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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mystery_8880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7
    조회수 : 9022
    IP : 1.230.***.224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8/04/08 14:33:17
    http://todayhumor.com/?mystery_8880 모바일
    베트남 정부가 숨기는 후에 민간인 학살
    옵션
    • 펌글

    글쓴이 (옮긴이):  Kiet Nguyen

    (아마도 미국에 망명한 베트남인으로 추정)

     

    실제 내용: 더글라스 파이크가 저술한 

    The Viet Cong Strategy of Terror 

    책의 23-39 페이지....

     

    * 약간 깁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생각으로 봐 주시길..... *

     

    --------------------------------------------------------

    Hue  Tet 68


    Massacre at Hue (후에의 대량학살)

     

    베트남의 고도 후에(Hue)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도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968년 2월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후에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명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후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물리적인 통계를 약간 빌어야 할 것 같다. 후에에 공산주의자들은 총 1만 2천 명 정도가 구정공세 당시 들어왔다. 1968년 1월 30일 만월인 밤에 들어왔다. 그리고 26일간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의 와중에 5,800명의 후에 시민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실종자도 대부분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민간인들의 시체가 한 명 혹은 무리 지어서 투아 티엔(Thua Thien)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후에는 문화적인 베트남의 수도이며 전술적으로 매우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구정공세 당시의 자세한 일들은 언론에 자세하게 보도되지 않았다. 세계인의 양심에 별 상관이 없게 되었다. 북베트남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1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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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attle


    이 후에 전투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 1967년, 10-11-12월. 월맹은 남베트남과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역의 여러 곳에서 전면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이들은 사전에 준비한 물자를 바탕으로 여러 부대들이 연합하여 공세에 나섰다. 전투는 강렬했다. 이를 1단계로 본다.


    2단계: 1968년 1-2-3월. 남베트남 전체적으로 월맹군과 베트콩들의 독립적이고 광폭한 전투가 있었다. 숫자도 많았고 소부대에 의한 상당한 전투가 있었다. 이들 각 소부대들은 광대한 지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으며, 훈련이 잘 되고 진보한 방식의 게릴라전을 벌였다. 1단계와 다른 것은 주 전투를 벌인 것이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군이었다는 것이다. 남베트남에 약 5만 5천 명의 월맹군이 침투해 들어왔다. 1단계보다 강도가 엄청났으며, 베트콩을 포함한 총 7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총 32곳의 남베트남 인구밀집지역을 공격했다. 후에도 그 중에 한 곳이다.


    3단계: 1968년 4월, 5월, 6월. 고립되거나 연합된 합종연횡 스타일의 공세. 전투들은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노획된 문서로 보면 월맹은 ‘구정공세 2파’격으로 공격으로 계획했다. 케산의 미 해병대 기지가 공격당했고,  월맹은 이것을 ‘2파’로 보았지만, 1단계와 2단계의 공격이 실패했기 때문에, 1-2단계의 확장에 따른 2파의 개념은 상실되고 말았다. 전쟁은 8년간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구정공세 기간 중에 미군은 3달 동안 가장 사상자가 많았는데, 일주일에 500명이나 전사했던 시점이기도 하다. 남베트남군은 거의 두 배가 전사했다. 그러나 월맹군과 베트콩들은 미군 전사자의 8배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1967겨울-1968봄 전투의 시점으로 보면, 월맹군과 베트콩은 총 19만 5천 명 정도 밖에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2-3단계의 전체 9개월 동안 월맹/베트콩 중에서 죽거나 영구적인 불구가 된 인원은 총 8만 5천명이나 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후에 시가전은 2단계에 속한다. 후에는 월맹군이 주력인 전투였다. 월맹군은 이 후에에 두개의 사단이나 되는 병력을 투입했다. 지역게릴라부대도 일부 가담했고, 150명의 지역 공산당 세포와 간부들도 동참했다.

     

     


    후에 전투 전개에 대한 간단한 요약



    후에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주로 월맹군 800과 802대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힘차고 기동력 있게 후에로 입성했다. 첫날 공격 새벽에 월맹군은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예외가 있다면 남베트남군 1사단의 본부가 있던 곳과, 미군 고문관들이 있던 건물들뿐이다. 베트남군과 미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두 개의 중요한 거점에 도달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다른 월맹군 대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804대대였다. 그들은 미군과 베트남군의 증강군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차단에 실패했고 두 개의 거점에 미군과 베트남군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전투는 점차 포위공격전으로 변했고, 월맹군은 오래된 성채들과 도시 서쪽의 끝으로 몰렸다. 미군과 베트남군은 세 방향에서 월맹군을 압박했다. 포격과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월맹군이 숨은 성채들은 견고한 건축물들이었고 월맹 지휘부는 그곳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월맹군들은 가옥과 가옥을, 블록과 블록을 이어가면서 후퇴하고 있었다. 전투는 점차 느려지고 값비싸졌다.


    성채는 지하에 공간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미군 해병대와 베트남군은 1미터씩, 1미터씩 전진하는 판이었다. 1968년 2월 24일 아침, 남베트남 1사단 병사들이 외벽에 24일간 걸려 있던 월맹깃발을 뽑아버렸다. 월맹군은 전투에서 졌다. 도시에서는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만이 이어졌고 점차 도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2,500명의 월맹군이 전사했고, 또한 다른 2,500 명 정도가 나중에 후에를 떠나 미군에게 추적당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미군은 총 357명이 전사했다.

     

    이 혼돈의 전투 속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민간인에 대한 첫 번째 조치는 ‘긴급 구원’이라는 것이었다. 음식, 유행병의 예방, 긴급 의무 지원 등등. 그렇게 민간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후에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통계를 조사했다.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민간인은 1,900명으로 조사되었으나, 비공개적으로는 5,800 명 정도를 추산했다.


    공산주의자에 의한 첫 번째 학살 희생자들은 지아 호이 고등학교 마당에서 2월 26일 170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 몇 달 동은 18개의 단체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탕 쾅 투 파고다 근처에서 67구가 발견되었고, 바이 다우 77구, 초 통 지역에서 약 100구, 황실묘지에서 201구, 티엔 함에서 약 200구, 동 지에서 약 100구, 총 해서 약 1,200 명의 사체가 바삐 암매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들 사체 중 반수는 매우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손이 등 쪽으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체들은 상처 없이 비틀려 있었다. 생매장된 것이다. 생매장 되면서 분대 규모의 군인들이 사격을 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체에 총 600개의 총구멍이 발견되었다.


    두 번째 피해그룹들이 1969년 첫 7개월 동안 여러 군데서 다시 발견되었다. 남지나해 부근의 모래 둔덕에서는 매장도 되지 않은 800구 정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둔덕에 땅을 사망자들이 파게 한 뒤에 10-20명 씩 한 줄로 세운 뒤에 기관단총으로 살해되었다. (나중에 이곳에서 나온 러시아제 기관총의 탄피가 인기 있는 기념품으로 팔렸다) 3-4명 씩 죽여서 불태워 신분을 알 수 없는 사체도 많았다.


    남 호아(Nam Hoa) 지역에서 세 번째 학살 증거가 나타났다. 다 마이 강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푸 캄 죽음의 행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1969년 9월에 발견되었다. 3명의 공산주의자 망명자들은 미 101공수사단 여단 정보장교에게 다 마이 강가에서 수 백 명의 민간인을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다 마이 강변은 후에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들은 그 학살이 1968년 2월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지역은 매우 거칠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사실상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이 증언에 따라서 101사단의 여단이 그곳을 수색했고, 많은 사람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이 파편 같은 정보의 조각들은 다 마이 강가의 학살의 의미를 조합하게 해 주었다. 1968년 테트 공세의 15일째, 후에의 일부인 푸 캄 소도시에는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 4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를 피하고자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카톨릭 신자들이 오히려 아니었다. 공산당 정치위원이 이 성당에 도착했고, 400 명 정도의 민간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 정치위원은 ‘해방지구’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3일간의 재교육을 시킨 뒤에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공산주의자들의 본부가 있는 후에의 파고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때 20 명 정도의 사람이 이름이 불려서 그룹에서 이탈했다. 그들은 파고다가 있는 안뜰에 집합되었고 모두 월맹군에게 살해되고 불태워진 뒤에 암매장되었다.


    이들이 처형되고 나서 나머지 민간인들은 강을 따라서 계속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베트콩부대에 인계되었다. 그 당시 그들을 인계한 정치위원은 아마도 재교육을 시킨 뒤에 민간인들을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계가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많은 인원으로 인해서 며칠간 일대는 많은 도망친 민간인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때 지역 베트콩들은 증거를 없애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결국 민간인들은 강변의 6킬로미터에 걸쳐 총에 맞거나 도륙된 뒤에 흐르는 물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들은 일대에 끌려온 사람들을 찾는 대로 모두 학살했다.


    101사단의 여단은 그곳으로 향하면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강변에 도착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강변의 수풀은 엄청나게 두터웠다. 나무와 풀들이 두개의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나무들의 가지는 높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쪽은 거의 대낮에서 어둠에 가까웠다.

     

    여단 공병은 길을 내기 위하여 그 두터운 수풀에 다이너마이트로 뚫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그리고 헬기의 랜딩존도 만들어야 했다. 사체들이 발견되면 헬기로 운구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매장 없이도 사체를 감추기에 매우 쉬운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수백 미터의 협곡이 있었고, 그 안에 수많은 해골들과 인간의 뼈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냥 지상에 버려져 있었다. (동양인들은 사람이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방치될 경우 영원히 지상에 외롭게 남는다고 생각한다) 이후 20개월이 지나자 시체들은 점차 햐얗게 뼈로 변해갔다. 


    다 마이 강가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총 428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혁명의 반역자’라고 규정했다. 이들 428 명 중에 군인은 25% 정도였고 두 명의 장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하사관과 사병이었다. 다른 25%는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50%는 마을사람, 마을 서기, 고용인,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관청 공무원 등이었다.


    네 번째 학살의 증거들이 다시 나타났다. 푸 투 지역의 소금밭에서 1969년 12월 발견된 것이다. 이는 루옹 비엔이라는 어촌 지역으로, 후에에서 동쪽 1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이 또한 매우 황폐한 지역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1968년 연초부터 이 지역의 베트콩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강한 노력을 들였던 지역이다.

     

    이 루옹 비엔의 인구는 약 700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은 지역 베트콩의 보복이 20개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다 청소되자 주민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사람은 적어도 300명, 그리고 최대 1천명으로 추산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후에의 공무원들이 조사를 벌였으나 정확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중인 상태로 조사를 끝냈다.


    후에 전투 후에, 남베트남 정부는 민간이 부상자만 7,600 명을 추산했고, 이들 중 1,900명은 전투행위 중간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전투행위 중간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5,700명으로 추산했고, 첫 번째 밝혀진  민간인 학살 사체의 수는 4,756구였다. 두 번째 발견된 학살에서 모래 둔덕 학살을 합하여 3,583구, 세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다 마이 강변을 포함 2,774구, 네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총 2,356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룹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사망자가 2천 구 정도 더 발견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논리



    이 후에 부근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은 이전에 남베트남에서의 어떤 잔혹한 학살보다 엄청난 규모였다. 보통 게릴라들은 광고성의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하여 민간인들을 본보기로 살해했다. 그러나 후에 지역은 다른 베트콩과 월맹의 게릴라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대한 행위와는 전혀 달랐다. 본보기를 보여줄 이유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은 후에의 월맹군과는 달리 심리적으로 동요하고 있었으며 고립되었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많은 게릴라들의 살해행위는 보통 비밀리에 수행했다. 블랙리스트에 따라서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을 죽였으나, 후에는 달랐다. 기존의 패턴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들은 학살지역 지방 수장, 경찰서장, 미군 고문관, 민간인의 목격, 포로의 진술, 공산주의 이탈자들의 진술로 구성된 진실이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사실은, 월맹군들이 미군의 격렬한 역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분노, 좌절, 후퇴로 인한 공황상태로 양민을 학살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합리적으로 살해할 대상을 토의하고 결정한 후에 이를 실행해왔었다. 그로 인해서 살인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그들의 민간인 살해는 다분히 계산적이었었다.


    두 번째 사실은, 학살을 주도한 것이 지역 베트콩 간부들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 월맹의 명령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남베트남군에 의한 것도 아니다. 당시 1만 2천명의 남베트남군이 있었지만,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모두 전투행위 중간에서 피해를 당한 민간인들뿐이었다.


    약 150 명의 공산주의 지역 간부들이 후에 근처에서 같이 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은 대부분 투아 티엔 지방에서 온 간부들이었다. 그들이 학살명령을 내린 자들이었다. 그들이 월맹 지도부에게서 지시를 받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왜? 적화혁명 이후 기소/처벌되지 않았으니까.....-잇빨중사-)


    이들이 해오던 방식으로는 본보기로 민간인을 살해하고 대부분 은익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후에의 밖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문명의 고도라는 생각보다는 공공의 학살 장소, 혹은 대량학살의 흙무덤으로 각인되게 된다. 전투 후 초기에 발견된 잘 알려진 학살/매장 장소는 전체 희생자의 작은 일부였다. 도시의 암매장 장소는 매우 발견되기 쉬운 곳이었다. 도시에서는 많은 사체를 정확히 매장할 수 없었다. 잘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이후 장소들은 찾기가 어려운 장소들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숨긴 것이 아니라 지역이 고립되고 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모래 둔덕의 사체들은 밀려온 파도들에 조가비들이 붙어서 식별이 처음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또한 사체들이 씻겨졌다. 다 마이 강변은 외딴지역이었고 공산당 간부는 힘겹게 양민들을 그리로 끌고 갔다. 3인의 공산당 간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외딴 곳이었기에 처음에는 이들이 이 학살을 은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됐었다. 가설로는, 후에에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졌을 때, 상부로부터 살해명령이 내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차후에 후에에 관한 장악력을 염두에 두었다면 말이다.


    1단계: 남베트남 지역 공산당 간부들에 의한 후에 공격 전야의 행동:

    그들은 해방될 것을 믿었으며, 도시는 고립시켰다. 그들은 빠른 군사행동에 준비가 되었었고 해방 후에 민간을 관리한 조직까지 구성한 상태였다.  방어 계획과 이후에 지원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대공시스템도 민간인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연공에 대비하는 준비도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한정된 시각이었다. 후에의 점거는 잠깐이었다.

     

    68년 2월 4일 하노이 라디오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 한 시간 만에 우리 혁명군은 후에 꼭두각시 지역기관장들의 주택을 점거했다...... 감옥과 적의 행정기관도 점거했다.....혁명군은 적의 잔혹한 적에게 형벌을 가하고 거리를 점거했다.....도시를 포위했으며 12명 정도의 잔인한 기관장들에게  형벌을 가했고, 적의 기관들의 장악력과 저항은 조각 나 버렸다.”


    후에에 머무는 동안의 민간 공산당 간부들은 처형분대를 대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요한 관리들을 처형했고, 이들의 통제를 약화시키려고 퇴각 때까지 노력했다. 파고다의 안뜰에서 20여명의 사람들이 불려졌는데, 이들에 대한 이름과 주소 등의 블랙리스트를 이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호명해서 나오게 한 뒤에 그들을 ‘혁명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그  파고다의 안뜰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임시 본부였다.


    이 인민재판은 10분 만에 끝났고 무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타당한 뒤에 모두 똑같이 곧바로 처형되었다. 시체들은 바쁘게 매장되었다. 전체 모여진 인원에서 호명되어 끌려 나온 사람들은 모두 남베트남 정부의 중요 관리들이 아니었다. 민간 고용인, 특히 경찰서에 고용된 사람들, 장교들, 통제력이 없는 하급 관리들, 또한 공식적 수장들이 아닌 지역사회의 읍장들도 있었고, 교육자와 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후에의 지식층들을 예외 없이 공격대상으로 보았다.


    (메콩 델타의 지역 공산당 간부들은 테트 공세의 와중에도,

    보복 대상을 엄격하게 선별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지역별로

    차이가 조금씩 있었다....) 


    1단계는 공산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하는 일반적인 룰을 따르고 있었다. 10년 정도를 기한으로 마을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영구적인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리스트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처형된 것은 아니다. 리스트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전투 기간 중에 후에에 있었으나 곧 탈출했다. 24일간의 기간 동안 공산당 간부들은 블랙리스트의 인물들을 찾기 위하여 매우 바쁘게 돌아다녔다. 며칠간의 노력이 있은 후에 이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후에 :  2단계

    테트 공세 시작의 며칠간의 진행으로 월맹군은 도시를 점거할 수 있다는 짧은 도취감의 순간을 가졌다.


    후에의 월맹군 점거가 일부분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월맹 지도부도 잘 몰랐었던 것 같다. 물론 월맹군은 후에에 넓게 퍼져 있었다. 도청된 2월 2일에 작성된 월맹의 전문을 보면, 상부는 공산당 간부들에게 빨리 도시를 장악하는데 주력하라고 말하고 있다.  “완전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이 기회에 빨리 목표를 획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이 간부들은 완전한 장악이 이루어진 뒤에 보복대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포로가 된 월맹군과 공산당 간부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하노이의 공식 신문인, Nhan Dan은 이 문제를 이렇게 전파시켰다.


    “마치 천둥벼락처럼, 우리의 공세는 미군과 그 꼭두각시들을 집어던졌다.....미군의 꼭두각시들은 당연한 응징을 받았다. 꼭두각시 행정기관들은 갑자기 무너졌다. 티엔 키 행정은 이러한 몰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남베트남군들은 이로 인해 극단적으로 약해졌고, 완전한 몰살을 피하지 못했다.”


    장악력이 커지면서 살해명령은 늘어나게 되었고, 그 이후는 지역사회를 자신들의 것으로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방법이다. 명령은 실행됐으나 조금 떨어져서 있던 분리 제대는 잠재적인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역 해방구의 사회적인 책무도 가지고 있었다. 블랙리스트의 실행과는 다른 문제였다. 해방이 되면 그들을 공산주의식의 사회적 제대로 구성해야 했다.


    초기 북베트남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방식이 후에에서 일어났다. 먼저 지역의 리더와 핵심적인 종교적인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치인, 불교승려, 카톨릭 신부가 주 대상이다) 이들의 대상으로는 여성단체도 있었고 젊은이들의 단체도 포함된다. 그런, 행동의 이해가 불가한 경우도 있었다. 공산당 지지자인 중학생들과 고학년의 가족이 처형된 경우도 있었다.

     

    처형분대는 어느 지역사회의 수장들 집에 찾아가 총으로 쏴 버렸다. 지역의 수장, 아내, 결혼한 그의 아들, 며느리, 미혼의 딸, 남여 고용인과 그의 아기까지 죽였다. 집에 있던 고양이까지 목 졸라 죽였고 개도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 금붕어는 퍼내어 거실바닥에 버렸다. 공산주의자들이 떠나자, 그 집에 생명체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의 ‘사회적인 단위’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2단계도 지식인들을 제거하는 강한 행동들이 보여진다. 호에는 포함한 다른 모든 남베트남에서 일어나던 일이다. 살아남은 지식인들은, 그들이 지식인들을 처형할 때 마치 후에를 오랫동안 지배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확고한 반공주의자들에게는 더욱 잔혹하게 굴었다.


    후에, 그곳은 전통주의의 성채였다. 그곳의 지식인들은 공자의 가르침과 불교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런 경향은 1920-30년대에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에게 공산주의의 장점을 떠들었다. 후에는 그것을 부정했다. 후에의 지식층은 1년 코스로 막스-레닌주의의 강의를 들어야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들은 지식층에게 슬로건이 들어간 정치적으로 야만적인 내용의 그림도 그리게 했다. 공자의 가르침이 시험대에 들어야 했고, 불교의 개념을 씻어내야 했다.


    후에의 공산주의자들은 진지한 교의를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철학적인 무지를 들어내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흉악해지기 시작했다. 물질의 소유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불교의 교리도 그들의 유물론과 충돌했다. 정당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반항했다. 후에의 지식인들은 사냥되기 시작했고 좀 더 고달픈 교육이 필요한 존재로 공산주의자들은 깨달았다. 만약 진지하게 이해를 못했더라도 공산주의를 선택하면 그들을 풀어주었다.

     


    3단계에서는 2천명이 실종되었다. 그러나 비극은 중단되지 않았다.

     


    Hue: 3단계

    불가피하게 하노이의 지휘관들은 좀 더 상황을 꾸며서 가장해야 했다. 당시, 후에의 성채에서 월맹군이 보내는 전문이 2월 22일 도청되었는데, 내용은 “후퇴를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회신은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23일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월맹군은 명령에 따라서 미군을 공격했으나 허위로 끝났다. 오히려 24개의 성채가 미군 손으로 들어갔다.


    적어도 그 이전 주의 상태로의 퇴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3단계로의 시작이 되었다. 엄폐도주-추적의 단계가 되었다. 월맹군과 간부들은 일반시민으로 위장하여 신분을 숨기고 민간으로 잠입했다. 어떤 자는 후에의 공산당 최고 간부로 도시의 사람들은 10-15단계로 나뉘었던 사람이다.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18년간 알아왔다. 그리고 그가 정치에 관심이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러한 자들은 지하로 숨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증언을 제거하다: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학살을 당했다. 사람들은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정치적 교의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같은 지역에 서로 알고 있던 이름과 얼굴이 비슷한 사람들이, 당 간부와 서민의 입장에서 마주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공산당원들은 이후에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아는 사람들을 죽였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푸 캄의 교회에 있던 사람들이다. 15명의 그곳 고등학생들이 살해당해 푸 투 소금밭에 방치되어 발견되었다. 블랙리스트 사냥은 계속 되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보복살인이 ‘혁명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후에의 학살에 대한 월맹의 관점은 하노이에서 발간된 책에서 이렇게 보여준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월맹군은 민간인들과 연합하여 방어에 동참했고, 동조했던 무장민간인들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꼭두각시 남베트남 정부의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투항했다. 이 남베트남의 장교들과 꼭두각시 사병들은  모두 숨어버렸다. 잔인한 남베트남의 기관들은 이들에게 복수를 가했다.”


    파리 평화회담에서 월맹은 후에의 학살이 ‘의견을 달리하는 지역 정치단체’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1968년 4월 26일, 하노이 자유라디오를 통해서 후에의 민간인 사체 발견을 이렇게 비난했다. “후에의 희생자들은, 단지 제복을 입은 깡패들이 저질렀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봄에 민간인들을 절멸시키려고 한 것은 남베트남 내 무장병력의 소행이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지역 정치단체의 분쟁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 사건을 규정했다.




    제목 없음.jpg


    현재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에 베트남전 사과 요구를 강하게 안하는 이유가 바로 저거죠.


    자칫하면 지금 베트남 정부가 벌였던 민간인 학살 문제가 드러나서,


    베트남 내부의 갈등이 불거질까봐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출처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8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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