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대개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순위싸움이 걸린 경기거나 포스트시즌일수록, 경기 후반일수록, 그리고 주자가 나가있는 팽팽한 순간일수록 중요하다고. 대부분의 팬들은 이럴 때 들어서는 타자에게 한 방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럴 때 홈런이나 적시타로 타점을 기록해주는 선수일수록 인기가 높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타자를 ‘클러치 히터’ 라고 부른다. 유명한 클러치 히터로 KBO에서는 흔히 한대화, MLB에서는 데이빗 오티스 등이 꼽힌다.
2014년 한국시리즈 5차전, 삼성과 넥센의 맞대결이 2승 2패로 팽팽한 가운데 9회말 삼성은 마지막 끝내기 찬스를 맞았다. 타석에는 최형우가 있었고 2사 1,3루 상황. 마운드에 서 있던 넥센 투수 손승락은 8회말 삼성의 무사 만루 찬스를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잔뜩 기세가 오른 상태였다. 2B-2S에서 손승락이 몸쪽으로 던진 커터를 최형우가 쳐냈고 이는 라인선상을 따라 1루, 3루 주자를 홈인시키는 끝내기 안타로 연결됐다. 삼성은 이 날의 승리 이후 6차전까지 잡아내며 한국시리즈 4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최형우의 끝내기 안타 한 방이 2014시즌의 클러치 히팅이라고 할 만한 이유다.
물론 클러치 히터는 허상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보통 클러치 히터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득점권 타율과 타점을 드는데, 득점권 타율은 부족한 표본에서 나오는 이례적인 기록일 뿐이며 타점은 앞선 타순의 타자와 출루해있는 주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클러치 히팅을 논하기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2014년 정규시즌에 클러치 히팅을 보여준 타자로는 누가 있을까? 모든 상황을 감안할 수 없기 때문에 3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중, ‘득점권’ 을 기준으로 찬스에 강했던 혹은 약했던 타자를 나눠보기로 하겠다. 모든 기록은 KBReport.com을 참고하였다.
(사진 :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3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중 타율만으로 따지자면, 득점권에 가장 강했던 선수는 SK 와이번스의 주전 3루수 최정이었다. 최정은 득점권에서 타율 .432를 기록했는데, 이는 자신의 시즌 타율(.305)보다도 1할 이상 높다. 부상으로 시즌의 1/3 가까이를 날린 최정이 건재했더라면 작년 4강의 주인공이 SK가 될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이 외에도 삼성 나바로, LG 박용택, 넥센 서건창, NC 나성범 등이 높은 득점권 타율을 기록했다.
반면 가장 득점권에 약했던 선수는 롯데 자이언츠의 포수 강민호였다. 강민호는 홀로 1할대의 득점권 타율을 기록했는데, 범위를 100타석 이상으로 확대해봐도 강민호보다 득점권에 약한 타자는 한화 김회성(.167) KIA 차일목(.161) 두산 허경민(.143)만이 있을 뿐이다. 4년 75억이라는 거액의 FA 계약을 맺고 맞이한 첫 시즌의 성적 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팬들이 기대하는 타석에서의 강민호는 2008시즌(.292 19홈런 82타점) 내지는 2010시즌(.305 23홈런 72타점)의 모습일 것이다.
4년 67억원의 대형 FA 계약을 맺으며 한화로 이적했던 이용규 역시 득점권에서 아쉬운 타격을 보여줬으며, 2014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구단에 잔류한 SK 나주환 역시 주자만 있으면 힘을 못 쓰는 모습이었다. (시즌 타율 .273 / 득점권 타율 .209)
(사진 : 넥센 히어로즈, NC 다이노스)
그렇다면 득점권에서의 OPS는 어떤 타자가 좋았고 어떤 타자가 나빴을까? OPS로만 봤을 때, 득점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타자는 넥센의 강정호였다. 강정호는 OPS 1.343을 기록했으며, 16개의 타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다. 주자가 있을 때 강정호를 맞이했던 저번 시즌 투수들은 가히 사신(死神)을 맞이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NC 테임즈 역시 득점권 OPS 4위에 해당하는 좋은 성적을 냈으며, 12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강정호 다음으로 득점권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했다. 삼성의 나바로는 득점권 타율 2위(.407), 그리고 OPS 2위(1.310)를 차지했는데, 홈런 역시 11개를 기록했다. 놀라운 것은 득점권에서 가장 많은 볼넷(46)을 얻어낸 선수도, 가장 높은 볼넷 비율(27.2%)을 기록한 선수도 나바로라는 것이다. 나바로는 평상시에도 공을 잘 골랐지만(볼넷 96개, 리그 1위 / 볼넷 비율 16.0%, 리그 4위) 중요한 상황에서 그 집중력을 배로 발휘했다.
반면 득점권에서 가장 낮은 OPS를 기록한 선수는 NC 김태군이었다. 물론 김태군이 타격이 좋은 포수라고 볼 수는 없지만, 주자가 없을 때는 그럭저럭 잘 치다가도 득점권에 들어서면 방망이가 얼어붙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타율/OPS .262/.603, 득점권 타율/OPS .207/.483)
넥센 윤석민도 평상시 성적은 괜찮았으나 (시즌 타율/OPS .267/.730) 득점권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득점권 타율/OPS .244/.594) 공교롭게도 득점권 OPS가 뒤에서 3위인 윤석민이 올 시즌 대체해야 할 선수는 득점권 OPS 전체 1위인 강정호. 기존에 지적받던 부분은 주로 유격수 수비였지만, 어쩌면 올 시즌 타격에서도 강정호의 부재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주자가 있을 때 병살타가 나오면 그 아쉬움은 배가 된다. 2014시즌 득점권에서 가장 많은 병살타를 기록한 선수는 롯데 최준석과 NC 이호준이었는데, 나란히 9개를 쳤다. 다만 최준석의 경우엔 올해 득점권에서 더 높은 OPS를 기록했고 (시즌 .922 / 득점권 .987) 타점 공동 13위(90)에 해당하는 성적을 낸 만큼,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전술했듯이 득점권에서 가장 인내심이 좋았던 타자는 삼성 나바로였는데, 그 다음이 바로 최준석이었다. 최준석의 시즌 볼넷 비율은 17.8%(리그 1위)였는데, 득점권에서는 25.8%로 상승했다.
반면 강민호는 득점권에서 가장 높은 삼진 비율을 기록한 타자였으며 (30.0%) 강정호가 그 뒤를 이었다. (27.3%) 나란히 리그 1,2위의 득점권 삼진 비율을 보여준 타자지만 둘의 OPS는 8할 가까이 차이가 나니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2014시즌 넥센의 테이블세터진을 맡은 서건창과 이택근은 리그에서 가장 낮은 삼진비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둘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득점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건창 7.6% -> 6.5%, 이택근 8.2% -> 5.8%) 이 외에도 넥센 유한준(11.3% -> 6.8%)과 NC 손시헌(14.7% -> 7.5%) 등이 평소보다 더 중요한 집중력을 발휘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