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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손가락을 하... 하나가 아니라 다... 다섯개나?]
[지! 지독한 놈! 하나만 내밀었던 건 사실은 나를 안심시키려던 계략이고, 진짜 속내는 내 손가락 전부를 가져 가겠다? 어찌 이리 무서운 놈이... 서... 설마 나의 심리를 꿰뚫었단 말인가?]
거듭된 충격과 공포, 마사치카가 청연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이마는 물론 등줄기마저 땀으로 젖은 지 오래다. 그것이 초대권 몇 장 더 얻겠다는 얄팍한 속셈인 줄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떤다. 마침 청연이 그의 환심을 사고자 억지로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자, 그 효과는 배가된다. 웃는 건지, 화난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어색한 표정이 공포감을 극대화 시킨 것이다.
[아... 악귀(惡鬼)다! 악귀(惡鬼)의 미소다! 극악무도한 놈! 소... 손가락을 모두 바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뜻인가?]
마사치카의 얼굴이 온통 공포와 참담함으로 얼룩졌다. 그에게 있어 청연은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궁극의 악(惡), 그 자체였다. ‘나의 조상인 위대한 대 음양사 세이메이조차, 과연 이 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허망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손가락 모두를 잘라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망설이는 그에게 청연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에이... 쩨쩨하긴! 야! 산아! 넌 임마 다음에 봐! 이번엔 내가 효도 좀 하자!”
“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청연의 뚱딴지같은 말에 설 산이 반문해 보지만 이미 청연에겐 망설임도 미안함도 없다. 대답대신 마사치카를 향해 손가락 세 개를 꼽아 보이며 뻔뻔스레 말했다.
“3장으로 타협하시죠? 그래도 부모님은 모시고 가야지...”
[무... 무서운 놈... 내... 내가 망설이는 걸 알고... 이번엔 3개를... 진정 악독한 놈이다! 처음엔 새끼손가락 한 개로 용서해 주는 척 안심시켜 놓곤, 곧장 5개를 꼽아 나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제... 마치 아량을 베풀 듯 3개의 손가락을 잘라내는 걸로 나의 마음을... 나, 대 음양사 세이메이의 후손 아베노 마사치카의 생각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지않은가. 봐라... 난 이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손가락 두 개를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뻐하고 있지 않냔 말이다! 악귀(惡鬼)! 저 놈은 진정 악귀다! 지옥에서 태어난 악마의 아들, 살아 숨 쉬는 배덕(背德)의 후손!]
*******
같은 시각, 서울시 신대방동에 위치한 청연의 집, 늦은 저녁을 준비하던 주부 신 모씨는 때 아닌 찬바람에 재채기를 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누가 내 얘기를 하나? 귀가 왜 이리 간지러워... 그나저나 이청연 이 새끼는 밥 때가 됐는데 왜 집구석엘 안 기어들어와! 싸구려 삼류 잡지사 기자가 무슨 벼슬이랍시고... 어이구, 말을 말자! 그나마 그 백수가 취직이라도 했으니 사람구실 하는 거지... 몇 년씩 놀던 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내 속이 다 썩어 문드러진다. 저거 언제 사람 되고, 언제 효도 할라나... 어이구! 속 터져!”
터져 오르는 울분을 뒤로하고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 그녀가 도마 앞에 섰다. ‘딱’ ‘딱’ ‘딱’ 신경질적인 칼질에 오이 세 개가 순식간에 토막이 나 뒹군다.
*******
역시 같은 시각, 어인일인지 이번엔 청연의 표정이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마사치카가 돌연 손가락 두 개를 꼽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三つは、マンソ(세 개는 많소), ちょうど2つの切れることくださるオ(두 개만 자르게 해주시오.) お願いハオ(부탁하오) 指二つには、影をつかうことができオプソ(손가락 두 개로는 그림자를 부릴 수 없소)“
떨리는 눈빛에서 간절함이 엿보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의 네고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외려 단호해진 표정의 청연은 눈까지 부라리며 그의 이유 있는 네고를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자 봐! 엄마, 아빠, 그리고 나! 이렇게 꼭 세 장이라야 돼요. 아니 무슨 마술사가 이런 걸 깎아! 깎을 걸 깎아야지! 안 돼! 난 받아들일 생각 없어! 못 먹어도 고야! 세 장!”
실로 뻔뻔스런 작태였다. 오지랖, 행동의 청순함과 더불어 그를 규정짓는 3대 요소인 ‘극단적 물욕’이 발동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지켜보던 설 산마저 인상을 찌푸리건만, 청연은 단호하다. 어떻게든 3장의 초대권을 받아 내겠단 의지로 눈빛이 불을 뿜는다. 아... 자신의 욕심이 누군가에겐 잔혹함인 것을 알기는 할까? 끝내 낙심한 듯 참담한 표정의 마사치카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てよい、私セイメイの子孫ではなく、この恥辱を忘れずに、必ず報いられるでしょう(좋소, 나도 세이메이의 후손, 대신 이 치욕... 잊지 않고 보답하리다.)”
말릴 새도 없이 내려진 마사치카의 결단, 손가락 두개가 더 잘리고, 일방적인 마술쇼의 희생양 3개가 바닥에 나뒹군다. 이렇듯 홀 중앙은 마사치카가 흘린 피로 낭자했지만, 이해의 부족은 착각을 만들고, 착각은 애먼 이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오오! 마사치카! 대체 어떤 술법이길래 손가락 두 개를 더 잘라낸 것이냐! 과연 무엇을 보게 될지!]
[잘려진 손가락이 세 개... 분명 요괴를 셋이나 지옥불에서 끄집어내겠다는 뜻! 기대된다!]
뜻하지 않게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버린 마사치카, 하지만 어쩌랴! 그들의 바람과 달리 마사치카의 몸과 정신은 이미 만신창이, 청연의 물욕과 정신적 청순함에 산산이 짓밟힌 그는 점차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심한 고통과 출혈 때문이었다.
[의... 의식이... 의식이 흐려진다. 출혈 때문인가?]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마사치카의 시선, 그 뿌연 잔상 위로 악귀가 다가왔다. 멀쩡한 손가락을 빼앗아 간 것으론 모자랐을까? 악귀는 마치 마사치카를 조롱하듯 잘려진 손가락을 손에 쥐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이야! 아저씨 이거 소품 진짜 리얼한데요? 고무? 실리콘? 우왕! 피도 진짜 같아... 킁킁! 산아! 이거 피비린내 나는 거 봐!”
누가 들어도 분명한 순도 100%의 주접이건만,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마사치카도 청연과 다를 바 없었다. 하필 그 소통의 부재가 또 다시 망상을 낳을 줄이야. 마사치카의 풍부한 상상력이 창조해낸 극단적 해석, 그것이 그를 계속된 악몽으로 이끌었다.
‘비루한 육신 속에 있지만 나는 사실 진정한 악귀(惡鬼)의 현신, 악(惡)의 대마왕(大魔王)!, 한갓 음양사 따위가 나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손가락 세 개로 대가를 치루었음에 감사하라. 냄새나는 인간의 아들아! 다음엔 내 필히 네 목을 칠 것이다!’
[여... 역시! 저 놈은 인간이 아니야!]
그런 그의 망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악귀는 돌연 잘려진 손가락 하나를 제 주머니에 챙긴 후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의 말까지 퍼부었다.
“저 이거 기념으로 하나 가져가도 되죠? 너무 진짜 같아서 엄마 보여드리려구요. 히히히”
[저주야! 저주! 분명해! 타인의 살점을 이용해 내리는 금단의 저주가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저 악귀가 내 손가락을 지옥으로 가져가 저주를 걸 셈이야! 헤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의 저주를! 무서운 놈! 손가락을 잘라 낸 것도 모자라 저주를 걸어?]
뼈에 사무치는 증오심에 마사치카의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러한 증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청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스멀스멀 밀려오던 망상의 파도가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차오르고, 찰랑이는 수면 밑, 잠식된 마사치카의 마지막 의식이 힘없이 무너졌다.
[으... 으윽...]
“저기요! 저기요! 아저씨 괜찮으세요? 무료 초대권 3장... 아직 안 주셨는데! 벌써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 나 받아야 되는데...”
청연이 다급히 흔들어 깨워보지만, 마사치카는 이미 혼절한 후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외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약 망상의 바다에서 헤어 나온 마사치카가 진실의 민낯을 마주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분명 엄청난 후회와 분노로써 되돌아올 것이다.
멀쩡한 손가락 세 개를 스스로 잘라낸 천하의 바보 멍청이란 오명과 함께...
“뭐지? 왜 마사치카가 쓰러진 거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무언가 술법을 쓰려 했던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제 손가락을 세 개나 희생하고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니!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이냐!”
“조금 더 기다려보시지요. 너무 엄청난 악귀를 소환하느라 시간이 드는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건 좋은데! 왜 저 놈이 넙죽 엎드려 기절한 놈 마냥 꼼짝도 안 하냔 말이다!”
“그.. 글쎄요... 한 번 깨워 볼까요?”
“깨우는 건 벌써 저기 저 얼간이 기자 녀석이 하고 있잖아!”
스기야마의 언성이 점차로 높아지고, 부하들의 어리둥절한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쳐갔다. 무엇을 예상하든, 어떤 결말을 원하든, 그것만은 교묘히 피해나가는 청연의 엉뚱함이 만들어낸 혼란이었다. 물론 진실은 따로 있고, 내밀한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가슴을 치며 후회할 일이지만,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이 그들을 점차 마사치카가 수몰된 망상의 바다로 이끈다. 그리고 그 재난의 단초는 내내 지근거리에서 마사치카와 말을 귀담아 듣던 한 수하의 귀띔으로 인해 결국 현실이 된다.
“뭐야? 봉신당의 실체가 사실은 저 얼간이 자식인 거 같다고?”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라면... 어떻게 저리 천연덕스레 바보 행세를 하겠습니까?”
“바... 바보... 저... 저 얼간이 놈은 정말로 바보같은데...”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 대단한 아베노가의 마사치카가 제 손가락 세 개를 고스란히 잘라 바쳤습니다. 분명 보통 놈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세이메이의 후손이라 떠들던 마사치카가 꼴사납게 기절한 모습을...”
“그... 그럼 이제껏 나와 사치코에게 보인 저 놈의 행동들이 다...”
“그렇습니다. 저희를 기만한 겁니다.”
“분명 기... 기자라고 했는데...”
“위장입니다! 저 사악한 얼굴을 보십시오. 애초에 저런 멍청이가 기자라는 거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 내가 속다니... 무서운 놈! 나의 계략을 간파하고, 오히려 자신을 미끼로 함정을 파! 그럼 저 놈은! 저 놈은 뭐란 말인가?”
격앙된 표정의 스기야마가 설 산을 가리킨다. 큰 키에 범상치 않은 눈빛,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온다.
“당연히 미끼 아니겠습니까?”
“미... 미끼?”
“제가 짐작컨대... 저 놈은 괴력은 있으나, 실제론 별 볼일 없는 놈일 겁니다. 보십시오. 사실 생긴 것만 번지르르하지, 실속 없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아마 저 이청연이란 놈의 조수나 제자에 불과할 겁니다.”
“그렇군. 좋아... 이제라도 간파했으니 다행이군... 이제 더는 속지 않겠다. 이청연 네 이놈...”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분기탱천한 스기야마가 이를 악문다. 그제야 바라보니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혼절한 마사치카 곁에서 잘라진 손가락을 주워 들고 장난까지 치는 청연의 여유로움. 청연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내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조수(?) 설 산의 불안함. 겉모습의 선입견을 벗어던지니 어느새 망상의 파도가 그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래 어쩐지 이상했어...”
문득 스기야마의 표정에 아련함이 묻어났다. 복잡해진 머릿속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옛 기억의 잔재다. 굳게 입을 다문 채 지나온 일들을 떠올리는 스기야마. 모든 문제의 근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
“호랑이 가문에 병신이 태어났어...”
“천하의 스기야마 가문도 운을 다한 게지...”
“간사이의 호랑이도 이젠 옛 말인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진 않지만 끙끙대는 그 소리가 고통을 미루어 짐작케 했다. 스기야마 토오루, 아홉 살, 소년은 홀로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눈물을 삭혔다. 섬뜩한 눈빛은 물론 또래보다 배는 커 보이는 덩치 또한 예사롭지 않지만 결국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누가 이 아이를 울게 만들었을까? 허나 누구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아이 또한 궁금했다.
‘왜 나는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누군가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천형(天刑)의 벌(罰)’, ‘절름발이 호랑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 아홉 살 어린 소년이 감내하기엔 너무도 잔인한 말들이 서슴없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어디에도 소년이 기댈 곳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세상의 비웃음을 이겨내는 것만이 소년에게 주어진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이가 짊어진 기대와 비극, 그것은 열 달을 꼬박 채우고 태어 난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간사이의 대호’, ‘우량아’란 평범한 단어론 설명이 안 될 커다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우렁찬 울음에 거대한 스기야마 저택이 들썩였다. 하지만 이 저주받은 호랑이는 자신의 첫 번째 먹이로 제 어미를 삼켰다.
“산모가 감당하기엔 아이가 너무 컸습니다.”
“이 경우 아이를 사산 하는 것이 맞지만, 아이를 낳고자 하는 산모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제 어미를 문 배덕한 호랑이’ 뒷말은 남을지언정, 그것이 아이의 비범함을 폄하할 이유는 되지 못 했다. 아니 외려 그 범상치 않은 태동은 모두의 기대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 됐다.
“아이가... 이상합니다. 비대한 상체와 달리 하체가 전혀 힘을 받질 못합니다.”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혹 심리적인 이유는 아닐지...”
“난치성 기형(奇形)입니다. 치료할 방도가 없습니다.”
‘걸음마를 떼지 못하는 아이’, ‘짐승처럼 네발로 기는 아이’, ‘기어가는 호랑이’ 채 젖을 떼기도 전에 시작된 거동의 불편함이 잔혹함으로 아이를 수식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뚜렷한 대답을 내놓진 못했다. 그저 치료 불가능의 난치성 질환이라 말했다. 현대의학으로도 규명 할 수 없는 기이한 병이라 했다. 그는 그것을 타고난 숙명이라 믿었고, 어머니를 죽게 만든 벌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나이 마흔 무렵, 우연히 만난 중국인 점쟁이 노파가 그런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어깨 위 쌓인 업(業)이 이루 말할 수 없군... 그러니 두 다리가 배겨내질 못 하지...”
“어찌 아셨소?”
“안간힘 쓰지 마! 소용없어... 당신이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스스로의 업이 아니야. 아주 오랜 세월... 조상의 대에서부터 켜켜이 쌓여온 무거운 원한! 당신은 그저 그걸 물려받았을 뿐이지...”
“조... 조상의 원한?”
“이리도 많은 업을 쌓으려면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쯧쯧... 안타깝구먼... 쿨럭쿨럭”
“이봐 노파! 더 말해봐! 돈은 달라는 대로 주지!”
“길게 말해 뭐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난 그저 볼 뿐이야. 자 봐!”
점쟁이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반짝인다. 눈이다. 주변의 어둠이 가려 놓았던 노파의 의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회색의 유리눈알이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내뿜고, 스기야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을 것을 잃으니, 세상의 것이 아닌 게 보이더군... 그러나 내 힘은 여기까지야. 단지 볼 뿐, 어찌 할 수 있는 힘이 이 늙은이에겐 없어. 그러나 원한다면 방법 정돈 알려주지”
“방법? 그... 그것이 뭐요!”
“선대의 업(業)을 깨뜨려... 그때로 돌아가 모든 걸 되돌려 놓는 게야!”
“그게 무슨 소리요!”
“신경(神鏡)... 저주를 머금어 혼을 비추고 또한 과거의 업을 푸는 다른 세상에서 온 신물(神物) 그걸 찾는다면... 자네의 업도... 꼬인 인생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그때로 돌아가 과거의 업을... 꼬... 꼬인 인생을... 풀어?”
스기야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처음 듣는 신경이란 존재도 그렇지만 노파의 이야기 어디에도 상식적인 명확함은 없었다. 선대의 업,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모든 걸 되돌려 놓는 다는 것, 그야말로 기이한 이야기뿐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지만 어찌할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노파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봐 노파! 어... 어디갔어!”
“모... 모르겠습니다. 부.. 분명히 방금 전까진 있었는데... 어찌 된 걸까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나! 당장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시... 신경...?”
기묘한 경험은 그에게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직을 관리했고, 나름의 악명도 떨쳤다. 하지만 삶은 무기력했다. 단지 가업(家業)을 잇는 것에 불과했고, 어떠한 목표도 가지지 못했다. 헌데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중국을 모두 뒤져, 돈과 인력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아. 삼합회(三合會)와 휘하 흑사회(黑社會)의 힘을 빌려도 좋아. 원하는 건 다 준다고 해. 찾는 건 하나다. 신경! 그걸 내 앞에 가져와!”
끈질긴 노력과 집요한 추적, 무려 20년도 넘는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는 결국 원하는 바를 차지했다. 허름한 만주의 한 고미술상, 삼합회의 간부는 소개비조로 10억엔이란 거금을 요구했지만, 협상은 쉽게 타결됐다.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히 서고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 앞에 금액은 의미가 없었다.
“이... 이것이 신경?”
전설 속의 마경(魔鏡), 저주를 품어 안은 신비한 거울, 청동의 빛바랜 푸른색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해석할 수 없는 기묘한 문양이 그의 욕망을 들끓게 했다. 긴 세월 감내해온 굴욕적인 생의 억압, 천형의 벌을 씻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더 큰 좌절을 낳았다.
“어째서! 어째서 되지 않는거냐! 마사치카!”
“그... 그것이... 분명 요사스런 기운이 뿜어져 나오나 단지 그것뿐,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거울속의 요물이 동(動)하지 않으니 저로서도 어찌 해야 할지...”
“무능력한 놈! 무가치한 인간! 세이메이의 후손이란 자가 이리도 변변치 않단 말이냐!”
신경(神鏡), 켜켜이 쌓인 선대의 업을 풀 신물(神物)은 찾았으되, 그 사용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 희대의 대 음양사 세이메이, 그의 후손이자 당대 최고의 음양사라 자처하던 마사치카조차 신경의 힘을 끌어내지 못했다. 계속된 실패, 거듭된 좌절, 하지만 스기야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실전된 고문서들을 통해 신경의 내력을 수소문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맞이한 신경의 민낯,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멀지 않은 바다건너의 땅 한국, 곰팡이 슨 고문헌에서 발견한 찢겨진 단서, 수백 년 전 신경의 마지막 소유자였던 잊혀진 이름 하나를 기어코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봉신당(奉神堂)...”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운명조차 그의 집념에 감탄한 것일까? 수십년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던 잊혀진 이름이 때 맞춰 수면위에 떠올랐다. 그것도 간단한 인터넷 검색이면 족했다. ‘월간 썬데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잡지의 토막 기사가 ‘봉신당’ 세 글자만 검색해도 줄줄이 쏟아졌다. 그는 곧장 수하들을 이끌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곤 먼저 봉신당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해당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원간 썬데이 기자 이청연입니다.”
멍청한 얼굴에 어리바리한 행태, 기사를 작성했다는 아둔한 담당기자 놈은 돈 몇 푼에 쉽게도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모두 털어 놓았다. 그 내용의 대부분이 ‘약간 사이비성이 있다.’ ‘박수무당을 하는 젊은 놈이 싸가지가 없다.’등 애매한 내용이었으나, 그가 다른 루트를 통해 알아본 봉신당의 모습과 모든 점이 일치했다. 게다가 이 기자란 녀석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물욕(物慾)도 상당해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집어주니 직접 봉신당의 박수를 그의 앞에 데려오겠노라 공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너무 쉬웠다. 물 흐르듯 흘러가던 일련의 과정들이 어느 순간 거대한 벽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성큼 눈앞에 다가온 중대한 결말 앞에서 거칠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기자라는 직함과 저속한 행태로 모두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여 온 간악한 자...
스기야마가 간과했던 단 하나의 이름 ‘이청연’, 그가 숨겨왔던 이빨을 들이민 것이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 망상에 사로잡힌 자에겐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출처 |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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