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림자
나는 친척들에게, 그것도 아내와 처가 쪽에 비밀이 있다.
어째서 그때 장인어른이 나에게만 말해줬을까.
이미 1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도 알 수 없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날은 조카 생일이어서, 친척들 몇이 모여 생일 파티를 열었다.
나는 처남 부탁으로 파티를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약간 치매 끼가 있으셨던 장인어른도 함께 계셨다.
장인어른은 아내와 결혼할 때나, 딸이 태어났을 때 외에도
건강하실 때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신세진 분이다.
솔직히 술주정뱅이에 빚만 지고 사는 내 친아버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하시고
마음 깊이 존경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장인어른이 멍하게 초점 없는 눈을 뜨고 계신다.
지금까지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이후 내용 확인 차 비디오를 재생했는데
장인어른이 앉으신 의자 뒤에 작고 흰 그림자가 보였다.
그 후 처남 집으로 가서, 비디오를 보며 그걸 가리켰더니
"이거 엄마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생전의 장모님과 닮은 것도 같았다.
"아빠 생각나서 온 게 아닐까?
아빠도 이제 치매도 왔고 하니, 저 세상에서도 걱정되셨나보지"
그런 오컬트적인 것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이때는 왜인지 그랬구나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척도 만날 때마다 그 비디오를 보여줬다.
이상하게도 무서워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다들 이해가 간다는 듯 장인어른 부부의 정이 깊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다시 처가로 갈 때, 비디오를 장인어른께도 보여드리려고 가져갔다.
"이것 보세요, 아빠. 여기 엄마가 있어요.
아직 아빠가 걱정되시나 봐요"
아내가 작은 그림자를 가리키며 아버지 옆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나는 장인어르신의 초점 없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게 보였다.
아내도 그걸 보았는지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장인 어른께서 쓰러지셨다.
뇌출혈이었다.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었다고 했다.
그후 친척들 사이에서는
"장모님이 장인어른을 데려가려는 거 아닌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비디오를 보여줄 때 느낀 감동을 깎아내리는 것만 같아서 우리 부부는 화가 났지만
시기도 시기고, 상황도 상황인 만큼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인 어른을 문병 갔을 때,
거의 누운 채로 일어나지도 못 하게 되신데다
말도 제대로 못 하게 되신 모습을 본 나는 눈물을 삼키기 힘들었다.
그렇게나 상냥하시고 강인하시던 장인 어른...
지금은 병색이 완연하여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문득 장인 어른이 TV를 가리키시는 게 보였다.
TV를 보고 싶으신가 보다 생각한 나는 TV를 켜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장인 어른은 날 보고 계셨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신 걸까?
그래서 나는 왠지 그 비디오와 관련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장인 어른의 쉰 목소리를 듣고, 확신했다.
조금 지나, 장인 어른께서 돌아가셨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었다.
아니나 다를까, 친척들 사이에서는 "장모님이 데려가셨다"고 말이 돌았다.
아내 친척들 사이에선 차라리 그런 이야기가 도는 게 나을 것 같다.
이 이상 장인어른 부부 사이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병실에서 장인 어른이 나에게만 해주신 그 말은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했는데, 벌써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저건 할멈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