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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87214
    작성자 : 순댓국먹고파
    추천 : 21
    조회수 : 1552
    IP : 192.136.***.4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16/04/11 18:05:05
    http://todayhumor.com/?panic_87214 모바일
    (자작단편글) 광대의 얼굴
    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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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의 얼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읍내, 동네 구멍가게와 방앗간 벽을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 놓인 제설함을 집 삼아 몸을 녹이는 예닐곱 살쯤 들어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양갈래로 서툴게 묶은 머리카락은 얼마나 오래 씻질 않았는지 고무줄이 머리기름으로 반들거리면서 거의 끊어질 듯 간신히 머리꽁지를 부여잡고 있었고, 때가 탄 분홍색의 땡땡이 무늬 천 원피스는 선회색으로 바래어 얼핏 봐도 아이의 부모 뻘 가까운 연륜으로 보였다.

      아이는 가진 것이 없었다. 가정이 있을 리 만무했으며 돌봐 줄 부모도 없었다. 나이답지 않게 축 쳐진 눈주름살 아래 무채색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조차 없었다. 아이가 언제부터 골목길에 버려진 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교회를 다니는 파란색 지붕 아주머니는 사탄의 자식이라며 아들들에게 골목을 피해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공병을 주워 팔아 연명하는 리어카 할아버지는 이름 모를 베트남 아가씨가 아이를 낳아 버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갔다며 혀를 끌끌 찼다. 다방 레지 미스 김은 화냥년의 딸이라며 더러움에 몸사리를 쳤다. 아이는 이름마저 없었지만, 아이의 존재와 출생에 관한 소문은 담배 연기 피어오르듯 무성했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삶을 연명하는 행위가 이 어린 아이의 하루 일과였다. 아이에겐 말을 주고받을 상대조차 없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있으면서 말동무 역할을 하는 인형도 없었다. 말하는 법을 배웠는지조차 아무도 몰랐다. 느즈막히 잠에서 깨어 제설함 뚜껑을 열고 나와, 벽에 기대어 목적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앉아서 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이 아이의 하루 일과라면 일과였다. 비가 오거나 찬 바람이 세게 불면 아이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쥐 죽은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빼액하고 울어 제껴버리는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어떤 상황에서도 이 여자 아이는 무표정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후벼 팔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봐도 감정이라는 것을 찾아내기 힘들 법하다. 감정이라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은 듯한, 먹물 한 방울조차 묻지 않은 순백의 종이일지, 오히려 그림 위에 그림을 수백 번 덧칠하다 못해 아예 까맣게 적셔져버린 종이일지 알 수 없었다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아이의 얼굴에서 무기력함 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달빛을 전등삼아 노숙하는 걸아(乞兒)에게 통이 크고 낡은 바지를 질질 끌며 절뚝절뚝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산발의 머리에 소주로 병나발을 불며 딸꾹거리는 자의 낯짝은 어찌 봐도 거렁뱅이, 주정뱅이였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라면 희미한 빛 아래 보이는 허여멀건하게 분칠을 한 그의 얼굴이었다. 눈썹을 숯검댕으로 문댄 듯 우스꽝스러운 분장에 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칠한 입술은 마치 광대 같았다. 비틀거리며 팔자걸음을 걷던 광대의 눈이 멈춘 곳은 벽에 기대어 쓰러진 듯 잠들어버린 아이였다. 광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년은 뭔데 새파랗게 어린 꼬마놈이 세상은 지 혼자 다 산 듯 자빠져 있어. 그리고선 아이가 기절한 듯 기대어 잠든 벽에 광대 역시 술기운이 퍼진 듯 쿵 기대어 쓰러진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느즈막한 오후에 아이가 햇빛에 눈이 부셔서 일어났을 때는 몸 위로 퀴퀴한 술 냄새가 나는 코트가 덮인 채였다. 맞은 편 벽에 코트의 주인쯤 돼 보이는 광대가 한 손에 소주병을 든 채로 딸꾹거리며 반쯤 풀린 눈으로 아이를 째려보고 있었다. 일어났냐. 광대가 중얼거렸다. 아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서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광대가 되물었다. 너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냐, 말을 할 줄 모르는 거냐, 아니면 너까지 나를 개무시하는 거냐. 이번에도 아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광대가 소주병을 아이의 머리에서 한 뼘도 채 되지 않을만큼 가깝게 벽에 던졌다. 소주병이 깨지면서 파편이 아이의 볼을 긁었다. 새까맣게 때가 탄 피부 위로 벌겋고 뜨거운 피가 흘러나오며 금세 찐득찐득해졌다. 광대는 당황한 듯 몸을 돌려 누웠다. 허나 이내 의문스러웠다. 아이는 소주병이 머리 근처로 날아와도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았다. 광대는 궁금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광대의 코트는 잠들어 있는 아이의 등 위에 덮혀 있었다. 아이가 깨 있을 때면 둘은 서로 아무런 말 없이 마주본 채로 하루를 보냈다. 광대는 문득 궁금했다. 이 아이가 표정을 잃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가엾은 아이에게 웃음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전성기 때 서커스단에서 관객들의 박수를 이끌어 내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때의 명성이라면 충분히 이 아이를 웃게 할 수 없을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광대가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약간은 투박한 고사리같은 손으로 광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이가 광대의 얼굴 분장에 관심을 가진 듯한 모양이었다. 광대가 자신의 낡은 가방에서 분장 도구를 꺼내어 다 굳어버린 페이스페인팅 물감에 구정물을 적셨다. 허여멀건하게 물들은 아이의 얼굴 위로 광대가 손가락을 올려 아이의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아이의 웃음은 부자연스러웠다. 입꼬리는 웃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광대에게서 삐에로의 웃음을 배웠다. 늙어 쓸모없어진 광대와 어릿광대 아가씨의 음침한 뒷골목에 볕이 드는 순간이었다.

      광대가 시름시름 앓아갔다. 술에 의존하며 산 몸뚱아리가 쉽사리 버텨줄 리 없었다. 늙어서 쭈글쭈글해진 피부에 탄력은 살아나지 않았다. 새우처럼 꼬부라진 등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앙상하게 말라가며 몸을 벌벌 떨 때도 꼬마 광대 아가씨가 춥지 않을까 걱정하며 아이에게 덮인 코트를 빼앗아 오지 않았다. 낯빛이 파랗게 변해가는 순간에도 광대는 술을 찾았다. 술이 떨어지면 품에 잠든 아이를 찾았다. 꼬마 광대 아가씨의 잠든 모습을 보며 광대가 나즈막히 혼잣말했다. 내 웃음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다오.

      낮이 밝고부터 동네에 괴담이 돌았다. 얘긴즉 제설함에 살던 거렁뱅이 여자아이가 드디어 제대로 미쳤는지, 허옇게 얼굴이 질린 남자 시체를 품에 안고 얼굴엔 남자를 따라 허여멀건 칠을 하고서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른들은 읍내에 나가려 들지 않았고, 아이들은 편을 갈라 진짜로 그 미치광이 여자아이가 시체를 안고서 징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지 직접 보고 오자는 등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나중에 경찰이 아이와 죽은 광대의 시체를 따로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아 잘 모른다. 또한 꼬마 광대 아가씨의 인위적이고 징그럽게 웃는 입꼬리 위로 무표정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허여멀건 페이스페인팅 물감을 닦아 내려오고 있었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두 사람어치 삶의 종착역이 어디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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