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건다. 재빨리 하면 괜찮을거야...!)(3번 9표 만장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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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키는 분명히 꽂혀있다. 이대로 돌리기만 하면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겠지. 그러나 반쯤 열린 창문 옆에 살인마가 있다는게 문제다. 이제는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고개도 돌리지 않고 경쾌하게 말하고 있다. 누가 보면 살갑게 대화하는 연인관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극히 달콤하고 다정한 말투와 달리 반달모양으로 휜 웃는 눈은 계속해서 내 눈만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그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사실 그쪽같이 운동계 여자는 죽여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어제 딱 당신을 아주 먼 곳에서 발견한 거에요. 진짜 사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참 먼 곳이었는데 식당에 앉아있는 당신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훤히 보이더라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좀비사태가 탁 터지는데 그때 깨달았죠. 아, 운명이구나. 이 여자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번제물이구나. 크으... 낭만적이지 않아요?"
무저갱같은 깊고 검은 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검어서 홍채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반사광도 없이 어두운 차 내부를 보는 시꺼먼 눈은 흑요석 같았다. 몇년 전이었나,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소홀해 졌을때. 평소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문제였지만 나는 생리 주간이었고 유달리 우울했던 때였고 독립문제로 부모님과 싸웠을때였고 직장문제로 어려웠던 때였다. 어찌어찌 견뎌내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가 떠나가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균형이 깨져 단숨에 죽어버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참 현실성 없는 계획이었지. 뱃속에 아주 뜨겁고 진득한 늪이 하나 들어앉은 듯한 와중에도 나는 홀린듯이 귀금속 상에 들어갔고 생전 처음보는 귀금속들의 향연에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희고 노랗고 분홍빛으로 빛나는 드높은 채도의 난반사 사이에서 그 검은 보석만이 유일하게 내게 편안한 안식이었다.
결국 반지는 사지 못했다. 한번도 그런류의 악세사리를 사 본적이 없었던 나는 현실성없는 가격에 놀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장을 지나쳐 오면서 지갑에 있던 사만원으로 모조리 먹을 것을 샀다. 여름볕에 땀이 조금 났고 아랫배는 어느때보다 아팠지만 다 먹어치우는데에는 반나절도 안걸렸다. 이것도 고작해야 그런 정도의 일이리라.
"좆까. X발새끼야."
A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벌린채 나를 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들은 사람처럼 생경한 낯설음이 눈에 맺혀있다가 녹아 흐르는 듯 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데에는 삼초도 필요 없었다.
"이런 개같은...!"
그가 평정을 잃은 순간 나는 거세게 시동을 걸었다. 털털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기어를 돌리려는 바로 그때, A가 발광을 시작했다. 한쪽손에 쥐고 있던 것은 역시나 칼이었다. 오른쪽 손에 쥐고 있던 목공칼이 순식간에 창문 틈새로 파고들어 내 관자놀이로 치달았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올린다. 창문 폐쇄를 눌렀지만 지나치게 친절한 현대문명의 이기는 창문에 뭔가 걸려있다며 닫히기를 거부했다. A의 공격이 재개됬다.
이대로는 그저 창문 안쪽에서 죽을 뿐이야...!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차키를 돌려 뺐다. 시동이 꺼지며 차가 진동을 멈췄고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A의 공격이 느슨해졌다. 나는 재빨리 문 잠금잠치를 해제하고 슬쩍 열린 문을 오른다리로 힘껏 걷어찼다. 충격을 못이기고 나도 나동그라질뻔 했다.
"카악!!!"
왼쪽 팔을 차 창문턱에 괴고는 오른손의 칼로 나를 공격하던 A는 당연히 그 충격에 못이겨 나동그라졌다. 지금 뿐이야! 나는 뽑은 차키를 오른쪽 주먹에 안쪽에 쥐었다. 뾰족한 열쇠부분이 엄지손가락 밖으로 튀어나온 채였다. 바닥에서 버둥거리던 A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세우고 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왼쪽손으로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리고 격분한 그가 날 향해 칼을 휘두르려고 오른팔을 뒤로 당긴 그때를 노려 오른쪽 손에 꼭 쥔 열쇠로 전력을 다해 그의 목을 찔렀다. 근 오년 넘게 암벽을 쥐어온 손이다. 악력만큼은 성인 남자보다 낫고 근력도 어지간하다고 자부한다. 꽤 빠른 속도로 목젖 바로 오른쪽에 열쇠가 빨려들어갔다.
내 열쇠는 끄트머리가 뾰족한 류였다. 뭉뚝한 종류였다면 이런 일도 못했겠지. 아무 의미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마 A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열쇠와 목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가지가 거짓말처럼 매끄럽게 이어져 있다. 팝아트 처럼 새빨간 피가 은색 열쇠사이로 흘러나오고 검은 손잡이에도 튀기 시작한다. 채색되기 시작한다고 표현해야 할까. 영화에서처럼 피가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일이 없는 것은 아직 꽂혀있는 열쇠 때문일까.
"커윽... 이 썅...!"
A는 눈에 힘을 주곤 왼쪽손으로 목을 틀어쥐고 목공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본능처럼 휘두르고는 있지만 별 힘은 없어보인다. 기회를 보다가 다시 한번 오른다리로 그를 밀어 차자 칼도 놓친 채 힘없이 바닥을 구른다. 나는 그가 떨어트린 목공칼을 쥔채 다시 트렁크를 열어 아까 실어둔 짐을 꺼낸다. A가 아직 엎어져있는 사이 달아나야 한다.
"...이런 씨x년이이이이!!!!!"
전혀 낯선 목소리. 차쪽을 보자 목을 틀어쥔 A가 마치 좀비 처럼 달려오고 있다. 손을 목에 감고있으니 균형이 무너지는지 어떻게 달리나 싶을만큼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나도 트렁크 문따위 열어두고는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등반화의 강력한 마찰력에 전력을 다한 도주가 폭발적인 속도를 낸다. 캐주얼 구두를 신고있는 데다 출혈로 제정신을 잃은 A 따위가 쫒아올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간간히 뒤를 돌아봐도 A는 점차로 멀어질 뿐이다. 조금 때가타긴 했지만 순백색이던 셔츠에 점점 피가 번져간다. 이제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뒤에서 큰소리로 욕설들이 날아왔다. 평생 들어본 욕 중에 가장 상쾌한 욕설이군. 나는 한참이나 거리가 벌어진데다 소리때문에 좀비가 주변에 몰려드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새 나를 놓친 듯 황망한 얼굴로 허공을 돌아보고 있다.
"야!!"
비교적 큰 소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좀비들은 들었나보다. 그의 쪽에 모여있던 좀비들이 내게도 슬슬 다가오기 시작한다. 달려오지 않는걸 다행이랄지. 그리고 A도 나를 발견한 듯이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다. 표정이 일그러져있다. 달릴 기력도 없는 것 같다. 지친 듯 헐떡거리고만 있다. 나는 중지를 세워 팔을 높게 치켜세웠다. 양손 다. A가 비명처럼 소리를 마구 질렀다. 그래, 소리나 질러라. 나는 가련다.
아마도 저 출혈이면 운동량을 상당히 제한하겠지. 의식도 꽤 날아갔을 것이다. 소리를 그토록 질러댄 까닭에 주변에 좀비가 득시글거리니 어떤의미로 이건 살인이다. 그러나 어제 좀비를 죽였던 것처럼, 아주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내가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고작 하룻밤이지만 함께 행동한 인격체를 죽여놓고 상쾌함을 느낀다니. 사회가 유지 될 시점이었다면 분명 살인죄로 잡혔을 거다.
"아무렴 어때."
그래, 젠장. 아무렴 어때. 세상이 이상해졌다는 걸로 책임을 미룰 생각은 없다. 나는 사람을 죽였고, 그 사람은 나를 죽이려던 사람이다. 그는 좀비사태 이전에 나를 노리고 왔다. 이 복잡하고 기이한 관계는 그의 말마따나 운명같기도 했다. 거지같은 운명이었다.
한참이나 더 뛰어가다가 천천히 걸음을 늦추고 몸을 점검했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하기사 그만한 걸 걷어차고서 멀쩡할리가 없지. 등반하기 전처럼 몸의 근육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확인했다. 조금 놀란 감은 있지만 몇년을 단련해온 몸뚱이는 이 정도 운동량에는 굳지도 않았다. 나를 차준 전 남자친구에게 감사한 기분마저 들었다.
가방을 제대로 다시 묶고나자 그제야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번화가였다. 몇몇 가게들도 있지만 좀비들이 지나가진 않았는지 의외로 멀쩡했다. 문이 열려있는 곳에서 물건을 좀 챙겨갈까...괜스레 캥기는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계획을 세워본다. 분명 죽을만한 상황이지만, 나는 왠지 그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운명의 인도겠지. 아마 가게를 전부 훑을 시간은 없을 거다. 어디를 뒤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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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품 : 의류 세벌, 양말 네켤레, 챙겨나온 식료품 1인기준 5일치+@, 설탕/소금 1kg, 후추 새 것 한통, 각종 생활용품 약간.
1. 다이소로 간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물건이 캐치프레이즈지. 분명 쓸만한 물건 여러개를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코펠이라도.
2. 약국을 뒤져본다. 집에 비상약통이라도 들고올 걸... 확실히 약품류는 지금 챙겨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소독약도, 진통제도 필요할 거야.
3. 수퍼마켓으로 들어간다. 뭐니뭐니해도 식량 아니겠나. 라면과 통조림 몇가지로는 안심하기 힘들다. 아직 야채나 과일이 멀쩡할 때 그런것도 좀 챙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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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맘같아선 J에게 A의 관자놀이를 플라잉 니킥으로 작살내게 하고 싶었지만 그런건 일반인에겐 무리죠...
더 찐한 전투신은 나중을 위해 아껴두고 지금은 그냥저냥 넘어갔어요. 한동안은 J만 표현해도 되겠네요.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