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중심제 국가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
할아버지, 아버지, 미시마 유키오 본인에 이르기까지 3대가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그러나 문학에 더욱 심취하여, 당시 일본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평을 받고 <가면의 고백>으로 등단했다.
이후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소설과 극복 외에도 방송,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여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30대의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
그의 행보는 헬스 전후로 바뀌게 되는데...
병약했던 몸을 가졌으나 헬스를 한 이후로 자신감과 함께 꼴통 극우파로 변모.
이후 극우 집단인 방패회를 결성하고 멤버 4명과 함께 차위대로 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원들을 강당에 모으라고 협박한다.
요구에 의해 자위대원들이 모이자 천황제를 부활시키고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선동했지만 욕만 먹는다.
이후, 계획한 대로 할복으로 자살을 결심한 미시마는 웃통을 벗고 자신의 배에 단도를 찔러 넣었다.
원래는 할복을 하고 배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로 유서를 쓸 작정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서 글씨를 쓰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고 한다.(...)
미시마는 생전 이 '할복'을 아름다운 행위로 극찬을 했는데, 실제로 해보고 나니 무지무지하게 아파서 칼을 푹 찌르기만 했는데도 지랄발광을 했다고.
그리고 목을 치기로 되어있던 모리타 마사가쓰도 자신도 할복해야 해서 떨었던 모양인지, 미시마의 목을 내리치는데 여러번 실패했다.(...)
결국 검도 유단자였던 코우가 히로야스가 미시마의 목을 내리쳤다.
후에 경시청 검시 결과에 따르면 미시마는 칼로 배를 가른 뒤 내장을 꺼내고 이 고통을 이기려고 혀를 깨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훗날 유서를 통해 미시마가 자결할 때 쓴 칼이 한때 지인이었던 참전용사 후나사카 히로시에게 전달되었는데...
후나사카 히로시 曰
"한심한 새끼, 차라리 이 칼로 야쿠자나 베지 그래? 뭣하러 자살을 하냐?"라는 말과 함께 칼의 이름을 '자살밖에 못하는 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와~ 굉장해 날이 엄청나~ 이걸로 찌르면 아플지도 몰라 ─ 당연하지 ㅄ아)
하도 병신력이 강한 사건이라 이런 만화도 만들어졌다.
이후 김지하 시인이 1971년에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 외신을 접하고 이를 풍자하기 위해 쓴 시 <아주까리 신풍>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