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제가 남혐, 여혐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조금씩 느꼈왔던 것이고,
어제의 김여사 논란을 나름대로 분석하며 확실히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
"남혐, 여혐이라는 단어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가진 요상한 애매함과 중의성이 필연적으로 콜로세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다음의 세 가지 판단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해당 행위가 가진 성차별적 요소에 대한 판단: 즉, 해당 어휘 자체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가, 없는가.
2. 그러한 행위를 한 개인의 외적 행동에 대한 판단: 즉, 해당 어휘를 사용하였는가, 아닌가.
3, 그러한 행위를 한 개인의 내적 동기에 대한 판단: 즉, 해당 어휘를 성차별적인 의도로 사용하였는가, 아닌가.
(윤리철학을 공부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아마 익숙하실겁니다.
특정한 행동의 윤리성을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이죠. 행위 자체에 대한 판단, 행위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 행위자의 동기에 대한 판단)
2번은, 그냥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건 단순하죠. 문제가 되었던 글의 작성자분께서는 해당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제 관건은 1번과 3번입니다.
과연 "김여사라는 단어에는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가?"의 문제와
"작성자는 김여사라는 단어를 성차별적인 의도로 사용하였는가?"의 문제죠.
그런데 여기서 다음의 두 문장을 살펴봅시다.
"김여사라는 표현은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표현이다."
"김여사라는 표현은 여혐이다."
이 두 문장은 각각 1번에 해당합니까, 아니면 3번에 해당합니까?
전자인 "김여사라는 표현은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표현이다."의 경우는 명확합니다.
아주 정확하게 1번에 해당하는 문장이죠.
그런데 후자인 "김여사라는 표현은 여혐이다."는 어떻습니까?
얼핏 보면 1번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3번, 즉 행위자의 의도에 대한 문장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
"여혐"이 무엇의 줄임말이죠? "여성 혐오"입니다.
네. "혐오"요.
혐오는 명백하게 어떤 개인의 내적 태도에 관계된 단어입니다.
지금 선진국들은 속칭 "혐오 범죄(hate crime)"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매우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혐오 범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백인이 흑인을 죽이면 다 혐오 범죄입니까?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죽이면 다 혐오 범죄인가요?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의 동기가 "대상이 지닌 특정 속성에 대한 혐오"이어야 혐오 범죄입니다.
백인이 흑인을 죽였는데 그 동기가 한 여인을 둔 삼각관계의 결과이면, 이건 치정 살인이지 혐오 범죄는 아닙니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죽였는데 그 동기가 둘이 돈을 합쳐서 산 로또복권이 당첨되어 당첨금 분배를 두고 싸우다 그런거면 혐오 범죄는 아닙니다.
"혐오"는, 명백하게, "동기"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되기 쉬운 단어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살펴볼까요?
"김여사라는 표현은 여혐이다."
이 문장이 "김여사라는 표현에는 작성자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여성에 대한 혐오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있다"라는 뜻(이하 전자)입니까,
아니면 "김여사라는 표현에는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작성자의 여성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혐오가 담겨 있다"라는 뜻(이하 후자)입니까?
애매하죠?
근데 이게 전자의 의미라면 단순히 어휘 자체에 대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혐오"라는 표현은 적절한 표현은 아님)
이게 자칫해서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단순히 잘못된 표현의 사용을 지적하는 수준이 아니라, 작성자의 내적 동기까지 멋대로 판단해버리는, 속칭 "궁예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혐"이라는 말이 대단히 애매하고,
그래서 자칫하면 행위 자체에 대한 판단을 넘어 행위자의 내적 동기까지 "궁예질"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전자의 의미로, 때로는 후자의 의미로 마구잡이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촌극이 일어나는거죠.
A: "김여사"라는 단어에는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아 듣기에 좀 불편하네요 ㅠㅠ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으면 해요.
B: 맞아요. "김여사"같은 여혐(전자의 의미로)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C: (여혐을 후자의 의미로 이해) "김여사"가 왜 여혐이죠? 전 그 말을 여혐의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요?
B: 무슨 말씀이세요? 특정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반영된 단어가 왜 여혐(전자의 의미)이 아니라는거죠?
C: 아니, "김여사"라는 말이 여성들이 듣기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그게 어떻게 여혐(후자의 의미)입니까?
B: 성차별적 요소가 있으면 여혐(전자의 의미)이지 그럼 아니예요?
A: (아, 아니.... 난 이런걸 원한건 아니었는데;;)
네. 촌극입니다.
1번의 문제, 즉 "김여사"라는 어휘가 성차별적 요소를 지닌 어휘인가, 아닌가는 분명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애초에 어떤 어휘가 성차별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대단히 애매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양성평등 문제에 민감한 나라들에서는 얼핏 보면 별것도 아닌 표현까지도 바꾸곤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행기 승무원을 흔히 지칭하던 steward, stewardess라는 단어.
단순히 같은 직업을 여성형과 남성형으로 따로 쓰던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와 항공사에서 이를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 하여 flight attendant나 cabin crew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로 세심한 관점에서 보면, "김여사"도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 단어일 수 있죠.
하지만 반면, "김여사"는 "모든 운전하는 여성"이 아니라 "운전 실력이 상식 이하인 여성"을 특칭하는 어휘이고,
"김여사"에 대응하는 남성을 지칭하는 "김사장" 같은 표현도 있기에 성차별적 어휘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나름 일리는 있습니다.
또한 국어사전에 등재된 공식적인 단어도 아니고 그저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밈(meme)"에 불과한 단어에
그렇게까지 세심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과한 것 아니냐, 그렇게 치면 비속어 중에서 문제되지 않을 것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건 대단히 신중하고 세심한 토론을 통하여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할 문제이죠.
하지만 3번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해당 글 작성자가 "여성을 혐오하는 함의를 지니고" 김여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까? 무슨 근거로요?
대놓고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표방하는 "삼일한"같은 말이 아닌 바에야, 단순한 어휘 사용으로 작성자의 의도까지 파악할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혐"이라는 말은, 후자의 의미로 해석될 경우,
행위자의 행위 자체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 행위자의 내적 동기까지 멋대로 제단해버리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도 "여성에 대한 혐오, 비하, 혹은 증오"라는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형태로요.
이렇게까지 의미도 애매하고, 중의적이며, 부정적으로 이해될 여지가 대단히 많은 단어를 굳이 사용할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남혐이나 여혐이라는 단어는 "성 차별적"이라는 단어로 치환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남혐, 여혐 등의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말자고요.
*남혐, 여혐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주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분탕질이 목적이었다면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