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보지 못 하다
몇 년 전 여름, 제가 고등학생일 때 일입니다.
그날은 매우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된 무렵이라,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낮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일어난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반 정도는 깨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영적인 체험 같은 걸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당시에 가위 눌림은 종종 경험한 지라 그리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위에 눌리다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에어컨을 틀어두었기 때문에 이불을 쓰고 있었는데
그 이불이 슥.. 슥..하고 천천히 침대 아래로 떨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이불을 제대로 덮지 않아서 떨어지는 거면
처음엔 천천히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이불이 무거워서 한 번에 떨어지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정말 천천히 천천히 떨어지는 겁니다.
침대 옆에서 누가 이불을 들춰서 천천히 당기고 있어!
그렇게 여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위험하다는 생각과 너무 무서워서 눈도 뜰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몸도 꼼짝하지 않았고요.
풀썩하고 이불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침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곁에 누군가가 서 있는 느낌이 났습니다. 그리고...
"으...으..."
정말 이때는 쫄았습니다. 귓가에서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절대로 눈을 뜨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위가 풀리고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살짝 눈을 뜨고 방 안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이불은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에어컨을 켜뒀는데도 땀이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더 이상 방에 있기 싫어서 재빨리 옷을 갈아 입고
동네에서 식당을 하시는 부모님 가게로 갔습니다.
좀전에 일어난 일을 말씀 드려봤자
어차피 안 믿어주실 건 뻔해서, 그냥 밥만 먹고 나왔습니다.
그 후 동네 친구 집으로 가서 친구에게도 말했습니다.
친구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절 배려해서인지
밤늦게까지 노래방, 볼링장 여기저기 같이 어울려서 다녀줬습니다.
제 기분도 상당히 좋아져서 집에 돌아갈 때는 공포심이 어느 정도 옅어졌습니다.
씻고 방으로 가니, 아무래도 낮에 있었던 일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기 싫어서 그냥 자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 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하다보니 잠이 와서 이제 곧 잠들겠다 싶던 그 때
낮처럼 가위에 눌렸습니다.
콩콩콩콩콩! 콩콩콩콩콩! 콩콩콩!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콩콩콩콩콩! 콩콩콩콩콩! 콩콩콩!
소리가 멎지 않았습니다. 제 오른쪽 벽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콩콩콩콩콩! 콩콩콩콩콩! 콩콩콩!
누가 벽을 치고 있어! 그런 느낌의 소리가 났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부모님을 부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척은 나지 않았지만 이때 제가 느낀 공포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정신을 차리니 날이 밝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나 봅니다.
신기하게도 좀 전에 벌어진 일처럼 기억이 또렷했습니다.
1층으로 내려가 부모님께 "어제 내 방 있는 벽 두드렸어요?"하고 여쭤봤더니
"그런 짓을 왜 하냐
그보다 뒷집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나중에 인사하러 갈 거니까 너도 준비하렴"
저는 부모님께 어제 낮부터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별 일이 다 있구나"라고 말씀하신 게 전부였습니다.
태도가 묘해서 "무슨 일 있어요?"라고 계속 여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안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친구랑 부모님 이렇게 넷이서 밥을 먹을 때
"나 이런 경험 했었지"하며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우리 집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이사왔습니다.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원래 있던 집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이사오기 전에는 그 집에 가족 넷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족은 우애 좋은 형제가 있었는데,
뒷집 할아버지가 종종 놀아주곤 하셨다고 합니다.
뒷집 할아버지도 손주가 없어서 진짜 손주처럼 여기고 귀여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되었고,
할아버지와 형제 모두 꽤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후 이 집은 1년 정도 빈집이었는데,
우리가 이사할 무렵 할아버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뒷집 사람과는 인사는 나눴지만 할아버지는 뵌 적이 없습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그 아이들을 보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당시 느낀 공포는 잊지 못 하겠지만, 조금 따뜻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