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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루이 드 생 제르맹 백작(Claude Louis Comte de Saint-Germain)
희대의 사기꾼 혹은, 희대의 마법사이자 연금술사.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목격담과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 이름
생제르맹 스스로가 밝힌 이름들은 대충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은데요
라츠코치 공
생 마르탱 백작
알리에 후작
쉬르몽의 영주
웰던 후작(밀라노에서 사용)
몬페라토 후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아이마르와 벨마르의 후작
벨라마르 백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솔티코프 백작(제노바에서 사용)
쇠닝 기사(피사에서 사용)
차로지 백작(슈벨바흐에서 사용) 등...
이에 대해, 그 스스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이름은 가명이지만, 내가 생 제르맹을 자칭하는 한, 나는 어디까지나 생 제르맹이야."
2. 출신
2-1. 일화
출신 또한 알 수 없었는데, 이런저런 설들이 있지만 특이한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백작은 1723년에 드 장리스 백작부인과 만나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모친의 초상화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작은 그림 속의 여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백작부인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의상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체 이 의상은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건가요?"
백작은 그냥 미소만 지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2-2. 전설
생제르맹 백작의 출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에 기반한 추측이 있습니다.
'방랑하는 유대인' 전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는 카타필루스(Cartaphilus)라는 유대인 문지기가 있었는데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가 잠시 쉬려고 멈춰섰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타필루스는 예수를 모욕하며 빨리 가라고 재촉했습니다.
예수는 그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대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카타필루스는 그 일에 대해서 곧 잊어버렸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늙어 죽어가는데도 혼자만 나이를 먹지 않자
예수가 한 말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는 결국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방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전설은 십자군 전쟁 때 부터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13세기경부터,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카타필루스라는 유대인과 만났다는 보고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카타필루스 목격담은 초기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점점 중동과 동로마제국을 지나며 유럽쪽으로 가까워졌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3. 외모
드 오세 부인(Madame de Hausset)이 그의 모습을 묘사한 바에 따르면 생제르맹 백작은
'섬세하고도 재치있는 태도를 가졌으며, 매우 단순하지만 고상하게 차려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눈은 크고 갈색, 머리는 까만 밤색이고 치렁치렁하며, 신장은 170센티 전후, 얼굴이 긴 편으로
곧게 뻗은 콧등은 고귀한 인상을 주었다고 하며 오른쪽 관자놀이에 희미한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있고
목소리는 맑고 명쾌했다고 하며
아무리 높은 사람을 만나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식의 화법을 사용했다 합니다.
그는 아담하고 날씬한 체구와, 온화하고 우아한 몸가짐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를 지을 줄 알았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데마르 백작부인이 "태어나서 이제까지 그처럼 멋진 눈동자는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4. 연금술 및 기타 재능들에 관하여
생제르맹 백작은 곧 불로불사에, 마음대로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각국의 왕이나 고위 귀족들도 그에게 흥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프랑스의 루이 15세, 볼테르나 장 자크 루소와의 친분도 있었는데
프랑스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왕의 보석들을 흠집을 제거한 적도 있고
왕비와 귀부인들에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들을 쉽게 선물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악기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본 사람들은 그를 니콜로 파가니니와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그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열정적인 박수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가 남긴 악보 중 두 개는 1745년, 1760년이라는 일자가 기입된 채로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회화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어서 그 스스로도 뛰어난 그림들을 지인들에게 선물한 바 있고
미술 평론이나 감정을 행한 기록들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시에 대해서는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고 하는데
그저 그런 시들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낸 운율도 안 맞는 몇몇 시편들
그리고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한 희곡 등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했습니다.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완벽한 악센트로 말할 수 있었다고 하며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도 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가 연금술을 안다는 소문은 그의 재력 때문이었는데
유럽 어느 은행과도 거래를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가치의 돈이나 보석들을 마구 쓰고 다녔습니다
프랑스의 세무 관리들은 그가 어디선가 돈을 송금받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사했으나
몇년에 걸쳐 감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들어온 송금은 일체 없었다고 하지요.
카사노바의 회상록에 따르면, 생제르맹이 은화를 금으로 바꾸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준 적이 있다고도 합니다.
5. 불노불사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1651년부터 1896년까지 무려 245년 동안
유럽 각국에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1710년부터 1822년 사이에는 각국의 외교 문서 등의
공식적인 문서들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1755년, 제르지 백작부인은 퐁파두르 부인의 살롱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가
생제르맹과 만나게 되는데, 그를 보자마자 45년 전 자신이 베네치아에 대사로 있을 때 만난
정체불명의 귀족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나 동일인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부인은
백작에게 혹시 50년 전 그의 아버지가 베네치아에 있지 않았냐고 물어보았죠.
"아닙니다, 부인. 하지만 제 자신이 지난 세기 말부터 이번 세기 초에 걸쳐서
베네치아에 살았던 적은 있지요. 당시 저는 부인에게 구애하는 영광을 누렸고
부인께서는 제가 작곡한 변변찮은 바카롤(Barcarolle; 뱃노래)을 즐겁게 들어주셨답니다."
그에 이어 백작은 부인이 젊었을 때 대단히 아름다웠고
자신도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해 주는 것을 즐겼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백작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의 백 살은 넘는다는 말이군요."
생제르맹 백작이 대답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
실제로 백작은 어느 회화에서 예수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얘기를 하듯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에 관련된 기묘한 일화를 털어놓은 뒤에, 백작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그답지 않게
우울하고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소."
또한 케사르, 클레오파트라, 마르코 폴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8세 같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마치 허물없는 친구처럼 얘기하기도 했는데요
역사가들이 그의 발목을 잡기 위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역사적 사실들을 질문할 때마다 백작은 언제나 놀랄 만큼 정확한 답을 짚어냈고
상대방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도 합니다.
어느 날 저녁, 백작은 수 세기 전에 벌어진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중에
자기의 집사를 돌아보고 자기가 혹시 뭔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백작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모신지 5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깜빡하신 모양이군요. 거기 있던 사람은 제 전임자였을 겁니다."
그 밖에도 어느 날, 사자왕 리처드에 대해서 자기의 하인에게 물어보자
그 하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주인님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겨우 5백년밖에 안 됩니다."
...
1745년에 영국에서 백작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됩니다.
영국의 첫번째 수상인 로버트 월폴 경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며칠 전에 생 제르맹 백작이라고 자칭하는 수상한 남자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네.
그는 여기서 2년 동안이나 머물렀지만 자기가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고, 다만 자기의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것만 밝혔다네.
그는 노래도 잘 부르고 바이올린도 거의 예술급으로 켜지만
어리석은 기벽(奇癖)을 지닌데다 분별이 없는 편이라네.'
하지만 그를 스파이라고 단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어 곧 석방되었습니다.
...
1748년,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 제르맹 백작은 결코 태어난 적도 없고, 절대 죽지도 않으며,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남자입니다."
...
1760년, 루이 15세는 외무장관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정책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네덜란드를 회담 장소로 삼아 장관 몰래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려 했는데
생제르맹이 교섭 임무를 띠고 브룬스윅의 루이 공과 함께 헤이그로 파견되었습니다.
...
1769년, 베네치아에 나타난 백작은 그곳에서 인조 비단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을 세웠고
이 시기 동안에 그는 고대 그리스의 예술적 전통을 훌륭하게 계승한 조각상들을 만들었습니다.
...
1774년, 생 제르맹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면담을 요청했고
왕비의 시녀였던 다데마르 백작부인은 이 면담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왕비는 그를 만나자마자 앞으로 파리에 정착할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떠났다가 여기 다시 돌아오려면 아마 1세기는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비를 상대로 15년 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 예언합니다.
"현명하신 왕비님께서는 제가 지금부터 들려드리는 사실들에 대해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는 권력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이란 것은
오직 성직자들의 전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지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그들은 왕정을 뒤엎을 것입니다.
백과전서파는 그 뒤에 내세울 허수아비를 찾으려고 귀족들을 눈여겨보던 중에
샤르트르 공작(Duc de Chartres)을 주목합니다.
공작은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그들에게 버림받게 될 겁니다.
그의 마지막 자리는 왕좌가 아니라 교수대가 되겠지요.
법이 선한 이들을 보호하고 악한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얼마 못가서 끝장날 겁니다.
악인들은 피로 물든 손으로 권력을 움켜쥘 것입니다.
그들은 카톨릭은 물론이고 귀족제와 관료들까지도 모두 몰아낼 것입니다."
왕비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건 왕실 뿐이라는 거군요."
백작은 가차없이 대답합니다.
"왕실조차도 사라집니다.
오직 피투성이의 공화국만이 남아서
사형집행인의 칼날을 왕홀(王笏) 대신 휘두르게 될 것입니다."
...
1789년 7월 14일에 마리 앙투아네트 앞으로 백작의 편지가 전달되어 왔다.
"제가 전하께 말씀드린 것들은 모두 허사가 되었고 결국 전하께서는
제가 경고했던 시기에 다다르셨군요.
폴리냑 가문과 그 친구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운명입니다.
다르투아 백작(Comte d'Artois) 또한 파멸할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이를 무시했고, 수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
1784년 2월 27일 생제르맹 백작은 죽어, 그해 3월 2일 엑켄포르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생제르맹 목격감은 계속됩니다.
프리메이슨 공식 기록상으로 그는 1785년 프리메이슨 프랑스 지부에서는 생제르맹을 대표로 선출했고
1785년, 생제르맹은 러시아에 출현하여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영접을 받았고
1790년, 생 제르맹은 오스트리아인 친구 프란츠 그래퍼와 만났으며
1793년, 다데마르 백작 부인과 재회합니다.
다데마르 백작 부인은 생제르맹과의 만남에 대해서
생제르맹의 얼굴은 30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하며
그의 말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비하면 저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시시할 정도라오.
하지만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 손은 나보다 훨씬 강대한 어떤 존재에 의해 속박되어 있거든요.
살다 보면 한 반짝 물러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고, 때로는 누군가가
판결을 내리자마자 곧바로 집행되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이제 평온의 시기는 지나가고 준엄한 섭리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오."
"지금 프랑스인들은 모두 어린애들처럼 직함과 훈장과 리본을 갖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소. 그들은 아무리 중요한 것조차도 애들 장난처럼 여기고 있죠.
오늘 보니까 적어도 4천만은 죽어나갔던데,
앞으로 혁명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에 비하면 그건 사소한 편이라오.
어설픈 박애주의자와 입만 살아있는 웅변가들의 독재 하에
나라의 빚은 수억 프랑에 이르게 될 겁니다."
"그럼 당신은요?"
백작부인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스웨덴으로 가야 합니다. 커다란 범죄의 기운이 그곳에서 무르익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막아보려는 참이오. 구스타푸스 3세 폐하는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죠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인물이에요."
백작부인은 그와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생제르맹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섯 번 더 만나게 될 것이오. 여섯 번째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소."
다데마르 부인은 1821년에 생 제르맹과 몇 번 더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왕비의 처형 직후,
브뤼메르(Brumaire)의 18일,
1804년 뎅지엔 공작(Duke d'Enghien)이 죽고 난 다음날,
1813년 1월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1820년 2월 12일 베리 공작이 암살되기 바로 전날.
이상으로 정확히 다섯 번이었습니다.
...
티벳의 승려집단인 케-란(Khe-lan)에는
역사상 유일하게 이방인이 그들의 일원이었던 때의 기록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서방으로부터 찾아온 그 영국인은 티벳어를 비롯해
수십 가지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았고, 예술과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꿈과 희망을 박살내는 생제르맹 백작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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