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하게도 저는 직설적으로 답변부터 먼저 좀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투우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에 맞서 싸우는 반론을 제시하는게
사실을 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투우는 예술입니다.
희생되는 소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제 감각은 그러한 연민보다는 생사의 영역선상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해져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강렬에 감탄합니다.
왜 헤밍웨이와 피카소, 달리 같은 예술가들에게 투우가 그토록
강렬한 영감을 주는지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투우의 잔인성에 분노하는 이들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존재들에게는 마땅히 천수를 누릴 권리
가 있습니다. 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평생 소고기를 한번도 먹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동물박애주의자가 얼마나 될까요? 몇 되지 않겠지만 저는
그런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합리성과는 별개로
자연의 이치라는 어쩔 수 없는 섭리또한 존재합니다. 야생의 세계를
설명하는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약육강식, 생존경쟁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들요.
인류가 이념으로 극복하려 하고 문명또는 문화라는 시스템으로 통제하고
어떤 면에서는 승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인간 사회의 합리성은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죠. 인간의 한계, 실존의 한계, 우리의 존재와 자아를 넘어선
곳에 있어서 도저히 닿지 않는 영역,
그 섭리라는 이치 안에서 우리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안에 죽음이란
가장 숙명적인 한계 조건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얼마나 찾아올 수 있을까요?
수천년 인류의 역사에서'죽음의 조건'에 대한 극복이란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종교도 완벽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아직도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고, 불교는 차라리 그런 질문 자체를 중단하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차라리 가장 완벽한 죽음에 도달하라는 답을 내놓습니다.
그 어떤 해석을 달리 해도 열반의 의미는 곧 자아 작동의 중지라고 할 수 있죠.
그것은 곧 삶속에서 죽음을 체험하라는 의미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다가가기힘들죠.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 존재의 모순을 벗어날 수 없죠.
죽어야 하기 때문에 불멸을 소망하는 욕망또한 우리들이 평생 벗어날 수가 없는 짐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그 죽음이란 문제를 즐기는 방식으로 감내하기 위해 인간을 그것을 또한
문화화 시키는 겁니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는 검투 경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격투기를 통해서 자신의 강함을 타인을 통해 대리체험을 할려고 합니다.
사실 모든 스포츠의 경쟁 심리 속에는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과 같은 기제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보다 더 깊이 파고들면 결국 타자와의 대결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귀결된다는 변증법적 역설에 도달하게 되죠. 결국 어떤 의미에서 모든 스포츠
는 죽음과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암벽등반(혹은 야마카시)이라든지 모터 레이싱이라던지 죽음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스포츠가 우리들 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투우또한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문제가 된다면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바로 눈앞에서 거스르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죠.
민주주의 시대로 오면서 인류는 생명의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높이 사게 됐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경우를 제외하려 하고, 그 가치를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서 세계 전체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 자체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는 것인가요? 우리 인간이 죽음을 정복
할 수가 있나요? 어떤 문화학자는 인류가 죽음을 기피하는 관념에 너무 집착하면
그럴 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강화되고, 육체와 젊음에 대해 병적으로 열광하는 문화가
도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아도르노, 칼 융들이 대표적이죠.
이미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연장의 꿈을 그토록 열망한다는 것은
곧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 시대는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투우를 '신성한 죽음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우는 인류가 문명화를
통해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결코 본능적으로 잊을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향수를 일으
키는 무엇이 있습니다. 투우는 낭만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물론 모든 이들이 제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저는 투우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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