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으로서 80년대 중반 출생자들까지는 누구나 한국 축구 사상 최대의 기적이자
가장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하는 93년 10월의 도하의 기적.
94년 미국 월드컵에 배정된 아시아의 티켓수는 겨우 2장.
94년 미국 월드컵 본선행을 위한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패하고 말았다.
한국은 낭떠러지 끝에 놓였다.
이제 우리가 미국 월드컵 본선에 나가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마지막 경기를 2골차 이상으로 무조건 이기고
사우디-이란전과 일본-이라크전에서 사우디나 일본이 비기거나 패해주는 기적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한국-북한, 사우디-이란, 일본-이라크의 경기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북한전 전반을 0-0으로 마친 한국은 극도의 긴장감에 빠졌다.
후반 들어 한국은 고정운, 황선홍, 하석주의 골로 북한을 3-0으로 앞섰다.
이제 사우디와 일본의 불행만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사우디는 이미 이란을 여유있게 따돌리고 있었고
일본도 이라크에 앞서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은 탈락이 확정적이었다.
상황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시간은 자꾸 흘러만 갔다.
결국 주심이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고 한국선수들은 풀이 죽은채
경기장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사우디는 이미 이란을 4-2로 누르고 본선행을 확정했고
일본은 이라크를 2-1로 앞선 채 후반전 로즈타임이 진행중이었다.
우리 국민들도 선수들도 모두 탈락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하게 한국-북한전의 종료휘슬이 울리고 26초가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한국벤치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라크의 자파르가 경기 종료 직전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2-2 무승부가 된 것이다.
풀이 죽어있던 한국선수들이 미친 망아지들처럼 펄쩍 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선수들은 모두 그자리에 주저 않아 울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는 "26초의 기적" 또는 "도하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감동의 순간을 맞이했고
사상 첫 월드컵 출전이라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던 일본 열도는 통곡 또 통곡을 해야 했다.
이로써 한국은 승점 6점으로 일본과 동률을 이뤘고 골득실(+5)에서 일본(+3)에 앞서
천신만고 끝에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지었다.
본선에 오른 한국의 조편성은 최악이었다.
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 최강인 독일, 유럽 전통의 강호 스페인과 한조에 묶인 것.
그 뿐만 아니라 섭씨 40도에 달하는 무더위와도 싸워야했다.
하지만 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은 16강에 우리 선수들이 가장 큰 투혼을 발휘한 대회,
가장 16강에 근접했던 월드컵 본선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게 된다.
스페인과의 1차전에서 한국은 내리 2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후반 중반 홍명보의 프리킥이 스페인 수비수 이에로의 몸에 맞고 골문으로 빨려들어가는
행운의 골로 추격했고 후반 종료를 얼마 앞두지 않고 서정원이 오른발
인프런트로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며 2-2로 비겼다.
볼리비아와의 2차전. 이 경기만 승리한다면 대망의 16강 진출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한국의 1승 상대도 볼리비아였고 전 국민의 기대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경기내용은 예상대로 한국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하지만 골운은 따라 주지 않았고 한국은 단 한 골도 터트리지 못하고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황선홍 하석주 김주성이 숱한 골기회에서 한 골만 넣어줬다고 해도
한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다리지 않고 이 자리에서 16강의 감격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상대는 전 대회 우승국 독일이었다.
비길 수만 있다면 와일드카드로 16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경기에 임했지만
세계 최강 독일의 클리스만의 대활약으로 전반에만 3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었다.
후반 초반 황선홍이 마침내 첫 골을 터트렸다.
이후 홍명보의 그림 같은 중거리골로 2골을 독일을 압박해갔다.
더위에 이미 지친 독일을 상대로 한국은 무섭게 몰아부쳤다.
이 분위기라면 역전도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끝내 동점골을 터지지 않았고 한국은 2무1패(승점2)로
역대 최다 승점을 올렸다는 성과로 만족한 채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