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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 진실과 거짓
국무를 마치고 전용 개마실을 나올 때 셀레스티아는 벌써 걱정이 앞섰다. 일단 캐이댄스부터 찾아야겠다고 공주는 생각했다. 선셋이 지금 쓰러져 있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별 이상은 없을 테니,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캐이댄스가 품고 있는 의혹을 풀어주는 시간을 가지는 거였다. 수양 조카는 지금 자신이 왕가나 캔틀롯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냥 왕가에 입적시키는 걸로는 자신의 중요성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셋에게 할당된 강의 시간을 일부로 뺐는데도 불구하고, 작은 분홍색 공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캐이댄스가 혹시 모르니 시간을 비워두라는 자신의 분부를 무시한 것 같아서 셀레스티아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포니들은 습관의 동물이었다. 캐이댄스가 평소 하던 대로 슈팅 스타에게 마법 교습을 받으러 가있겠거니 하고 좋게 생각하며 셀레스티아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그렇게만 해! 그렇게 마력 사용에 서서히 밸런스를 맞추면서.."
옆의 문에서 선셋의 목소리가 들려와 셀레스티아는 그 자리에 일시 정지했다.
"잘 하고 있어! 이제 서서히 옮겨봐. 서서히.. 서서히.. 잠깐! 너무 올라왔어! 좀 더 내려! 좀 더 내려!"
"재촉하지 마!"
캐이댄스의 목소리에는 약간 짜증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셀레스티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시간을 잘못 봤나 싶어 공주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선셋이 예상보다 몇 시간 더 일찍 일어나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희한했던 건 선셋과 캐이댄스가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둘을 방해하지 않게끔, 셀레스티아는 조용히 문을 열고 전신에 기초적인 주의 분산 주문을 걸었다. 비록 완전한 투명 상태는 아니었지만, 셀레스티아가 갑자기 움직이거나 소리 높여 말을 하지만 않는다면 저 둘의 주의를 끌 일 없이 저 둘을 몰래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일을 겪어온 고대의 알리콘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방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선셋이 포니 머리 하나가 들어갈 만한 세 개를 방 한가운대에 열을 맞추어 부유시키고 있었고, 캐이댄스는 양피지를 구겨놓은 걸 고리들 사이로 통과시키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망아지를 위한 마력 제어 훈련법이었지만, 약간의 차이점이 있었다. 지금 캐이댄스가 어지간한 유니콘 성마는 금방 지쳐 떨어질 정도의 마력을 구겨진 종이 하나에 가하고 있었다. 주변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왜곡될 정도의 무지막지한 압력이 지금 양피지 덩어리를 휘감고 있었다.
강력한 힘이 휘몰아치는 광경.. 어찌 보면 위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캐이댄스가 지금 오만상을 쓰고 있는 건 단지 이 일이 엄청난 집중력을 요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냐."
선셋은 방바닥에 앉은 채 엄격한 목소리로 캐이댄스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건 무효. 했어도 안 한 거야."
그 때 캐이댄스가 든 종이는 막 두 번째 고리를 지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캐이댄스는 대번에 선셋을 돌아보며 인상을 더 구겼다.
"무슨 소리야 진짜?! 갑자기 한 걸 안했다니?"
선셋의 단호한 자세가 약간 풀렸다. 미소를 지으며 선셋은 대답했다.
"그래. 살짝 말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다시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선셋은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을 할 때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건, 그냥 '난 저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약간 딸려서 그런 것뿐이야. 지금 그걸 굳이 셀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성공하느냐 혹은 실패하느냐 뿐이지."
몇 초 후, 캐이댄스의 또 한 번의 시도는 동그랗게 구긴 종이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위로 솟구쳐 천장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 끝났다. 캐이댄스는 허무하게 천장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27번째 실패네.."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한 번 더 해."
이렇게 말하며 선셋은 낡은 공책을 또 한 장 찢어 구긴 다음 캐이댄스에게 건넸다. 캐이댄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어쨌든 구겨진 종이를 다시 집어 들긴 했다.
캐이댄스가 집중할 무렵 선셋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실패는 포기했을 때나 하는 거야. 아까 네가 했던 거? 그건 발전 과정이라고 하는 거지."
셀레스티아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캐이댄스를 지도하고 있는 선셋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슈팅 스타라고 했던가? 그 늙다리 강사가 하는 말은 지금부로 싹 잊어버려. 네가 망아지야? 아니지? 그러니까 마력을 얼마나 낭비하든 그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마력 제어에만 집중해. 너라면 그것 때문에 지칠 일도 없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이 성 반절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마력을 가진 포니가 지금 왜 그딴걸 걱정하는 거래?"
캐이댄스를 다독거려주며 선셋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넌 해낼 수 있어. 내가 보증할게. 지금은 저 종이를 옮기는 것에만 집중해."
알리콘이 된 선셋의 외모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보통, 포니가 알리콘으로 승천할 경우, 세 종족의 특성 중 하나 정도는 제대로 강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선셋에게선 그런 흠은 찾을 수 없었다. 타는 듯한 갈기를 단 알리콘의 육체엔 평생 동안 농업에 종사한 어스포니와도 같은 단련되고 보기 좋은 근육들이 잡혀있었고, 털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여러 필의 포니를 몸에 매달고 날 수 있을 정도로 날개도 굵고 또 튼튼했으며 깃털 또한 허튼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선셋의 뿔에서 방출되는 마력은 셀레스티아가 전의 선셋에게선 볼 수 없었던 강력한 힘과 기품이 느껴졌다.
거기에 더불어 키도 약간 커졌다. 원래 선셋은 다른 암말들에 비해서 약간 왜소한 편이었지만, 이제 선셋은 평균 성마 남성 정도의 키였다.
하지만 셀레스티아가 선셋이 대견하다고 느낀 건, 결코 그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캐이댄스가 마력을 쏟아 부은 종이 뭉치가 마침내 마지막 고리를 통과했다.
"해...해냈다!"
캐이댄스가 마력의 제어를 갑자기 놓아버렸던지라 목제 바닥에 또 하나의 구멍이 생겼지만, 둘 다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선셋이 갑자기 캐이댄스를 와락 껴안는 바람에 둘은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27번째에 저걸 성공했어? 대단하네!"
선셋의 두 날개가 우뚝 솟았다. 페가수스 입장에서 볼 때는 꽤 남사스런 광경이었다.
"굳이 셀 필요는 없다는 분이 누구시더라?" 캐이댄스는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따졌다.
"그래. 너 잘났다. 관두고 날개 접는 것 좀 도와줘." 선셋은 포옹을 풀고 약간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투덜거렸다.
"어머, 보통 안 이러는데.. 혹시 계속 야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 아냐?"
날개를 접는 걸 도와주며 캐이댄스는 얄밉게 재잘거렸다.
짜증 섞인 끙 하는 소리가 선셋의 목구멍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살짝 언짢아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쳇. 기껏 남이 멋있는 대사를 했는데 분위기나 망치고 있고 말이야.. 계속 그럴래?"
"아하하. 그거야 너 하는 거 봐서."
계속되는 캐이댄스의 짓궂은 괴롭힘에 선셋은 약간 삐친 듯 눈을 굴렸지만,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 그래. 그렇게 계속 해 봐라. 아까 성공이라고 했던 말 다 취소할 테니.."
한편 문가에 서 있는 셀레스티아는 두 알리콘들이 약간 투닥거리면서도 곧 서로를 다정하게 껴안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랑과 우정의 표본이었다. 선셋이 캐이댄스를 이끌어주는 광경은 선셋이 얻은 날개보다도 더욱 더 셀레스티아의 가슴 한편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로서 선셋은 그저 알리콘처럼 생긴 것만이 아닌, 마음가짐까지 진정한 알리콘이 되었다는 걸 입증하였다.
이제 셀레스티아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셀레스티아는 그 자리에 앉으며 경애를 담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때 선셋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간에 그 일은 선셋의 부정적인 야망과, 그걸 이루고자하는 초조함을 치워버린 모양이었다. 부차적으로 셀레스티아의 의혹과 최근 엇나가는 선셋을 보며 느꼈던 회의감까지 말끔히 날려버렸다.
"이모님!"
깜짝 놀란 목소리로 캐이댄스는 외쳤다. 선셋은 말없이 날개를 또 한 번 바짝 폈다. 극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언제 오셨.. 아욱! 서..선셋! 너무 힘주지 마! 갑자기 왜 이래?.. 서.. 설마.. 미안해. 너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내가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거 무지 싫어했었지. 아까부터 별 말 없기에 괜찮은 줄 알고.."
흥미로운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혼동스럽기도 했다. 도대체 왜 선셋은 캐이댄스의 그런 사소한 습관까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걸까? 셀레스티아는 선셋과 캐이댄스, 둘 다 동등하게 사랑했다... 아니.. 솔직하게 생각해보자면 한 쪽을 더 편애한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포니의 감정이야 어쩔 수가 없다지만, 약간의 편애가 있었다는 걸 셀레스티아는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선셋. 듣고 있어? 저기.. 공주님.. 잠깐만 도와주실래요?"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셀레스티아를 캐이댄스가 불렀다.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쳐들며 한숨을 쉰 뒤에 여전히 캐이댄스를 붙들고 있는 선셋에게 다가갔다.
"선셋. 캐이댄스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구나. 근데 이제 좀 놓아줘도 되지 않겠니?"
공주의 말을 들은 선셋은 캐이댄스를 놓아주고 뒤로 돌아 몸을 웅크렸다. 선셋의 날개도 필사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몸을 가리고 있었다. 흡사 맹수 앞에 놓인 사냥감 같은 태도에 셀레스티아의 심장은 철렁 가라앉았다.
"선셋...?"
호박색 알리콘은 더 몸을 움츠리고 공주를 올려보며 눈물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죄...죄...죄송해요! 죄송해요 스승님! 제가 잘못했어요!"
선셋의 뜬금없는 사과와 얼굴에 만연한 고통과 서러움.. 셀레스티아는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났다.
"어-어째서.."
셀레스티아는 곧바로 자신의 수제자에게 달려갔다. 선셋은 허둥지둥 바닥을 기며 공주에게서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선셋의 반응에 셀레스티아는 정신을 다 잡고 바른 목소리로 물었다.
"선셋. 무슨 일이니? 갑자기 사과는 왜 하는 거니?"
"저..전.. 정말이지 최악의 학생이에요!"
선셋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선셋. 넌 절대-"
"으윽.. 또.." 선셋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지자, 캐이댄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님은 절 훈계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셨지만, 제가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서.. 그래서..."
선셋은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셀레스티아의 위로의 말은 지금 선셋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전 그저 이기적이고, 질투만 많고, 잔인하기까지 한.. 저..저..정말 최악의 포니라고요!"
재방은 터졌다. 눈물은 폭포수처럼 선셋의 얼굴을 타고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선셋이 한 말은 대부분 못 알아들을 웅얼거림이 대부분이었다.
자랑스러운 수제자가 울음을 터뜨리자, 셀레스티아는 선셋을 앞다리로 잡고 커다란 양 날개로 감싸주었다. 마치 푹신한 번데기와 같은 모양이었다.
"선셋. 선셋. 잘 들어라. 넌 절대 그런 포니가 아니에요."
선셋을 얼러주면서 셀레스티아는 자기불신에 빠진 포니의 마음을 돌릴 감동적이되 진부하지 않은 말을 열심히 생각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선셋은 지금 자신의 품 안에서 안심하기는커녕,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으며, 몸에서 느껴지는 맥박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고, 숨도 더 가쁘게 쉬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니 단 한 가지, 매우 불편한 결론밖에 나오는 게 없었다.
선셋 쉬머. 셀레스티아가 누구보다도 가장 아끼던 포니가 지금 셀레스티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독한 상실감이 공주의 마음을 휘감았다. 셀레스티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셀레스티아는 캐이댄스를 쳐다보았다. 캐이댄스도 셀레스티아만큼이나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셋. 부디 말해주렴."
셀레스티아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한 발굽으로 선셋의 고개를 들어 자신을 마주보게 하며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뭐가 문제냐고요?!" 선셋은 거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이-이걸 보세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선셋은 날개를 활짝 피며 고래고래 외쳤다.
"꼬..꼼수에요! 이건 꼼수로 얻은 거나 다름없다고요! 전 날개를 달 자격 없어요! 전 절대... 절대로-"
셀레스티아는 마법으로 선셋의 입을 막았다. 고운 방법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셀레스티아는 네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고개를 쳐든, 다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내 말 부터 듣거라. 네가 어쩌다 내 도움 없이 승천을 했는지는 비록 나도 아직 잘 모르나, 이거 하나만큼은 단언할 수 있노라. 네가 알리콘으로써 굳건히 있는 사실 그 자체가 네가 자격이 있음을 훌륭히 증명하는 거라고!"
셀레스티아가 다른 포니들을 가르칠 때 스스로 정해둔 규칙마저도 무시하고 셀레스티아는 지금 중요한 고대의 지식을 섣불리 발설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겁에 질린 망아지를 얼러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처음에 너와 만났을 때부터 네가 알리콘이 될 자질이 있는 아이란 걸 알 수 있었단다."
선셋은 놀란 눈을 하고 셀레스티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너를 가르치면서 네가 준비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최근 몇 달 간은 걱정도 됐었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이기심에 물들어가고 있었으니까. 왜냐면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면 너를 알리콘으로 만들어줄 그 마력은 오히려 너를 흉악한 괴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란다. 그런 괴물은 이퀘스트리아 역사상 단 두 번 밖에 목격된 바가 없지.."
공주는 잠깐 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그래. 무엇 때문에 네가 승천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허나 지금은 신경 쓰지 않겠다."
그리고 공주는 선셋의 얼굴에서 발굽을 땠다.
"내 앞에 선 네 모습이..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작은 해님아"
선셋은 발작을 멈추고 공주를 바라보았다.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알리콘 선셋 쉬머라... 즉위식은 루비와 황금 테마로 장식하는 게 좋겠군. 드디어 선셋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테고.. 이런 즐거운 생각에 셀레스티아 공주의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꼬르륵!'
이상한 소리가 공주의 백일몽을 방해했다. 방 안의 모두가 소리의 진원지인 선셋의 배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캐이댄스가 두 필의 공주 사이로 걸어오며 말했다.
"12시간 정도 쓰러져 있었으니 속이 텅텅 비었겠구나. 배고프면 매사 나쁜 생각밖에 안 든다니까. 자 가자. 뭐라도 좀 먹게. 거기에다가 차까지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밥... 그..그래.. 조...좋네... 내가 자랑.. 아니.. 그거 좋겠다.."
선셋은 공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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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작은 해님아'
선셋은 아까 셀레스티아가 해 준 말을 머릿속에서 벌써 40번이나 넘게 재생하고 있었다.
여전히 기분은 멍했다. 스승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바보 같고,
멍청하고,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작은 해님아'
...선셋은 이말 말고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현재(물론 시간상으로 따지자면 한참 전의 과거지만)의 시급한 문제들, 그러니까 선셋이 끼어드는 바람에 야기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를 막기 위해 지금 당장이라도 계획을 세워야 했지만, 지금 선셋이 생각나는 건 그저..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어서 자리에 앉거라."
그 말이 멍하게 서 있던 알리콘을 깨웠다. 선셋은 빈 의자와 셀레스티아와 캐이댄스를 연달아 쳐다보았다. 둘은 약 40필 가량의 포니가 앉을 수 있는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맞다.."
선셋은 의자에 올라왔다. 인간 때 쓰던 것보다 조금 높았지만, 캔틀롯의 가구들은 보통 셀레스티아의 신장에 맞추어 제작되므로 별 도리가 없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후, 두 팔을 식탁 위에 올려 균형을 잡았다. 불편했다. 어쩐지 무게중심이 이상한 곳에 쏠리는 것 같은데..
"선셋..... 왜 그렇게 이상하게 앉아?" 캐이댄스의 질문이었다.
"이상하다니, 뭐가- 으앗!"
말을 마칠 시간도 없이 위태위태하게 중심을 잡고 있던 선셋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미끄러져 머리에 의자 쿠션이 닿을 때까지 아래로 미끄러졌다. 짚고 일어서려니 팔이 아닌 발굽이 보였다.
맞다.. 포니들은 보통 개가 앉는 자세 비슷하게 앉았었지..
스스로의 멍청함을 저주하며, 선셋은 포니다운 자세로 바르게 앉았다. 꼬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지라 꼬리를 정리하는데도 갖은 애를 먹었다.
'이 병신아! 고작 3년 동안 인간으로 지낸걸 가지고 포니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 까먹었어?'
선셋은 스스로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아예 스승님께 대놓고 티를 내지 그래? 응? 그랬다간 타임 패러독스로 현실도 망가지고 참 재밌겠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법 도서관의 스타스윌 관에 시간여행 주문이 뻔히 있는데도 세상은 멀쩡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써서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을 품어본 유니콘이 그동안 한 필도 없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게 거울을 들여다보던 과거의 자신이 사라진 이유인지도 몰랐다. 동일 포니가 서로 마주치는 걸 막기 위해 시간 축에서 세계에 간섭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을 배신한데다가, 왕실 보물 약탈, 그것도 모자라 흑마법을 이용해 공주를 살해하려고 했고 기어코 살마(자살?)까지 저지르다니.. 이거 죄가 점점 더 무거워져가고 있는걸...
"선셋?"
"아 왜?!"
점점 자신에게 분노만 쌓이고 있던 차에 누가 말을 걸자 선셋은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선셋이 빽 고함을 지른 상대는 다름 아닌 셀레스티아 공주였다.
몸을 잔뜩 움츠리며 선셋은 벌벌 떨었지만, 셀레스티아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내가 어제 보던 선셋의 모습이 나오는구나. 알리콘으로 변한 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은 건 아닌지 걱정했지 뭐니? 이제 보니 그냥 살짝 놀랐던 것뿐이었구나. 그럼 이제 뭘 먹을지 말해주렴. 주방장이 주문을 기다리고 있단다."
호박색 알리콘은 뒤를 돌아보았다. 모래빛 갈기와 암갈색 털을 가진 성질 더러워 보이는 주방장 포니가 울그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던 터라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호박색 알리콘은 뒤를 돌아보았다. 모래빛 갈기와 암갈색 털을 가진 성질 더러워 보이는 주방장 포니가 울그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던 터라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저..음..."
그동안 인간세상의 페스트 푸드나,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 그리고 급식에 너무 익숙해졌던 차라, 선셋은 궁중에서 진상되는 이퀘스트리아 요리 이름들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일단 떠오르는 요리를 아무거나 주문하기로 했다.
"햄... 아니! 아니! 건초.. 맞다! 건초 버거요. 그거 하나 주세요."
선셋은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벌써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건초 버거..." 주방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고작 시킨다고 하는 게-"
"문제될 거리라도 있나요? 분명 그대를 채용할 땐 이퀘스트리아의 무슨 요리라도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램 지 씨?"
셀레스티아의 어조엔 평소와 같은 다정함이 사라져 있었고, 그 때문에 선셋은 약간 걱정이 앞섰다.
램 지 주방장은 잠시 움찔거리더니 곧 툴툴대면서 말을 받았다.
"후... 알겠습니다 공주님. 선셋 공주님의 슬럼가 음식 탐방에 감히 주제넘게 토를 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염병할 주방장 같으니라고. 쳇!"
"아직 정식으로 공주는 아닙니다만." 셀레스티아가 말했다. "아. 그리고 선셋 몫으로 버거를 2개 조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건초 프라이도 잊지 말고."
그리고 셀레스티아는 선셋을 돌아보았다. 선셋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새로 변한 네 몸에 맞추려면 원래 이 정도는 먹어야 하는 거란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치솟는 식욕 때문에 괴로울 일이 좀 많아질게다."
캐이댄스도 목청을 가다듬으며 주문을 시작했다.
"오늘은 당근 핫도그 네 개가 먹고 싶네요, 주방장님. 정말 여기 와서 괜히 다른 포니들 눈치를 보는 바람에 진짜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참고 있느라 혼났네.."
캐이댄스는 선셋을 한번 힐끗 쳐다보며 주문을 마쳤다.
앞서 알리콘 두 필의 주문이 끝나자 셀레스티아는 약간 고민하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흠... 피자가 좋겠군요. 귀리 도우에 버섯을 얹어서. 아티초크까지 곁들여주면 더 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공주는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어쩌다 보니 오늘은 서민음식 체험의 날이 되고 말았군요."
명색이 궁중 요리사인데 저급한 음식을 조리해야 돼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주방장은 소리를 죽여 툴툴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선셋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다들 선셋이 한 말을 그냥 오늘 패스트푸드가 먹고 싶어 그런 거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파우스트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들키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자기도 자기 속을 알 수 없었으므로 선셋은 한없이 식탁만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선셋이 품고 있는 비밀은 지켜지는 편이 나았다. 만약 셀레스티아가 선셋이 몇 년 동안 인간 학생들을 괴롭히며, 트와일라잇의 왕관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데다가, 겨우 사귄 친구들마저 배신하고, 또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마력을 빼앗아간 걸 알아낸다면.. 분명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셀레스티아가 알아채지 못하게만 한다면...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작은 해님아'
.....선셋은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며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셀레스티아는 선셋을 자랑스러워하면 안 됐다. 그건 허상이고 또 거짓이었다. 물론 자기 신세를 부지하기 위해 셀레스티아에게 거짓말을 계속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거였지, 원래 세상에서 트와일라잇이 이끌어나가던 것과 같은 밝은 미래를 위한 것은 죽어도 아니었다.
'진실을 말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 같으니라고...' 또 한 번, 선셋은 스스로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선셋."
셀레스티아의 호명에 선셋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이제 슬슬 즉위식 계획도 짜야 할 것 같구나. 왕관 장식은 황금과 루비로 하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흠.. 그럼 네 갈기 색에 묻힐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왕관의 보석을 네 눈 색과 맞추는 것도 좋을 성 싶은데.."
"즉위식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저따위가 공주라니.."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선셋. 네가 드디어 내 충고를 받아들여 겸손함을 배운 건 나도 정말 대견하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뭐든 너무 과하면 그것도 안 좋은 법이지. 앞으로 이퀘스트리아를 이끌어나갈 공주로서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모든 포니들의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너를 따르는 포니들에게 밝은 내일로 나아갈 희망을 주는 것도 공주의 의무 중 하나란다."
할 수만 있다면 선셋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설마 거울에서 본 것 때문에 그래?" 캐이댄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셀레스티아는 곧바로 캐이댄스를 쳐다보았다. "거울이라니?"
캐이댄스는 머뭇거리는 눈초리로 선셋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셀레스티아를 보며 그 질문에 대답했다.
"저기...그게 있잖아요. 아까 제가 선셋 병문안을 갔을 때 선셋이 말해주던데 그게...... 선셋. 네가 직접 말씀드려."
두 필의 알리콘이 선셋을 돌아보자, 선셋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거울 이야기라면...."
선셋은 아까 캐이댄스에게 했던 거짓말을 떠올렸다.
이제 그걸 셀레스티아에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약간의 거짓말만 하면..
셀레스티아에게 약간의 거짓말만 하면, 선셋은 안전할런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가리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하기 전 까지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스승님도 전에 나에게 거짓말을 하셨잖아..'
선셋은 애써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셀레스티아는 캐이댄스의 출생에 관해서 거짓말을 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하나, 거울에 관해 선셋에게 거짓말을 하며 더 많은 걸 원하는 선셋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럴 만 했기에 거짓말을 한 것 아닌가? 셀레스티아는 선셋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지만, 선셋은 지금...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려는 거였다.
비록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하나, 거울에 관해 선셋에게 거짓말을 하며 더 많은 걸 원하는 선셋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럴 만 했기에 거짓말을 한 것 아닌가? 셀레스티아는 선셋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지만, 선셋은 지금...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려는 거였다.
'역시 넌 겁쟁이야....'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며 선셋은 방 안의 진정으로 자격이 있는 공주들을 올려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 방에 들어가도 되나요?..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서.."
최소한 그것만큼은 진실이었다.
"하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일찍 일어났기는 했다만.. 진짜로 그냥 갈 거니? 그래도 점심은 먹고 가는 게 어떻겠니?"
음식 이야기를 들으니 배가 또 한 번 쓰리도록 고파왔다. 언제 제대로 식사를 한 지도 까마득했으며, 그 동안 간식삼아 먹었던 것은 제빵 시합 때 핑키가 몰래 빼돌린 핑키가 직접 구운 걸작 케이크 한 조각밖에는 없었으며, 그마저도 차원이동을 할 때 구토를 해서 전부 쏟아버렸다. 하지만 다행히 아까처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는 않았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나중에 시종들 시켜서 방에 보내주세요..."
"좋을 대로 하거라. 들어가서 푹 쉬고, 준비가 되면 그 때 보자꾸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셀레스티아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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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이 연회장을 나간 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캐이댄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셀레스티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저러니까 선셋이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셀레스티아가 인상을 구기고 자신을 직접 째려보는 건 매우 불편한 경험이었다.
"..선셋이 대체 거울에서 무얼 봤는지 이야기해주면 좋겠구나."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셀레스티아가 물었다.
저 포니가 과연 항상 인자한 미소를 짓던 엄마 같은 그 포니가 맞는 건지.. 캐이댄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선셋에게 직접 들으시는 편이..."
셀레스티아는 대답 없이 캐이댄스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며 문 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래야겠지만 말이다.."
셀레스티아는 미간의 주름을 약간 펴고 캐이댄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너도 아까 봐서 알겠지만, 선셋이 거울에서 본 무언가가 선셋의 머릿속을 그 근본부터 흔들어버린 것 같구나.. 나도 선셋을 직접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까처럼 선셋이 마음을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 말이다. 그러니 선셋이 왜 그러는지 짚이는 점이 있다면 어서 알려다오."
캐이댄스는 지금 두 가지의 생각과 싸우고 있었다. 셀레스티아가 선셋을 돕고 싶어 한다는 심정은 이해했지만, 선셋에게 있어서 거울에서 본 건 선셋에게 있어서 상당히 민감한 주제임은 틀림이 없었고, 그걸 본마가 없는 자리에서 함부로 말한다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특히나 선셋이 셀레스티아에게 말하는 것도 거부하고 자리를 뜬 이후에는 더더욱.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자니 그것도 좀 그랬다. 캐이댄스가 선셋에게 자신이 전에 잘못한 점을 고백하고 난 뒤엔 더더욱 그랬다.
과연 다른 포니의 믿음을 배신하고, 선셋을 도와주어야 하는 걸까?
"음... 그나저나 그 거울이 정확히 뭔지 부터 먼저 알 수 있을까요?
대답을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캐이댄스가 질문을 던졌다.
선셋을 저 지경으로 만든 망할 물건.. 셀레스티아는 그 거울의 이야기만 들어도 얼굴살이 찌푸려지는 것 같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낸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 거울은 몇 세기 전 수염 난 스타스윌이 제작한 물건인데, 두 가지 용도로 쓰이고는 했단다. 다른 평행세계로 통하는 차원문의 역할이 그 중 하나로, 이건 스타스윌이 기존에 제작한 거울이랑 다를 없지. 하지만 이 거울이 다른 거울에 비해 특별한 점은... 특정 시기가 될 때마다 이질적인 세계로 통하는 차원문이 열리고, 그 세상에 들어가게 될 때 차원문에 들어가는 포니를 그 세상에 어울리는 생명체로 바꿔준다는 점인데, 나도 자세히 아는 바는 없다. 그 스타스윌도 거울에 들어갔다가 15분 만에 나오더구나. 그 어떤 포니도 저 안에만은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면서.. 두 번째 기능은 그 일이 있은 후 시간이 꽤 지나서 발견했단다. 선셋보다 한참 전에 거뒀던 수제자에게 그 거울을 조사해보라고 지시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지."
셀레스티아는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차원 문이 열리는 특정 시기가 아닐 때. 그 거울에 걸린 마법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포니가 장차 이룰 수도 있는 미래를 보여주는 마법으로 변화한단다. 그래서 나는 선셋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단다. 미래에 너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 자만심을 한 풀이라도 꺾어보길 바랬었지.."
설명을 들어도 캐이댄스는 도통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결심을 내릴 수는 있었다. 셀레스티아에게 약간의 정보를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걔 말론.. 거울에서 뭔가 충격적인 광경을 봤다던데요. 그리고 몇 주일간 걔가 나한테 한 일에 대해서 막 심하게 자책을 했었고요. 이모님을 뵐 때랑 증상이 비슷하긴 했는데.. 그때만큼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캐이댄스는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동안 선셋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해도 선셋이 갑자기 위축되는 모습이 보기 좋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사귄 친구가 죄책감으로 침몰해가는 걸 꺼내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셀레스티아가 설명해준 것과, 캐이댄스에게 선셋이 말해준 것을 종합해보자면, 선셋이 그 거울에서 진정 자신의 미래를 보았을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선셋 앞에 펼쳐질 미래가 사실은 끔찍한 거라서 그걸 피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거면 또 모를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가정하면 선셋이 지금 노력을 해 봤자 쓸모없는 게 아닐까? 결국 그 거울에서 본 대로 끔찍한 파멸을 맞이하고 마는 건 아닐런지..
머리가 아파왔다. 캐이댄스는 속 시원하게 소리를 한 번 지르고 싶었다. 이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느니 차라리 살던 마을로 돌아가서 연애 상담사 노릇을 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셀레스티아는 이제 말이 없었다. 망설이고 있어선 안 돼.. 캐이댄스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 진짜 선셋은 뭘 본 거죠?"
그 때 셀레스티아는 선셋과 함께 있었으니, 거울에 비친 걸 함께 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오직 선셋만이 알 수 있겠지."
셀레스티아의 침묵에 캐이댄스가 초조해지려는 찰나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쩌면 거울에서 본 걸 선셋이 잘못 해석하고 지금 정신이 흐트러진 건지도 모르겠구나. 계속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란하구나. 너희 둘에게 장차 맡길 중대한 일이 있거늘.."
이야기가 더더욱 무거운 주제로 빠져들자 캐이댄스는 셀레스티아와 계속 대화를 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캐이댄스는 마법에 관해선 아직도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 중이었고, 아직 셀레스티아에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마법도 제대로 못 배운 상태였다.
벌써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자.. 망할, 부담밖에 더 되겠냐고!
하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또 도망치는 꼴이 될 테니까.
"중대한 일이라뇨? 그게 대체.."
셀레스티아는 슬픈 눈빛으로 캐이댄스를 내려다보았다.
"..나이트메어 문의 전설은 익히 들어 보았겠지. 아는 걸 다 말해보려무나."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되면 캐이댄스는 보모 일을 할 때 돌보고 있던 망아지들에게 악몽야 때만 되면 나이트메어 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으므로, 대부분 달달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이트메어 문은 이모님과 같은 알리콘이지만.. 사악한 알리콘이죠."
셀레스티아의 두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잠시 서리는 걸 캐이댄스는 관찰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나쁜 일을 해서 달에 갇혀 있다가 악몽야 때만 되면 사탕을 재물로 안 바치는 망아지들을 잡아먹는다고는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이죠 뭐."
웃음이 나왔다. 단지 유치한 이야기였을 뿐이니까.
"나이트메어 문은 실존한단다."
셀레스티아의 돌발 선언에 캐이댄스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약간 겁에 질리기도 했다. 캐이댄스가 뭐라 질문을 하기도 전에 셀레스티아는 말을 이었다.
"물론 전승된 이야기와 진실은 다르지.. 아무리 악의 길에 빠졌다고는 하나 난 그 아이가 다른 포니를 잡아먹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달에 갇혔다지만, 나이트메어 문은 여전히 다른 포니의 꿈에 간섭해 그 포니의 꿈을 악몽으로 채워 넣음으로써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끔 만들지. 그리고 포니들 중 꿈과 잘 통하는 희귀한 자질을 가진 포니의 경우엔 간혹 그 꿈을 따라 자다가도 몸을 움직이기도 하는데, 이런 포니들을 나이트메어 문이 꼭두각시로 이용하기도 하더구나."
말을 잠시 멈추고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건 매우 희귀한 경우지. 900년 동안 내가 본 것만 해도 기껏해야 100 필 정도였으니.."
캐이댄스의 등가에 소름이 쫙 펴졌다.
"가..갑자기 왜 이런 걸 말씀해주시는 거죠?"
셀레스티아는 얇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무서워는 말거라. 내 주변에만 있으면 나이트메어 문은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꿈에 관한 마법으론 내 그 아이보다는 약간 뒤쳐지지만, 1000년간 갖은 시행착오를 걸치면서 방어를 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있는 한 캔틀롯에 사는 포니들이 나이트메어 문의 악몽에 시달릴 위험은 없단다."
그리고 셀레스티아는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런 걸 말해줬냐고 물었었지... 이 고착된 상황이 조만간 끝날 것 같아서 그런 거란다. 분명 나이트메어 문을 도와주는 자들은 소수에 가까우나, 추방 후 거의 천년이 지난 지금. 나이트메어 문이 이르면 몇 년 후에 곧 달에서 풀려나게 될 거라는 징조가 보이더구나."
태양의 여신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캐이댄스는 공주가 다시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내가 그 아이와 싸웠을 때, 나는 '조화의 원소' 라고 불리는 여섯 개의 유물을 이용해 그 아이를 달으로 추방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조화의 원소는 사라졌으니, 그 아이가 돌아온다 한들 다시 봉인할 수단은 없어진 셈이지.."
"그래서 선셋과 제가 필요하셨던 건가요? 나이트메어 문과 함께 싸우자고요?"
캐이댄스는 불안한 어조로 질문했다. 덜컥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캐이댄스는 몰라도 선셋은 분명.. 성격도 그렇고 전에 캐이댄스에게 여러 번 직접 보여준 것도 그렇고 싸움꾼으로써의 자질이 충분했다. 아무리 그게 캐이댄스를 위협하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그랬던 거라지만 선셋이 사과한 지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세 알리콘의 힘을 모아.. 나이트메어 문과 싸우자는 건가요?"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너의 역할은 이퀘스트리아의 포니들이 다른 포니들을 사랑하며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그리고 내 비록 선셋에게 이퀘스트리아를 수호할 수 있도록 여러 기술들을 전수할 생각이긴 하나, 결코 이런 무거운 책임을 벌써부터 지게 할 생각은 없단다.. 만약 너희가 나이트메어 문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탠다 하더라도, 결국 너희 둘 다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구나. 나이트메어 문은 보통 알리콘이 아니란다.. 나와 같은 천상의 힘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축척된 지식과, 내가 지금 갖추지 못한 힘마저도 갖추고 있지... 하지만 안심하거라. 결코 너희들이 우리 둘 사이의 싸움에 헛되이 희생되는 일만은 없게 하겠다."
셀레스티아의 말에 캐이댄스는 약간 안심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게 걱정거리가 아주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셀레스티아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모님은요?"
"죽고 말겠지. 하지만 나 혼자 저 세상으로 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셀레스티아는 이미 각오를 굳힌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내 후사로 선셋 쉬머가 일출과 이퀘스트리아의 통치를 담당하게 될 거란다.."
캐이댄스는 멍한 표정으로 셀레스티아를 올려보며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캐이댄스의 뇌리를 스쳤다. 나이트메어 문에 대해서 설명할 때 셀레스티아의 슬픈 목소리, 나이트메어 문의 악행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듯 한 태도, 나이트메어 문과 함께 죽겠다고 할 때 일절의 두려운 기색 하나 없었던 것을 종합해 볼 때, 한 가지 사실을 캐이댄스는 간파할 수 있었다.
"나이트메어 문.. 공주님이 아끼셨던 포니였나 보군요.."
"처음부터 사악했던 아이는 아니었지."
셀레스티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엔 일말의 탈력감이 담겨있었다.
"그 아이는 사실 상냥하고 선량한 아이였다. 허나.. 내.. 내가 그 아이를 부숴버렸다. 내 오만함과 아둔함이 그 아이를 부숴버렸단 말이다. 언제나 그 아이에게 명령만 하고 그게 모두에게 최선인 양 멋대로 착각하면서 그 아이를 왕실의 의무라는 명목으로 고립과 고통의 사지로 내몰았었다.. 언제나 수많은 포니들이 그 아이보단 내게 먼저 조언을 구하러 찾아오는 걸 보며 내가 그 아이보다 낫다는 걸로 착각하면서. 단지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난... 난.. 아아.. 난.. 대체 무슨 짓을..."
공주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했다. 초라하게 온 몸을 벌벌 떨면서..
캐이댄스는 셀레스티아가 우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셀레스티아가 저런 모습을 평생 못 볼 거라고 생각했었다. 캐이댄스는 어떻게든 셀레스티아에게 기운이 나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적어도 어께에 발굽을 올리고 다독거려준다거나, 날개로 감싸준다던가..
하지만,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셀레스티아였다! 아마 캐이댄스의 시조 할아버지가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보다 더 오래 살아온 포니를 위로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엄청난 부담감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셀레스티아는 캐이댄스의 위로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버릇없는 어린 것이 나이를 몇 배나 먹은 존재를 감히 능멸하려 든다고 기분만 더 상하고 말 것인가..
캐이댄스의 머리가 또 한 번 빠르게 돌아갔다. '아. 이건 진짜 내 능력 밖인데..' 이렇게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던 찰나..
"공주님들. 식사 대령했습니다!"
주방에서 램 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실 주방장은 주문한 음식이 담긴 각기 세 개의 쟁반을 염동력으로 들고 연회실의 좌석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캐이댄스는 덜컥 걱정이 앞섰다. 감정적으로 무너진 상태의 공주를 만약 다른 포니가 보기라도 한다면.. 캐이댄스는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 셀레스티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셀레스티아는 이미 평소의 그윽한 그 표정 그대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잠깐-"
"공주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덕목이 뭔 줄 아니? 다른 포니들 앞에서 자기감정을 숨겨야 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란다."
주방장은 음식을 내려놓고 연회장을 나갔고, 셀레스티아는 쟁반에 담긴 두 개의 건초 버거를 보고 몇 초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아까 있었던 일 덕분에 캐이댄스는 셀레스티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셀레스티아가 선셋에게 갈지 말지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읽어낼 수 있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캐이댄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선셋에게 그거 직접 안 갖다 주기만 해 봐요.... 그랬다간 마법 연습 삼아 저걸 은도금한 건초 뭉치로 확 바꿔버릴 테니까.."
그리고 캐이댄스는 자기 몫의 음식을 살폈다. 당근 핫도그치곤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의 장식이 되어있었지만, 그저 주방장이 자기만족을 했거니 하고 넘기며 그 음식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무리 화려할지언정 기본적인 맛은 있었다.
"이해해주어서 고맙구나."
셀레스티아는 목례를 한 번 하고 쟁반을 들어 선셋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뒷모습을 보며 캐이댄스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어쩐지 선셋 쉬머의 상황에 관해선 지금 셀레스티아보단 자신이 더 많은 걸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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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겁쟁이!'
선셋은 또 한 번 자신을 호되게 질타했다. 침대에 누워 포니의 육체에 익숙해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는 와중에 말이다.
인간일 때엔 흉부에 커다란 돌출 부위가 있는 인간 여성의 신체 구조 특징상 침대에 등을 대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고, 그게 선셋의 몇 년간 수면 습관이 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잘 수가 없었으므로 습관을 강제로 교정해야 했다. 이게 다 꼼수로 얻은 두 날개 때문이었다.
이제 선셋은 배를 침대에 대고 자야 한다. 텅 비어있는 배에 압력이 가해지는 건 최악의 기분이었다.
모든 게 잘못되어가기만 하고 있어서 선셋은 마음속으로나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 씨발 겁쟁이! 스승님 근처에만 갔는데 그 지랄병을 할 건 또 뭐야!'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 선셋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스승님은 나 따위.. 나 따위 포니를 절대로 자랑스러워해선 안 돼! 결국 넌 이룩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이 인생이 가짜인 자식아!!'
불현듯 원래 세상의 과거에서 셀레스티아와 있었던 일이 선셋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선셋이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친 그 때, 셀레스티아와 함께하든 그 마지막 몇 달에 있었던 일들이 선셋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셀레스티아의 충고는 귓등으로 듣지도 않다가, 그 운명의 날, 거울 속에서 날개를 단 자신의 모습을 본 뒤로 계속 거울에만 집착하기 시작했었다.
그 때 셀레스티아의 표정을 선셋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거울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준비가 안 됐다며 선셋을 째려보며 짓던 찌푸린 인상, 날카로운 눈초리, 그리고 결국 어느 날 밤 일을 저지른 선셋을 추궁하던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까지.. 원래대로라면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을 일이지만...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분노는 잦아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죄책감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 인자한 스승님마저도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할 정도면, 난 대체 얼마나 최악이라는 건지..' 속으로 선셋은 생각했다.
'-캔틀롯 왕성 안에는 출입을 금하노라!'
셀레스티아의 노성이 선셋의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건 선셋과의 결별을 선언할 때 셀레스티아가 하던 말이었다.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작은 해님-'
"아냣!!"
뇌리에 울려 퍼지는 셀레스티아의 음성에 큰 소리로 반박하며, 선셋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그 생각을 덜어버리려고 했다. "거짓말! 날 자랑스러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면서!!"
"진심이란다."
자상한 어조의, 하지만 묘하게 힘이 실린 셀레스티아의 목소리가 선셋의 귓가에 들렸다.
선셋은 부리나케 침실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공주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마력으로 들고서 바로 거기에 서 있었다.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모든 시험을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통과하는 모습, 고등 이론이 난잡하게 서술된 책을 정독한지 한 번 만에 핵심 정보들을 요약해내는 모습, 그리고 스타스윌에 필적할 정도로 현세대 유니콘들 중 가장 강력한 마법 실력을 얻었는데도 만족을 모르고 어린 나이에 온갖 난관에 도전해나가는 네 모습을 난 쭉 지켜봤단다.."
공주는 점점 그 수제자에게 다가왔다.
"작은 해님아.. 사실이 그러거늘 어찌 내가 널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리가 있겠니?"
선셋은 공주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올려 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셋은 제 스승이 약간 왜소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선셋의 기억 속의 스승님은 언제나 거대한 분이셨는데..
선셋은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돼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스승님.."
"미안하다. 선셋."
셀레스티아는 사과했다. 전혀 기대치도 않은 말이 셀레스티아의 입에서 나왔고, 선셋은 경악한 채로 셀레스티아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땐 널 놀래킬 생각이 아니었단다.... 하긴.. 덩치도 산만한 흰색 포니가 갑자기 방 안에 떡 하니 나타나면 누군들 안 놀라겠냐만은.."
선셋은 여전히 얼떨떨하게 셀레스티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셀레스티아는 자신이 한 농담에 객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선셋은 웃지 않았다. 사실 본마 입장에선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던 거지만, 이유가 어쨌든간 셀레스티아는 크게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표현을 잘 안하는 바람에 그런 오해를 품고 있었다면.. 할 말이 없구나.. 진심으로 사과하마."
이어지는 두 번째 사과에 선셋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죄책감과 자괴감이 선셋의 가슴을 먹먹하게 채워갔다. 스승님이 이래선 안 된다. 도리어 선셋한테 사과를 해서는 안 돼는 거였다.
"아..아뇨! 그게 아니라 저... 그.... 책을 소리 내서 읽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스승님이 사과 하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지금 이 세계 자체가 모두 가짜투성이긴 했지만, 선셋은 도저히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엄한 셀레스티아가 농담을 던진 것도 모자라서 진심으로 선셋을 자랑스러워한다니..
명백한 허상이요 또 거짓이었다. 만약 선셋이 벌인 만행을 모두 알게 된다면 셀레스티아는 당장 선셋의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비난을 할 게 분명했으니까. 선셋은 마력을 훔친 대가로 타르타로스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서 평생을 썩어야 마땅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셀레스티아의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사 천 마디 사과를 해 보았자 부질없겠지.... 허나 이것만은 알아다오. 내 너한테 진심을 담아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어쩌면 몇 년 전에, 너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아니.. 애초에 매일 매일 너한테 해줬어야 하거늘 미루고 미루다가 지금 하게 되는구나.."
셀레스티아는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선셋은 몸을 바짝 움츠렸다. 공주는 조용히 선셋을 앞다리와 날개로 감싸 안았다. 따뜻한 숨결이 선셋의 귀를 간지럽혔다.
선셋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사랑한다. 선셋 쉬머."
선셋은 시간이 그 순간 멈춘 것만 같았다.
"네....?"
지금 무엇을 들었든간 이게 현실일 리는 절대 없었다.
"조용.....참 좋구나... 이대로 가만히 있어주겠니?"
까마득한 옛날부터 듣고 싶었던 말..
흐르던 시간을 멈추게 만든 말..
하지만 이건...
"아-아니에요 이건-"
선셋은 복잡한 생각 따윈 포기하고 모든 걸 셀레스티아에게 맡기고 싶은 감정을 간신히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설마.. 날 절대 용서치 못할 정도로.. 그 정도로 내가 널 외면한 거였니?"
속삭이는 공주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절망감이 서려있었다.
선셋은 고개를 저었다. 힘차게 저었다. 치솟아만 가는 자괴감, 부끄러움이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만..."
작은 목소리로 선셋은 셀레스티아를 만류하였다.
"아. 해님아.. 작은 해님아.. 미안하다.. 다 나의 잘못이구나.."
선셋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단도로 조각조각 찢어내는 기분이었다..
이건 모두 의미 없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셀레스티아의 총애, 사랑, 이 모든 건 공주가 허상을 보고 그저 착각한 것 뿐이었다.
만약 공주가 진실을 알았다면 이런 말은 빈말로라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공주가 진실을 알았다면 이런 선셋을 역겹다 여길게 분명했다.
"난 정말 너를 사랑한단다. 제발 알아주려무나."
"제발.. 그만..." 선셋은 애원했다. 셀레스티아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비록 너와 나의 관계는 공식적으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불과할 줄 모르나..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선..."
'안 돼!!' 짧은 찰나의 순간, 선셋은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말만은.. 제발 그 말만은!!'
"넌 마치 나의 친-"
공주가 말을 마치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말을 직접 공주의 입에서 들었다간 간신히 짊어 매고 있었던 선셋의 무거운 죄책감이 선셋을 짓눌러 아주 부숴버릴게 분명하니까...
선셋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에 셀레스티아가 선셋의 입을 막을 때 썼던 주문으로 셀레스티아의 입을 간신히 막았다.
셀레스티아는 화들짝 뒤로 물러서며 선셋을 쳐다보았다. 죄책감.. 부끄러움.. 선셋의 표정엔 두 가지 감정이 가득했다. 선셋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설령 공주에게 두 번째로 버려진다 해도 선셋은 진실을 말해야 했다!
"차원 문... 거기 들어갔었어요.."
선셋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주의 두 눈이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이 세상이랑 비슷한 다른 평행 세계로 건너가 그 세계의 주민들을 속이고, 협박하고, 괴롭히느라 시간을 낭비했죠. 그러던 어느 날, 저 따위와는 급이 다른 진정한 공주가, 제가 오직 제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훔쳐간 그 공주의 마법을 되찾기 위해 똑같이 이 세계로 건너와서 날 한번 혼쭐을 내 준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제가 전에 심하게 괴롭혔는데도 불구하고 날 친구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의 마력을 훔쳐서 이 세계로 돌아왔는데.. 스..스승님은 그런 것도 모르고 절 자..자랑스럽다고만 하시네요..."
선셋의 목소리는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거의 갈라져있었다. 한없이 아래만 내려다보며 선셋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하셨다고요!"
고래고래 악을 쓰며 선셋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가 자랑스러워요?! 난 도둑인데! 사기꾼인데!!"
선셋은 두 날개를 활짝 피며 소리 질렀다. 잔뜩 인상을 쓰며 셀레스티아를 올려보았다.
"이 날개요? 훔친 거예요! 원래 트와일라잇 스파클 것이었다고요!!"
고해가 끝났다. 선셋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셀레스티아의 판결만 기다리고 있었다. 셀레스티아의 태양 불에 산 채로 구워지게 되는 걸까? 사실 타르타로스에 갇히는 게 선셋의 죄악에 더 맞는 처벌일 것이다. 마력을 다 추출당한 육체만 남은 체 여생을 고통과 뉘우침 속에서 보내는..
하지만 벌써 몇 초가 지났는데도 선셋이 각오하던 처벌은 찾아오지 않았다. 선셋은 침대에 묻었던 머리를 들고 서서히 셀레스티아를 올려보았다.
공주의 표정에선 분노, 실망,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공주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것처럼 애써 담담한 표정을 꾸며서 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공주는 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주는 선셋을 내려다보았다.
"선셋.."
인상을 약간 쓰며 셀레스티아는 물었다.
"대관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누구길래 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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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간선에선 선셋이 인간 세계로 사라진 후 셀레스티아가 나이트메어 문을 막을 다른 방법을 찾다가 조화의 원소를 다시 발동시킬 방법을 찾게 되는 것 같지만. 이 시간선에선 선셋이 대뜸 알리콘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셀레스티아가 대안을 찾지 않고 그냥 선셋과 캐이댄스에게 뒷일을 맡기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선셋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이퀘스트리아는 멸망.. 까지는 아니겠지만, 원래 시간선의 이퀘스트리아보다는 약간 암울한 세계가 될 것임은 분명한 것 같군요. 과연 선셋은 몇 년 안의 기한 안에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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