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
십대의 마지막 추억으로 심령 스폿으로 유명한 터널이 있는 산에 갔을 때 일이다.
나와 친구 셋 모두 돈도 차도 없는 거지라서 버스를 갈아타면서 그 지방으로 갔다가
밤에 걸어서 집에 돌아오자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은 계획을 세우고 출발했다.
당시에는 심령 스폿 탐방 + 심야 산책 여행을 하니 두 배나 즐거운 기분이었던 것 같다.
차를 내려서 쭉 걸어서 산에 갈 예정이었는데, 차멀미가 심한 친구 A가 버스를 타고 멀미를 해서
예상보다 더 마을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급격하게 저무는 저녁 해를 곁눈질로 보면서
서둘러 마을에서 산으로 가는 길을 달려가는 우리 눈 앞에
산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것 같은 아저씨가 나타났다.
인사를 하시길래 우리도 맞인사를 하려다보니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는 날이 저문 산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우리를 말렸지만
서바이벌을 꿈꾸는 불타는 청춘에게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다지 깊은 산까지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헤어졌는데
아저씨가 말한 "밤의 산은 사람을 집어 삼킨다"는 말과
헤어질 때 "길을 잃어도 절대로 짐승들이 다니는 길로 들어가선 안 돼.
갈 때나 올 때나 깔끔한 산길로만 다녀"
라는 충고는 조금 신경 쓰였지만, 흔한 충고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래저래 산길로 들어간 시점에 이미 깜깜했다.
희미한 달빛과 손전등 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밤의 산은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서,
미칠 듯한 정적과 정체 모를 것이 내는 소리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어둠 속에서 목적지로 가는 건 힘든 일이다.
우리는 재빨리도 길을 잃었지만, 훗 Don't worry
이런 상황이 있을 줄 알고 세세하게 그려진 지도를 가져왔기 때문에
지도 담당자인 B가 지도를 꺼냈다.
지도를 따라 겨우겨우 터널에 도착해서, 터널 안을 산책했다.
특히 이상한 현상은 보지 못 했지만
터널 벽을 도려내서(조각해서) 만든 지장 보살을 보고 좀 쫄았다 ㅋ
벽 자체를 조각해서 만든 지장 보살은 처음 보는 데다가
무엇보다 그 지장 보살 조각은 좀 특이했다.
기본적으로 지장 보살에 대한 조예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지장 보살은 얼굴이나 몸 같은 게 좀 둥글둥글하잖아.
그 터널에 있던 지장 보살은 둥글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얼굴이 꽤 길고 몸에 비해 얼굴이 컸다.
게다가 약간 눈초리가 올라갔고 미소짓는 표정이어서인지
약간 여우처럼 보여서 이상했다.
조금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허약체질인데 나서기 좋아하는 A가
A : 이 지장 보살 나랑 똑같지 않냐? 거참 누가 팠는지 모델료 받아야겠는데
하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뭐 A는 여우상이라고 안 닮은 건 아니지만 AA)
A : 어쩌면 우리 엄마가 나한테 비밀로 하고 내 미모를 이렇게 빚은 걸지도 몰라
이왕 만드는 거 이런 시골 말고 도시에서 먹혔으면 하는데
나르시스트 작렬하는 A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
지장 보살 외에는 딱히 볼 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지장보살에게 먹보 C가 몰래 숨기고 있던 튀김을 뺏아서 공양했다.
(사실은 서로 먹으려고 빼앗다가 땅에 떨어져서 공양했지만 ㅋㅋㅋ)
터널을 나와서 터널 안에서 찍은 사진에 뭐가 찍혔을지 궁금하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을 내려갔다.
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 척척 나아갔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같은 길을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걸었는데
산을 다 내려갔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질 않아서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길을 잃을 만한 분기점이 없었지만,
우리가 착각했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터널로 돌아가기로 했다.
꽤 오래 걸었는데 터널에도 가지 못 했다.
대체 우리는 어디 있는 거냐고 정신줄을 놓으려던 때
지도를 보던 B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넘어졌다.
"왜 그래?"하고 B에게 전등을 비췄다.
B : 뭐, 뭐가 떨어졌어!
대체 뭔 소리냐고 주변을 둘러보니 원숭이 한 마리가 뛰어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아생 원숭이는 처음 보는데다, 이 산에 원숭이가 산다는 것도 몰라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안심되기도 했다.
B : 아 뭐야~ 원숭이네. 사람 놀래키기는... 앗!!
또 뭔가 하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잡고 있는데 가장 먼저 눈치챈 A가 소리쳤다.
A : B 이 멍청이가 원숭이한테 지도를 뺏겼어!
원숭이를 비춰보니 원숭이가 지도를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A와 B 가 지도를 다시 뺏으려고 펄쩍펄쩍 뛰어봐도 원숭이는 재빨리 숲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곤란하긴 했지만, 원숭이가 너무 빨리 사라져서 쫓아갈 생각도 못 하고
일단 산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분기점이 나와도 감으로 골라서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마음과 원숭이 사건으로 괜히 짜증이 나서
원숭이를 욕하기도 하고 좋은 상대였다고 칭찬하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생각보다 빨리 분기점에 도착했다.
오른쪽, 왼쪽 어느 길로 갈까.
길을 비춰보고 지나온 길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멍청한 텅빈 머리를 쥐어짜보니
"왼쪽 길에 뭐가 있어!" 하고 A가 가리키는 쪽인 왼쪽 길을 살펴보니
세상에! 터널에서 봤던 여우 지장 보살이 있는 게 아닌가.
왔던 길에 저런 건 본 적 없었다.
괴이 현상이 일어났다고 놀라기보다는,
어디가 옳은 길인가를 고를 수 있나 고민하던 우리는
왔던 길에 없던 지장 보살이 있다 = 틀린 길 이 아닌가 하는 것을 검증하느라 열중했다.
그 결과 나, B, C는 오른쪽 길을 고르자고 주장했지만 A가 반대했다.
이건 지장 보살의 본체인 자신을 도와주려는 지장 보살의 인도하심이라고 주장하며
생각을 꺾으려 들질 않았다.
B : 이런 급한 때 장난 치지 마!
A : 나는 진심이야!
A와 B가 말싸움하는 옆에서 허둥대던 나와 C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 속에서, 오른쪽 길에서 지도를 든 원숭이가 갑자기 출몰했다.
생각보다 너무 이른 재회에 놀라기도 했지만
원숭이가 "이쪽 이쪽"하고 말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취해서 꿈 꾸는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곤란해하는데 A가 억지로 B를 왼쪽 길로 끌고 갔다.
나와 C는 A가 너무 억지로 행동해서 "저거 귀신한테 홀린 거 아냐?"하고 의문이 떠올랐다.
A를 말리려고 달려갔는데, 두 사람 앞까지 와서 얼었다.
A에게 왼쪽 길로 끌려가던 B가 보통 날뛰는 게 아니었다.
출혈된 눈이 흰자위를 드러내고 침을 흘리면서 이를 꽉 물고
"싫어! 원숭이! 원숭이가 있는 쪽으로 가야 해!! 이 길은 싫어!! 원숭이 길이 좋아!!"
하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A : 야 거기 느림보랑 멍청한 뚱보! 와서 빨리 도와줘!!"
(A는 평상시 그대로였다!!)
하고 시종일관 입이 거칠고 사람을 무시하는 A의 원래 성격이 드러난 걸 느낀 나와 C는
날뛰는 B를 꽉 누르고 왼쪽 길로 달려갔다.
지장 보살을 지나치고나니 B가 얌전해지길래 방심했다.
우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드디어 B가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 거리더니
갑자기 "으악!"하고 소리치더니 단숨에 길을 뛰어서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B의 질주에 우리는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B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결국 왼쪽 길이 맞는 길이었는지, B를 다시 붙잡으니 산기슭에 나올 수 있었다.
그대로 산을 내려갔는데 그 사이에 B에게 무슨 질문을 해도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라고만 하고
C가 몰래 숨겨놨던 우마이보(과자)를 10개 정도 먹었다.
결국 마을에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왔는데
마을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B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끈질기게 질문하던 나를 A가 나무랐다.
어쩔 수 없어서 C 가방을 뒤져봤더니 초컬릿 밖에 없었고,
초컬릿을 좋아하는 A에게 빼앗겼다.
왜 A가 왼쪽 길을 골랐는지, B는 왜 미쳤는지, 그 후 왜 질주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 하면 짜증이 나는 성격인데다 초컬릿까지 빼앗긴 분풀이로
C의 귀를 잡아당긴 결과, C가 열받아서 나를 팼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우리 동네로 돌아왔는데 괜시리 머쓱해져서 헤어졌다.
그 후에도 A와 B가 진상을 밝혀주지도 않고,
그 일은 터부 시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아쉬웠다.
하지만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서 C와 놀 때 (산에서 돌아오고 이틀 지나서 화해함)
C가 A와 B 각자 따로 들은 진상을 나에게 알려줬다.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주냐고 했더니 "넌 입이 가볍잖아"라며 비웃었다.
(지 입은 안 가벼운 줄 아나 뚱땡이가..)하고 생각했지만 얌전한 청자의 태도를 취했다.
일단 A 쪽 이야기인데,
A는 왠지 처음부터 지장 보살에게서 그리운 느낌이랄까,
뭔가 자기를 지켜주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서도, 터널에서도 무섭지 않았는데
원숭이가 나타나고나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원숭이가 지도를 뺏아 달아난 뒤도 무언가가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왼쪽 길에 지장보살을 발견했을 때는
"튀김 공양을 받은 보답이구나. ㄳㄳ"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길을 잘못 들어도 다시 돌아가면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별 생각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숭이가 다시 나온 후 "절대로 오른쪽을 골라서는 안 돼!"하고 느꼈다고 한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B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원숭이가 나타난 후 B의 눈 초점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이거 귀신한테 홀린 거 아냐?"하고 생각이 들어
원숭이에게서 떨어지기 위해서라도 왼쪽으로 끌고 간 것이다.
B가 미친 후, 우리가 얼어 붙었을 때 많이 당황했다며
"B만 홀린 게 아니라 저 놈들도 홀렸나..."하고 내심 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B가 질주한 후, B가 우리 뒤에 있던 무언가에 반응하던 걸 눈치챈 A가 뒤,
그러니까 분기점 주변을 손전등으로 비춰보니
그 원숭이가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원숭이 표정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게 악의에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B 이야기.
B는 A와 반대로 터널에서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산에 들어서자마자 쫄았던 것 같지만 ㅋㅋ)
지장 보살을 볼 때 공포감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원숭이는 그냥 야생 원숭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분기점에서는 A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격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거기부터 기억이 없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자기를 꾸욱 누르면서 빤히 보고 있어서
'이것들이 집단 게이였나!'하고 쫄았다고 한다.
(아마 이 말은 괜히 센 척하려고 한 말이 틀림없다 ㅋㅋ)
사태를 파악하려고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뒤에. 아까까지 우리가 서 있던 분기점에
아마 3, 4m 정도 눈이 빛나는 괴물이 우리를 보고 있어서 서둘러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에는 무섭기도 하고, 영문도 모르겠고,
우리가 게이라서 자기를 덮치지는 아닐까 걱정하는데
나는 시끄럽게 계속 물어대고
여차하면 혼자서라도 도망치려고 몸에 힘을 주고 기를 모으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제가 십대에 체험한 산에서 있었던 신비한 일의 전말입니다.
꽤 오래 전이라 약간 각색한 부분도 있겠지만...
쓸데 없이 긴 문장이라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