨는 그 다운 말을 했다.
"국가 녹을 골수까지 빼먹는고만."
"사람이 말을 해도 꼭." 내가 말했다. "그럼 자네두 허지 그랬어."
임 씨는 손사래다.
"됐어. 그런 거 안 해도 돈 궁하고 그러진 않어."
아까부터 젊은 아가씨 엉덩짝 보는 양 내 가슴팍만 뚫어져라 보던 최 씨는 궁둥이를 슬근슬근 움직여 어느새 내 옆으로 왔다.
"근디 그게 대체 뭐라고 국가에서 달아주고 그런겨?"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냥 웃통을 벗어 던지고 등을 보여주었다. 나를 빼곤 다 놀랐다. 김치 종지 내오던 슈퍼 아들을 포함해서, 못 볼 걸 봤다는 듯 몸을 떨었다. 내겐 보이지 않지만, 등이 어떤 꼴인지는 들었다. 각종 플러그에 알맞은 구멍이 잔뜩 난 것이 벌만 없지 영락없는 벌집이다.
"전력이 충분해서 에어컨 꽂고 이십사 시간 내내 틀어도 까딱없다더라고."
임 씨가 손뼉을 찰싹 친다. 그러더니 슈퍼 아들내미한테 왁 소리를 질러댔다.
"야아. 여기 선풍기 좀 갖고 와라."
즉시 대령됐다. 선풍기는 강풍으로 틀어도 잘만 나온다. 다만 얼마 안 가 미풍으로 틀었는데, 이유는 전기나 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선풍기 자체가 낡아 스스로 힘을 못 버티고 덜걱덜걱 거리는 것이 곧 부서질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선풍기가 잘 되는 걸 확인한 임 씨는 슈퍼 안방에서 텔레비전도 뜯어 오고, 작은 냉장고도 가져오고, 충전기도 가져오고 아주 신바람이 났다. 어느새 내 등은 작업장 배전반처럼 되었다.
임 씨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천국이 따로 없고만!"
"그러게."
최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디 국가에서 이러라고 달아준 거 맞어?"
"원래 인공장기 전력으로 쓰라고 단 건데, 일단 인공장기 온 것도 없고 해서 콘센트를 한 번 달아봤다네."
최 씨는 고개를 더 갸웃거렸다.
"그 의사 또라이 아녀?"
"내 말이."
임 씨는 평상에 누워 차게 식힌 술과 티비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또라이버건 매까이버건 어쨌든 좋잖어.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살어."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인간 발전기로 있어 보니 불편한 게 있었는데, 바로 화장실이었다. 줄이 길지도 않으니 화장실 갈 때마다 뽑아야 했는데, 티비에 집중한 마을 사람들을 보니 좀 죄스러워졌지만, 그래도 생리현상이니까.
"좀 급하다 야."
"공장도 폐수 꼴꼴 싸대는데, 사람이라고 안 그러겄냐. 갔다 와라."
세상만사 다 이해한다는 듯한 그 미소에 안심하고 다녀왔는데, 문제는 가는 횟수가 늘면서 사람들 짜증도 그에 비례해 증가했다.
"또?"
"미안하다."
스무 번 정도 되었을 땐 사람들의 짜증이 불컥 치솟았고, 나도 화가 났다.
"옘병, 못 해먹겠네! 나 갈런다!"
"엉! 가뻐려라! 마! 확 가뻐려라!"
그날 밤엔 잠들려고 했는데,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에어컨이 없어서 더운 것도, 티비가 서울 네온사인만큼 현란한 빛을 내보여서도, 등에 꽂은 코드들이 거슬려서도 아니라 옆집 이 씨 집에서 고함이 들리기 때문이었다.
"이 년이 첨엔 좋다고 하더니. 뭐? 사람 같지 않어?"
식기가 벽과 바닥, 유리장에 부딪히고 구르는 소리.
"봐라! 봐! 너랑 네 새끼들 돈 문제 해결됐으니까 이제 고딴 식으로 막말을 해?"
문이 걷어차여 벽에 부딪히는 소리.
"나가! 나가! 이 꼬라지보다 흉한 게 네 꼬라지다! 나가!"
섦게 우는 소리가 십여 분간 들리더니 이내 멈추고,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콩닥거리는 심장이 무색하게 나는 꿈도 안 꾸고 잘만 잤다.
다음 날 나를 깨운 것은 잠에 젖어 어슴푸레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누군가 손이 닳도록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구쇼?"
이장이었다. 내 아들뻘 되는 놈이 돈 좀 있다고 이장된 것도 고까운데, 아침잠까지 깨우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장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자기네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대접해줄 테니 등짝의 콘센트 좀 쓰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전력은 무한하고, 나도 등 잠깐 빌려주고 이것저것 받으면 좋지 않냐는 얘기다. 하긴, 요새 뉴스에서도 누진세 누진세 그러니 알 만하다. 아마 전기세가 나 모시는 것보다 비싸니까 이렇게 수고롭게 온 거겠지.
"난 잘런다."
"그러지 마시고요."
"아들 집도 부담되는데 네 집에서 어떻게 살어?"
"우리가 뭐 남입니까."
"남이지, 이 사람아!"
빙글빙글 웃던 녀석이 문을 닫는 순간 떪은 거 먹은 표정이 됐다. 퉤 침 뱉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역시 싸가지 덜된 애새끼다. 그러고 얼마간 자는데 또 문을 지랄 맞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슈퍼 박 사장이었다. 이유는 이장과 같았다.
"난 잘런다."
"그러지 말고."
"아들 집도 부담되는데 네 집에서 어떻게 살어?"
"우리가 뭐 남인가?"
"남이지, 이 사람아!"
빙글빙글 웃던 슈퍼 박 사장이 문을 닫는 순간 떪은 거 먹은 표정이 됐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퉤 침 뱉는 소리가 났다. 충격에 얼떨떨했는데, 몇 분 안 되어 또 누가 문짝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쇼."
솔직히 좀 놀랐다. 어깨 둘을 대동하고 온 배불뚝이가 낯설었으니까 말이다. 그 배불뚝이는 산 어귀 약수터 밑 염색 공단 사장이었다. 이유는 뭐. 조건에 돈다발과 명예 이산가 뭔가 하는 감투를 얹은 것 말곤 똑같았다.
"전 잘럽니다."
"그러지 마시고요."
"아들 집도 부담되는데 거기서 어떻게 삽니까?"
"이 정도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돈 한 푼 아쉬울 때는 지났습니다."
빙글빙글 웃던 염색 공단 사장은 문을 닫는 순간에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 소리를 들어보니 미련 없이 간 것 같은데, 이제 또 누가 올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누가 와도 그냥 없는 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마을은 핵융합로 단 사람을 차지하려고 총포 없는 전쟁을 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총포로 하는 전쟁이 나을 것 같았다. 왜냐면 총성은 멎는 때가 있으니까. 옆집 이 씨는 이미 염색 공단 사장이 데려간 터라 남은 건 나뿐이어서 괴로웠는데, 어느샌가 김 씨가 퇴원하자 한숨 놓게 되었다.
김 씨는 전생에 외교관이었는지 이장과 슈퍼 박 사장을 다루는 솜씨가 굉장했다. 그의 외교론은 속된 말로 똥배짱이었다. 맘에 안 들거나 거슬리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 싶으면 그냥 나가버렸다. 이장 집을 나와도 슈퍼 박 사장이 있고, 박 사장 집을 나와도 다른 집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네들 집에 가줄 사람이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김 씨가 대놓고 왕 노릇 하고 행패 부렸으면 이런 게 좀 덜 했을 것 같지만, 김 씨는 그렇게 품격 없고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애매한 관계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돌아다니는 인간 발전기 덕을 한 시간 만이라도 보려고 큰돈 들여 집에 에어컨을 들여놓았지만, 허사였다.
내가 돈에 초연한 사람은 아니지만, 전기 좀 공짜로 쓰는 대가로 사람 뒤를 꿀물 핥듯 하고 애걸복걸하는 건 아무래도 수지가 안 맞는 장사 같았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생각은 나와 다른 모양인지, 계속 김 씨 비위를 맞추는 데 매진했다.
그렇게 조용할 날 없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에어컨을 틀고 자고 있는데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면 제풀에 지쳐 가겠지. 그렇게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산새와 같이 청아한 음색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벌이 꽃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홍 선생님. 계세요? 저 돼지막 박 씨에요."
행여나 여는 문에 다칠세라 천천히 문을 열었다.
"병원에 더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이젠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얘기 좀 하고 싶어서요. 시간 되시나요?"
나는 내가 여태 씻지 않은 것이 생각나 얼굴이 벌게졌다. 사람맞이하는데 더러운 몸을 내보이다니. 나는 참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금방 씻고 오겠습니다. 좀 걸릴 텐데, 안에서 좀 쉬시겠어요?"
"네. 기다릴게요."
우아한 맵시의 걸음을 맞이한 집은 노을빛으로 자신을 물들였고, 나는 제갈량을 맞이하러 가는 유비가 되었다. 내가 사람을 맞이할 채비가 되자, 박 여사도 얘기가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차분한 모습이었다. 손님이 왔으니 뭔가 마실 걸 내오려고 했는데, 박 여사가 만류하기에 관두었다. 박 여사는 내가 앞에 앉고 나서야 얘기를 시작했다.
"저, 대학에 가기로 했어요."
"웬 대학입니까?"
"연구하는 데 제가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말했다. "사실, 돈이나 명예를 약속하지 않았어도 갔을 거예요."
"뭣 하러 거길 갑니까?"
"제가 세상의 모든 사람과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박 여사는 수녀가 기도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아 정중한 자세와 목소리로 말했다.
"뜻있는 사람들의 부름을 받는다는 건 참 좋은 일 아니던가요."
"그렇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런데 저는 왜 찾으신 겁니까?"
박 여사는 이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기, 저와 같이 대학에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뜻밖의 말에 당황하는데, 그녀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데리고 올 사람이 있다면 데리고 와도 좋다고 이미 허락받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이도 없고, 아들들도 독립한 지 꽤 지났기 때문에 스스로 외로움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었나 봐요.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 가기엔 겁이 나요."
그녀의 입술이 살풋이 떨린다.
"타지에서 기댈 어깨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건 홍 선생님 말고는 안."
말을 뱉자마자 그녀는 자신도 방금의 말이 어떤 고백처럼 들린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챈 모양인지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봤다. 솔직히 거절 못 할 제안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꿈꾸던 대학에 간다는 것 자체가 재밌는 일 같기도 하고, 거기에 기여도 해보고, 이 지긋지긋한 소란에서 떠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좋은 일 같아 구미가 당겼다. 그걸 떠나서도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이었다. 하지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내가 말했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건 떪은 걸 먹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이단을 마주한 신자의 표정에 가까웠다.
"왜죠?"
"글쎄요."
나는 괜스레 머리를 긁었다.
"굳이 따지자면 전 자유롭고 싶습니다."
"휴가도 여행도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해준다고 약속받았는데도요?"
"그런 건 여기 있어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잖아요."
"허허, 여태 충분히 일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과 연구원분들께 도움이 되잖아요."
"박 여사님이 가시잖습니까. 저 하나 없다고 안 될 나라였으면 진즉에 망했을 겁니다."
해가 지나며 쌓이는 낙엽처럼, 거절하는 말을 할 때마다 미안함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나는 가면 후회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새 박 여사는 격앙돼있었다.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럼 여기서 허송세월 보내고 있겠다는 거예요?"
순간, 단어 하나가 뇌관이 되어 여태 쌓였던 미안함에 화학 반응이 일어났다. 불컥 고삐 풀린 화가 쏟아져나왔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말했다. "제가 여태 짧지 않은 인생 살면서 본 건 손가락뿐입니다 어릴 땐 불가능한 꿈을 가리키는 손가락, 젊었을 땐 내 책장을 가리키는 손가락, 직장에 갔을 땐 내 간판을 가리키는 손가락, 자식을 낳았을 땐 내 통장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 나잇대 와선 인생의 사진첩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제 와서 해방된 줄 알았더니 또! 또! 내 삶에다 대고 손가락! 난 그 빌어먹을 손가락이 싫습니다. 모든 이에게 자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가 사람들 손가락을 벗어나려고 하면 그 손가락은 침과 욕의 과녁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니까 말입니다! 아까 자유를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바라는 진짜 자유는 손가락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난 당신은 다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뭐요? 허송세월이라고 하셨습니까? 허송세월이요? 묻겠습니다. 왜 허송세월입니까? 이웃을 위하지 않아서요? 똑똑한 친구들을 위하지 않아서요? 국가를 위하지 않아서요? 내가 뭘 안 했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이웃을 위해 손 빌려준 게 지금까지 몇 번입니까. 여태 엘리트들과 국가를 위해서 몸도 바쳤잖습니까. 제게 공과 과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공 쪽에 더 기울어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따위 걸 다 떠나서 난 솔직히 질렸습니다. 영광될 권리가 아닌 영광될 의무를 주는 손가락뿐인 이 세상은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난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내 말이 끝나자 박 여사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섦게 우는 소리에 하늘도 주춤했는지, 구름이 마을을 오래도록 가려주었다. 나는 진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아마 앞으로 오래도록 외로울 것이다.
그날 밤은 잠이 더럽게 오지 않았다. 박 여사의 일도 그렇고, 그간 마을의 소동도 그렇고, 머릿속을 떠나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그때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마을은 평화로웠을까? 아니다. 지금의 소동은 그냥 마을에서 지루함을 물리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랑 박 여사는? 아니지, 이 씨랑 딸래미는 어땠을까? 글쎄, 아마…….
그때였다. 문을 누군가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건 단순히 사람을 부르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명백히 문을 부수려는 소리다. 얼른 일어나서 뭔가 대비라도 하려고 했는데, 외부인이 더 빨랐다. 내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고 뭔가 씌웠다. 암만 저항해봐도 장정 넷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정들은 나를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갔다.
도착해서 복면이 벗겨지자 살풍경한 광경이 보였다. 축사 같은 곳에 가슴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번쩍이는 사람들이 묶여있었다. 장정들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몸으로 만들곤, 빈자리에 묶어 입과 항문에 고무호스를 물렸다.
장정 중 하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 때마다 귀찮은데 이거 그냥 죽여버리고 원자로만 빼서 쓰면 안 됩니까?"
"안 돼. 죽이면 멈추더라."
"아니, 도대체 왜 그런답니까?"
"몰라. 사람이 죽으면 무슨 수를 써도 작동이 안 되더라고. 핵물질이라도 빼다 팔까 했는데 단단해서 포기했다." 남자가 말했다. "좀 수고로워도 적자는 절대 안 날 테니까 좀 참자."
"예."
장정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이제 망막엔 그 어떤 것도 비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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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줄간격 없는 건 블로그에 두었습니다. http://pinecider.tistory.com/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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