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
고모 할머니 이야기인데, 예전에 몽유병에 걸리셨었다고 한다.
여우에게 홀렸던 걸 수도 있지만, 일단 몽유병이라는 가정으로 이야기 하겠다.
눈을 떠보면 강변에 서 있기도 하고, 산 속에 있기도 해서
아버지(내 증조부)에게 말했더니 일단 가족들끼리 번갈아가며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내 증조모)는 몸이 약하셔서 제외되었다.
첫날은 아버지가 지켜봤는데, 고모가 일어날 때
눈 앞에서 손도 흔들어보고, 앞도 막으며 정말 자는 게 맞나 확인한 후 흔들어깨웠다고 한다.
다음 날은 오빠(내 삼촌 할아버지)였고, 아버지와 똑같이 해보았다.
당연히 고모는 자기가 일어선 것도 기억하지 못 했다.
다음 날엔 여동생(내 할머니)이 지켰다.
여동생은 아빠와 오빠처럼 정말 자는 게 맞나 확인한 후,
언니(고모)를 깨우지 않고 그 후에 무얼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언니는 잠옷차림에 맨발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더니 잠깐 멈춰 서서
빙글 돌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목초지로 걸어갔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고,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 속을
여동생은 돌부리에 채이면서 겨우 따라가고 있는데
언니는 한 발 한 발 힘차게 잘 걸어갔다.
왠지 비틀거리며 걸을 거라 상상했던 여동생은 내심 많이 놀랐다.
목초지에 도착하자, 언니는 뭔가를 찾는듯 빙글빙글 걸어다니더니
정중앙에 멈춰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여동생은 그 다음엔 뭘하는지 지켜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꼼짝도 하지 않아서 언니에게 다가가보았다.
얼굴에 손을 흔들며 자고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여기서 깨웠다가는 자기가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게 들킬 것 같아서
자고 있는 상태로 집에 데려갈 순 없나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업고 갈 정도의 힘도 없었다.
결국 깨울 수 밖에 없겠다 싶어, 어깨에 손을 얹으려던 그 순간
언니 손이 홰액 동생을 향해 뻗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기도 전에 그 손을 잡았지만,
언니에게 딱히 무슨 변화도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자는 소리가 쌕쌕 들렸다.
손을 잡고 가볍게 당기자, 언니는 그대로 따라 걸어왔다.
방향을 바꿔보니 잠든 채로 따라왔다.
가족들에게 들키면 혼날 것 같아서 여동생은 언니 손을 잡고 데려왔다.
자기가 불침번을 설 때마다 여동생은 언니를 따라갔다.
언니는 매번 같은 곳에 가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은 다리 끝에, 어느 날은 밭 맞은 편
빙글빙글 뭔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돌다가 멈춰섰다.
언니 손을 잡고 집에 데려오고, 더러워진 발을 닦아서 안 들키게 몸을 흔들어 깨웠다.
한 달 정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몽유병은 전혀 낫지 않았고, 기도사를 부르자는 말도 나왔다.
여동생도 처음에야 모험하는 기분도 들어서 나름 재밌었지만
이때는 흥미도 잃었고, 한 번만 더 따라갔다가, 그 후엔 방을 나가기 전에 깨우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마지막날이라고 정한 그 날.
언니는 평소처럼 일어나더니 맨발로 밖에 나가 서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여동생은 거의 습관처럼 따라갔지만, 점점 따라가다보니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집 주변 아니면 적어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갔는데
지금 걸어가는 길은 걷다보면 세 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옆에는 집 주변과 다른 마을을 잇는 선로가 깔려 있었다. 이대로 옆마을까지 가려는 걸까?
여동생은 돌아갈 시간까지 생각해서, 어느 정도 같이 가다가 끌고 가기로 결심했다.
언니는 계속 가더니 갑자기 멈춰섰다.
여동생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선로 너머에 터널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냥 길바닥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언니 손을 잡으려던 순간
언니는 튕겨나가듯 뛰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터널을 향해 갔다.
길에서 선로를 막고 있는 덤불을 헤치고 선로에 깔린 돌을 밟고 일직선으로 달렸다.
여동생은 더욱 깊은 어둠 속에서 언니 발소리만 들으며 따라갔다.
머지 않아 "키이이익!"하는 비명 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언니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서둘러 가보니 반원 모양의 출구의 "밤"과 터널 안의 "어둠"으로
언니의 실루엣이 겨우겨우 보였다.
언니는 위를 올려다보며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니는 벽에 다가가더니 마구 긁기 시작했다. 뭔가를 파내려는 것 같았다.
언니는 이따금 신음 소리를 흘리더니, 콘크리트 벽을 마구 긁었다.
여동생은 그 광경이 무서워서, 평소처럼 손을 잡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손을 잡으려고 했더니, 언니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여동생은 서둘러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깨워서 사정을 설명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헛간에서 노끈을 가지고 나왔다.
여동생이 자기가 안내해주겠다고 했지만, 장소만 알려달라며 만류했다.
자기 호기심 때문에 언니가 미친 것 같다는 후회막심함과
언니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가득했다.
불단 앞에서 합장하는 여동생 옆에 어머니가 밤새 함께 있어 주었다.
날이 밝아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오빠만 혼자 돌아왔다.
어머니와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지만,
이야기를 마치더니 식사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다그치니 "이제 끝났어"라는 말만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께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며칠 지나 언니와 함께 돌아온 아버지도 똑같은 모양새였는데
언니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언니 손 끝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손톱이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언니는 몽유병이 사라졌고, 일상이 돌아왔다.
아무도 그에 관해 설명해주지 않았고,
가끔 터널에 가서 확인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날 밤에 겪은 일이 너무 무서워서 다신 가보지 못 했다.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겔까.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섭지만 궁금해. 하지만 그게 떠오를 때마다 언니 비명소리가 함께 울려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