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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잠에서 깼다.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꿈을 꿀 때면 난 설레는 마음 때문에 감정이 요동쳐서 수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잠에서 깨거나, 꿈에 휩쓸려서 자아를 잃곤 했다. 이번에는 전자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되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고 그녀를 다시 본 이후부터 꾸기 시작한 것이니 기간은 꽤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 사이 이런 꿈을 대충 예닐곱 번 정도 꾼 것 같으니 대략 일 주일에 한 두 번 꼴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원래 자각몽을 잘 꾸는 체질이긴 했다. 아니 체질이라는 말은 조금 부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때때로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내가 원할 때 자각몽을 꿀 수 있다. 그 어떤 조건이란 가위에 눌리는 것이다.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남들보다 자주 가위에 눌리곤 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억지로 가위를 풀고 잤지만 대체로 가위에 눌리는 날이란 평소보다 피곤한 날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위에 눌린 상태로 그냥 잠을 자게 되었다. 가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은 가위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가위는 몸은 잠들었는데 뇌는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가만히 있으면 곧 뇌도 잠에 들게 된다. 가위에 눌린 상태로 가만히 있어도 공포를 집어먹지만 않으면 특별히 무서운 현상을 겪지도 않는다. 대체로 평화롭게 잠들게 되지만 때때로 귀찮은 현상을 겪기도 한다. 꿈과 현실의 중간 단계라고 해야 할까, 철판을 긁는 듯한 찢어지는 소리가 나거나 누군가 중얼중얼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좀 불쾌한 경우에는 방 안에 귀신 같은 게 나타나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깨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자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 그 상태에서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자아를 유지한 상태에서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계기는 아주 우연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가위에 눌리는 것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고 그 날 마침 가위에 눌려서, 다음 날 화제거리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에 가위에 눌린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려고 한 것이다. 마치 내가 제 3자가 된 것처럼 내 상태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가위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잠에서 깬 것도 아니었다. 현실과 꿈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분명 난 내 방 안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 있었지만 난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눈을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뜨려고 한 순간 눈을 뜸과 동시에 잠에서도 깼다.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특별히 맘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주변에는 가위를 자주 눌리기는커녕 한 번도 안 눌려본 사람도 많고, 눌려 본 사람들 중에도 나처럼 자주 눌리는 사람은 없다. 이 분야에 있어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르다, 그런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놀랍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명하기 귀찮은 마음도 있어서 남들에게 이런 경험을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이후로 때때로 가위에 눌릴 때면 (너무 피곤할 때를 제외하고) 그 상태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상태가 자각몽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이후에 나는 자각몽을 꾸면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대체로 내 방 안을 기어 다녔다. 물론 굳이 자각몽을 꾸지 않아도 눈을 감고 내 방 안을 기어 다니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비록 시야는 없어도 내 상상이 그대로 현실이 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내 방 안이 무척 넓다고, 거의 무한대로 넓다고 상상하면 나는 벽을 만나지 않고 계속 기어 다닐 수 있었다. 물론 기어 다니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더욱 흥미로웠겠지만 어쨌든 계속 자각몽을 시도할 만큼의 흥미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에 (그러니까 앞을 봐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을 때에) 시야가 짧게 형성되기도 했다. 요점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생각은 (꿈 속의) 현실이 된다. 내가 앞을 볼 수 있다고 당연하게 여기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자각몽을 꿨을 때 앞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한 상태로 오랫동안 여겨졌기 때문에 앞을 보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굉장히 짧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것은 내 몇 년 동안의 경험을 압축한 것이다. 내가 가위에 자주 눌리는 체질이라고 해도 매일같이 가위에 눌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대체로 가위에 눌리는 날은 피곤한 날이다. 가위가 왔다고 무조건 자각몽을 시도하진 않는다.
아무튼 여러 연습을 거친 이후로 자각몽을 꾸는 것은 나만의 비일상적이자 비밀스러운 오락거리가 되었다. 상상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고, 사진으로만 봤던 외국의 해변을 거닐 수도 있다. 충분히 연습만 한다면 음식을 먹거나 해서 맛을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어떤 맛인 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요컨대 상상력만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면 그 공간-그 세계?-에서 못 할 것은 없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충격적인 사고를 겪거나 감정적으로 요동쳐지는 상황을 겪으면 잠에서 깬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날다가 ‘어떻게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겠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순간 추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지면과 충돌하는 순간 잠에서 깨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꿈에 서서히 잡아 먹혀 자아를 잃고 평범하게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난 점점 자각몽을 멀리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나이를 먹으면서 가위에 눌리는 횟수가 눈에 띠게 줄어들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각몽을 꾸고 잔 다음 날은 충분히 피로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짧은 수면시간 안에 충분히 휴식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수험 생활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자각몽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웬만한 것은 다 해봤기 때문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점도 내가 자각몽을 멀리 하게 된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각몽을 멀리한 채 고된 수험 생활을 견디고 난 대학생이 되었다. 수능이 끝난 이후로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1학년 1학기 중간에 한 봉사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한 달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때때로 자각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로잡혔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존의 자각몽처럼 내가 유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는 자각몽이라면 그냥 평범한 꿈 아니냐 싶겠지만, 그냥 꿈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꿈이라고 알아차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꿈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초원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전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기억을 되뇌었을 정도였다.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범하게 침대에 누웠던 기억을 떠올린 이후에는 패닉 상태가 찾아올 뻔 했다. 원룸 침대에서 잠이 들고 초원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그 상태에서 정말 심각한 공포가 찾아왔다면 잠에서 깨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던 것은 여름이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와 나는 동아리 내에서도 얼굴만 알고, 때때로 학교 안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나 나누는 사이이다. 여름과 나는 똑같이 신입생이지만, 그녀는 여자고 나는 남자라는 결정적인 차이 때문에 그녀는 선배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반면 나는 신입회원 3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와 나는 인간으로서의 매력부터가 차이가 난다.
그녀는 전형적인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톤에 항상 미소를 띤 듯한 인상이라서 신비로운 매력을 풍긴다. 여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산뜻한 단발머리에, 웃을 때마다 얼굴 앞 쪽으로 광대가 도드라지고 쌍꺼풀 없는 눈이 가늘어져서 미소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녀의 발랄한 말투와 활기찬 분위기 때문에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 힘을 받아 쾌활해진다.
반면 나는 말수도 적고 낯도 가리는 편이라서, 여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아직 많이 친해지지 못했다. 항상 모임의 중심이 되는 그녀와 항상 변두리로 밀려나는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란 명왕성이 태양과 만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 이상한 자각몽을 처음으로 꾼 날, 초원 위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꿈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된 건 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 옷이 아니야. 소름 끼치지?”
하긴 그녀는 평소에 티셔츠에 청바지와 같은 캐주얼한 스타일을 선호했다. 이렇게 여성스러운 옷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는데 평상시 입고 다니는 평범한 지오다노 스타일의 옷이긴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갖고 있는 옷은 아니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의논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나 핸드폰도 없고 주변에는 인가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다. 전신주 같은 것 조차 안 보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분위기를 바꿀 겸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단 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 거 같아.”
다행히 그녀는 이런 상황에 무슨 헛소리냐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같은 동아리인데도 별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네. 그렇게 인원이 많은 동아리도 아닌데.”
“술자리나 모임에 같이 참석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같은 테이블이 앉거나 가까이서 볼 일이 없었던 거 같아. 아무래도 선배들과 신입생들을 섞어서 앉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넌 인기인이라서 늘 사람들한테 둘러 쌓여 있고 난 늘 변두리로 밀려나다 보니 그런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비참해질 뿐이다.
그녀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처음 만난 사이인 것처럼 서로에 대해 묻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실 이름과 얼굴, 나이 말고는 전혀 모르는 사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놓여. 너가 없었더라면 나,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렸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그렇지 않다니?”
그녀는 엄지와 검지를 턱에 대고 귀여운 브이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굉장히 침착해 보여.”
“그렇지 않아. 나도 여름이 네가 보이기 전까지는 거의 패닉이 올 뻔 했었어. 그 전에 우선 내가 어젯밤에 술을 마셨나 고민부터 했지만.”
여름이 킥킥대며 웃었다.
“주사가 안 좋은 모양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을 넘겼다. 여름은 의자 앞 쪽으로 엉덩이를 쭉 빼더니 등받이에 등을 한껏 기대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그 팔을 배에 얹고 굉장히 편안한 자세에서 내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굉장히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로 보여. 뭐랄까, 그 기분이 느껴져.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이 전해져서 나까지 안정이 되는 기분이야. 정말 다행이야.”
실제로 난 꽤 침착한 상태였다. 오히려 그녀와 단 둘이 이야기하는 상황이 설레서 좀 흥분하면 흥분했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원래 침착하고 냉정을 잘 유지하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걱정하고 불안해할 상황도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불안해 하고 걱정해도 별 의미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터무니 없는 경험을 하면 공포스럽고 미스터리하게 여겨지지만 막상 진상을 알고 나면 허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족한 정보와 한정된 선택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면 그만이다.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고 있으면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나 대처를 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신념은 조금 슬픈 방식으로 지지되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난 잠에서 깼고, 그 모든 것이 현실감 넘치는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역시 미스터리의 진상을 알고 나면 허무한 법이다.
그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씩 그 꿈에 사로잡혔다. 첫 번째 꿈을 제외하고는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자각몽이었다. 굉장히 현실감이 넘친다는 것만 제외하면 평범한 자각몽에 불과했다. 여름과의 대화가 그렇게 매끄럽게 잘 흘러간 것도 결국 내가 나 자신과 대화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딱지 덮인 상처를 긁는 것처럼, 아픈 이를 꾹 누르는 것처럼 그 꿈을 즐겼다. 꿈 속에서 그녀를 만나서 마치 그녀가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체득한 자각몽 기술들도 적절히 발휘했다. 그녀는 정말 신기한 것처럼 반응해주었고 나는 내 학창시절에 자각몽을 꾸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환상에 질리고 그 모든 것이 비참한 연극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면 잠에서 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이번에도 그 자각몽을 꾸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꿈 속의 그녀가 현실 속의 그녀와 구체적인 만남을 시사했다. 그 동안 그런 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이 모든 것이 결국 꿈에 불과하다는 내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꿈 속의 여름이 그렇게 말한 것은 꿈 속의 만남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 내가 실제로 그녀와 만남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인 걸까?
이유야 어쨌건 이 모든 장난질을 그만둘 때가 온 것 같다. 자각몽을 최대한 피하고, 만약 이 꿈이 계속된다면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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