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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삽니다 : 실수 전당포
1.
현란한 네온사인 아래로 한 남자가 걷는다. 김요한, 37살, 지금은 하릴없이 술에 찌들어 살지만, 한 때는 제법 괜찮은 회사의 대표이사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으로 시작해 사내 벤쳐, 그리고 뜻 맞는 동료들과 회사를 세웠다. 사업 아이템이 좋았다. 매출은 많지 않았지만 틈새시장을 공략해 회사는 점차 번창일로였다. 사업을 확장할만한 시기였고, 시장엔 아직 변변한 경쟁자조차 없었다. 무난한 성공이 예상됐다.
적어도 그들이 나타날 때 까지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 대기업!]
그도 한 때 몸담은 적이 있지만, 그들은 요한에게 있어 괴물이 되었다. 깨알 같은 개미들이 모여 차곡차곡 알곡을 쌓을 동안 침묵하며 기다리던 괴물은, 시장이 커지고, 주워 먹을 파이가 부풀어 오르자 득달 같이 달려들어 모두를 먹어 삼켰다.
우매한 대중은 누가 선도주자이고, 누가 시장을 키웠는지 따위의 일엔 관심이 없었다. 시장 선도제품과 그대로 베껴 디자인만 바꾼 두 개의 물건 중, 최후의 선택은 늘 자신이 한번이라도 더 들어본 회사의 것이었다.
인지도, 전국적인 A/S망, 공격적 광고, 시장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그들만의 장기가 총출동했다. 애초부터 급이 다른 상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즈음에서 딜(deal)이 들어온다.
[헐값에 회사를 매각하여 자회사가 되거나 아니면 끝까지 투쟁하던가!]
오만한 제안이지만, 감히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다. 대 부분의 선택은 전자였고, 후자를 택할 경우 여지없이 짓밟혔다.
허나 그것조차 싸움이 될 만한 회사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자신들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될 때엔 그 흔한 딜(Deal)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죽으라는 얘기다.
어음 만기 상환일 도래, 최종 부도, 개인 파산, 요한의 삶이 박살나는 데엔 채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술독에 빠져 살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화려하던 인생이 작살났는데, 취하지 않고 어찌 버틸까? 차라리 그 시절이 없었으면 모를까? 높은 곳에서의 추락은 인생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마저도 어제로 끝이 났다. 빈털터리, 무일푼, 잘나가던 회사의 CEO였던 요한은 이제 그 흔한 소주 한 병 살 돈도 없다.
2.
마지막 남은 돈으로 편의점에서 소주 두어 병을 사서 마신 요한, 술에 취해 비틀대던 그는 갑작스레 요의(尿意)를 느끼고 눈앞에 보이는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마신 것도 없는데, 취기는 몰려오고 오줌보는 터질 듯 했다. 하지만 웬걸, 건물주가 자린고비인지 1층엔 화장실이 없고, 기껏 찾아 들어간 2층의 화장실은 문이 잠겨있었다.
“씨팔! 급해 죽겠는데!”
다급한 신호가 요한의 하반신을 쥐고 흔든다. 금방이라도 쏟아낼 듯 급박한 신호가 몰려 온다. 종종걸음으로 내달리며 눈치를 살피지만, 노상방뇨라도 할까하여 자세를 잡으니 때마침 건물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 하나가 곁을 지난다.
경계의 시선, 남루한 옷차림과 며칠은 감지 않은 머리가 문제였다.
“젠장!”
다급히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요한, 마음이 너무 급하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오줌보가 요란한 비명을 지른다. 맥주를 마신 것도 아니요. 물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골반 안쪽이 터질 듯 출렁였다. 그래서일까? 마음보다 앞 선 두 다리가 성급히 내달리다 계단 어귀에 이르러 꽈배기처럼 꼬이고 말았다.
“으아아아앗!!”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요한의 몸이 계단을 굴러 1층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바지춤이 뜨끈하다. “젠장!”하는 푸념과 함께 몸을 일으켜 보지만 일은 저질러지고 만 후다. 누가 볼 새라 벌떡 일어나도 바닥엔 이미 노오란 액체가 그의 만행을 증명하듯 고여 있다. 그는 혹여 2층에서 만난 건물 관리인을 마주칠까 두려워 서둘러 건물 밖으로 축축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놀란 요한이 멈춰 섰고, 바닥엔 노오란 액체가 한 두 방울 더 떨어졌다. 낭패다. 하지만 찌푸린 얼굴의 요한이 고개를 돌리니 이게 웬걸? 건물 관리인이 아닌 늙수구레한 노인 하나가 그를 바라보며 서 있다. 복장을 보아하니 분명 건물 관리인은 아닌 듯 한데, 요한의 어깨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필시 건물내의 다른 세입자거나 또는 오지랖 넓은 노인네이리라.
“왜? 왜요! 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요한이 적반하장 격으로 소리쳐 보지만, 노인은 놓아줄 생각은 않고 그저 씨익 웃는다. 그리곤 축축한 바짓단이 신경 쓰여 도망치려는 그에게 갑자기 파아란 지폐 십여 장을 내밀었다.
“실숫값일세...”
대충 눈으로 훑어보아도 십여 장은 족히 넘는 돈이다. 요한이 깜짝 놀라 바라보지만 노인은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듯 돈을 쥐어주고는 휑하니 돌아선다.
“뭐...뭐... 뭐야!”
꿈인가 하여 바라보지만 파아란 배춧잎 십여 장은 현실이다. 꼬집어봐도 세어 봐도 영락없는 현금 18만원, 조금 전 먹은 술이 다 깬 듯 그의 몸이 몸서리친다. 뭘까? 왜 그 돈을 그에게 주었을까?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치민 듯 요한의 눈동자가 급히 흔들렸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스스로에게도 물어보지만 애초에 대상이 틀렸다. 답을 아는 건 요한이 아닌 노인이다.
3.
요한은 바지의 축축함도 잊은 채 노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슬금슬금 걸어간다. 예전 같으면 쳐다도 안 볼 금액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하다. 모퉁이를 도니,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점포 하나만 불이 켜져 있다. 대충 휘갈겨 종이로 써 붙인 남루한 간판엔 [실수 전당포]란 글자가 삐뚤빼뚤 제멋대로 적혀있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자 점포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조금 전 그에게 돈을 건넨 노인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왜? 더 잡힐 실수 있어?”
“히이익! 여... 영감님 뭐예요 이게!”
“서서 궁싯거리지만 말고! 궁금한 게 있음 들어 와! 노인네 답답해!”
아주 작은 점포였다. 3평? 5평? 아주 작고 허름했지만 아주 오래전 TV 드라마에서나 보던 옛 전당포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아직도 이런 게 있다니] 하고 놀라는 요한에게 노인이 말했다.
“바지에 지린 정도론 그것 밖에 못 줘... 실숫값 치곤 것도 많이 쳐준 거야!”
“무... 무슨 말씀이죠?”
“간판 못 봤어? 여긴... 실수 전당포야. 세상의 잡다한 실수들을 가져오면 사주는 곳이지”
“그게 말이 돼요?”
“왜 말이 안 돼? 내가 내 돈 주고 사겠다는데... 왜? 싫어? 그럼 그 돈 돌려주던가!”
노인이 그리 말하며 돈을 도로 찾아가겠다는 듯 손을 뻗자 놀란 요한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돈을 쥔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럼 지... 진짜예요? 내가 방금 실수한 걸 노인네가 사셨다? 그것도 무려 18만원이나 주고?”
“왜? 가짜 같아? 은행 가져가봐 진짜 돈이라 할 테니...”
“히야! 이거 신기하네! 할아버지 치매 있으신거 아녜요?”
“오는 사람마다 다 그래! 원래는 와서 사연을 얘기하고 받아 가는데... 자넨 내가 코앞에서 봤으니 그냥 보낼 수 없어 쫓아가서 준 거네! 고마운 줄 알아! 나 같은 악취미 가진 사람 별루 없어!”
요한의 시선이 급히 흔들린다. 무일푼 신세다. 당장 목구멍 축일 돈조차 없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손에 든 돈은 진짜다. 그 돈 18만원이면 당장 새 옷도 사고 끼니도 떼울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요한은 급히 노인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저... 저! 더 잡힐 거 많은데...”
“그래? 그럼 한 번 털어놔 봐! 어떤 실수를 했는지! 내 듣고 재밌으면 사지! 무료한 늙은이 즐겁게 해준 얘깃값이라 생각하면 돼!”
노인의 말을 들으니 한층 더 리얼리티가 산다. 돈은 있는데 무료한 늙은이, 그 늙은이가 재밌는 실수담을 사는 것이다. 노인 스스로도 악취미라 일컫지 않았나! 요한의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실수,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보다 더 재밌고, 더 깜짝 놀랄만한 실수를 떠올리기 위한 분투다. 허나 잘 하던 노래도 멍석 깔아놓으면 못한다고, 애써 떠올리려 하니 무엇 하나 마땅한 것이 없다.
“꼭 재밌지 않아도 되니까! 뭔가 신기한 실수, 치명적인 실수, 뭐든 실수면 다 괜찮아. 어디 가서 퍼트리거나 하지도 않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네... 네! 갑자기 확 떠오르질 않아서! 근데 있어요! 분명히 있어요!”
요한은 문득 몇 주 전 지하철을 타러가다 혼잡한 사람들에 밀려 안전 스크린에 얼굴을 찧은 일을 떠올린다. 급히 살을 붙여 이야기 해봤지만 어쩐 일인지 노인의 얼굴이 그닥 밝지 않다.
“그런 얘긴 이거면 되겄네.”
“애게... 고작...?”
노인이 요한에게 건넨 돈은 겨우 천 원짜리 서너 장, 요한의 얼굴에 실망감이 깃든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말했다.
“아니 그런 흔하디흔한 얘기로 얼마를 받아 갈라고? 노인네라고 벗겨 먹을 셈인가? 좀 더 신기하고, 남한테 말하기 뭐한 그런 걸 얘기해야 제 값을 쳐주지! 흔해빠진 건 영... 자네도 한 번 생각해 보게. 이미 누가 와서 떠벌리고 간 흔한 얘기를 뭐 하러 삯을 쳐주고 듣겠나? 쯧쯧... 세상에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아나...쯧쯧...”
노인은 혀를 차며 딴청을 피운다. 이번 얘긴 돈이 적지만 애시 당초 흥정을 논할 게재도 아니다. 요한은 제 얼굴 위 실망감을 급히 지우며, 다른 실수들을 떠올려본다. 빙판에서 넘어진 일, 길을 가다 오물을 밟은 일, 떠올리긴 하나 모두 하릴없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그거라도 떠들어 보지만 냉랭한 표정의 노인은 동전 몇 개만 겨우 내밀 뿐이다.
“뭐 더 없으면 가봐! 난 문 닫고 이제 가봐야겄어! 나이 먹으니까 힘들어!”
“잠깐만! 잠깐만요!”
이제 다급해진 쪽은 요한이다. 손에 든 18만원, 목마른 자에겐 큰 돈이나, 축축한 바지를 새로 사고, 한 두 끼 사먹고 나면 곧장 증발해 버릴 그런 돈이다. 뭔가 큰 실수를 말하고 목돈을 손에 쥐고 싶은 요한의 욕망이 꿈틀댔다.
“쓰잘떼기 없는 얘기 할라치면 썩 꺼져! 나 집에나 갈라니까! 이런 실 없는 소리나 듣자고 있는거 아냐! 가서 따땃한 아랫목에 몸이나 누일라네!”
“있어요! 있어! 웃기진 않지만! 심각하고 치명적인 실수!”
“뭔데!”
요한이 흥분하여 외치지만 노인은 귀찮다는 듯 팔짱을 낀다. 표정 또한 좋지 않다. 앞 선 타석의 타율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요한은 자신이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생일대의 실수를 털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돈도 돈이지만, 지금껏 자신의 이야기를 하찮은 듯 깔 본 노인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좀 어렸을 때에요. 국민... 아니 초등학생 때...”
“오호라! 좀 오래된 이야기네... 혹 시원찮은 얘기거나 이 노인네를 속이려고 거짓을 지어내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아무한테도 한 번도 한 적 없는 그런 얘기고 다 진실입니다.”
“그럼 어서 해보게!”
요한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자 노인의 눈빛도 따라 반짝인다. 요한은 무언가 꺼림칙한 듯 잠시 뜸을 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4.
수련회였어요. 초등학교 여름 수련회, 그땐 놀 거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게 유행했죠. 담력테스트!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한 밤중에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으슥한데 가는 거! 마침 또 그날 밤 정전이 됐어요. 여자애들은 무섭다고 난리였지만, 장난꾸러기들은 기회는 이때다 일을 벌렸죠.
저, 정배, 수환이, 그리고 또 누구더라? 그래... 씨팔.... 민교... 우리는 제법 친했어요. 뭐 민교 새끼는 나중에 전학 온 거라 좀 애매했지만. 아 걘 애도 좀 이상했어요. 부모가 사고로 죽었다고 했나? 암튼 좀 어둡고 음침하고 이상한 새끼였어요.
여튼 우리는 담력테스트도 할 겸, 그 밤에 인근의 폐교로 숨어들어가 숨바꼭질을 하기로 했습니다. 술래는 나, 딱 100까지 세고 시작했어요. 빨리도 숨더군요. 폐교 밖으론 나가지 않기로 해서 빤한 게임이었지만, 온통 캄캄하니까 조금 무섭더라구요. 정전 됐다고 선생님들이 랜턴을 다 가져가버린 통에 양초 하나씩만 들고 갔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없는 시골의 폐교에 그 흔한 랜턴 하나 없이 양초를 든 아이들... 금방이라도 귀신이 뛰쳐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겉으론 센 척했지만 저도 정말 무서웠어요.
제일 먼저 찾은 건 뚱땡이 정배였어요. 덩치는 커다래 가지고 겁이 제일 많았죠.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요. 걸상 밑에 숨어 있었는데, 덜덜덜 떠니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죠. 술래한테 붙잡혔는데도 안도하는 꼴이란... 암튼 정배는 제가 찾자마자 곧장 폐교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저도 겁이 나서 따라 나서고 싶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얕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 둘만 찾으면 되니까 빨리 찾자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때 누가 봐도 딱 숨기 좋은 창고 같은 것이 보이더군요. 왜 그런 게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이 있으니 수환이든 민교든 한 놈은 거기 숨어 있겠다 싶었어요. 뭐랄까? 그냥 그런 촉이 왔어요. 하지만 왠지 무서워서 열고 싶진 않았어요. 겁이 났습니다. 문 뒤에 귀신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하는 괜한 공포심이었죠.
그래서 그 문을 열어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한 놈 더 찾아 놨으니까 이제 한 놈만 찾으면 된다. 그럼 이 으스스한 폐교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런 생각뿐이었죠.
그래서... 어린 나이지만, 전 꾀를 냈습니다.
[나도 무섭지만, 숨은 놈도 무서울 거다. 구태여 찾으러 다니지 말고 제 발로 걸어 나오게 하자!]
창고를 뒤로 하고 다른 교실들을 찾아다니며 일부러 막 귀신 흉내를 냈어요. [흐흐흐] 같은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최대한 섬뜩하게 만들어 보려고 애썼죠. 조금 더 지나니 아니나 다를까! [흐흐흐] 하고 웃는데 [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뛰쳐나왔습니다.
수환이였어요. 녀석은 큰 소리로 [귀신이야! 귀신!!!] 하고 악을 쓰며 달리더군요. 들고 있던 초까지 복도에 내던지면서요.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우스웠지만, 한 편으론 조금 무서웠어요. 저도 결국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귀신 흉내 낸 건데... 바보! 하고 말하면서도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이상하게 뒤통수가 시리고, 으스스한 기분... 머 어째요. 바보 같이 내가 흉내 내놓곤 나도 따라 냅다 뛰었죠.
여기까지 말하고 요한이 잠시 멈추자 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겨우 귀신 흉내 내다 놀라서 도망친 걸 실수라고 하는 건가? 그건 그냥 놀란 거지 실수가 아니지! 난 또 뭐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고! 에이! 시간만 버렸네! 빨리 문 닫고 조카 놈 불러서 차나 얻어 타고 가야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몹시 실망한 표정이었고, 금방이라도 조카에게 전화해 집으로 돌아가려는 눈치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요한이 노인을 만류하며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수환이가 제 장난에 놀라서 초를... 복도에 던지고 뛰쳐나갔다고!”
요한의 말을 들은 노인이 말했다.
“불이 났구먼?"
“네... 마치 기름이라도 부어 놓은 것처럼 급히 번지더군요. 오래 된 폐교라 건물 전체가 다 나무로 된 목조 건물인 게 문제였습니다. 다들 겁을 먹었고, 누가 남아있고 그런것도 있지만 불이 났다는 거 자체가 무서웠어요.우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로 내뺏습니다. 다행히 아직 정전이 끝나지 않아서 아무도 우리가 밖에 나갔다 온 줄 모르더군요.”
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다. 그리곤 비꼬듯 말했다.
“그건 자네 실수가 아니라 수환이의 실수가 아닌가?”
“들어보세요. 그 앞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왠지 한 녀석이 창고에 숨어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그랬지... 헌데 그게 왜 실수라는 건가? 창고 문을 열고 찾지 않아서?”
노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묻는다. 그러자 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며 말했다.
“그제야 알았어요. 우리가 민교를 두고 왔다는 걸...”
“말씀드렸지만, 어렸어요. 장난꾸러기였고, 짓궂었죠. 창고 문을 보니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놀래켜 주고 싶었어요. 바닥을 보니 부서진 나무 조각이 많았습니다. 하나 주웠어요. 악의는 없고, 그냥 장난이죠. 어린 애들 장난, 전 그걸 들어서 문이 열리지 않게 사이에 단단히 끼워넣었어요. 내가 다른 아이를 찾으러 간 사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문이 안 열리면 놀라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구요. 그 뿐이에요.”
“이런... 안타깝구먼”
“다음 날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민교를 찾느라 난리였지만, 우린 아무도 말을 못 했어요. 무서웠죠. 그냥... 단순한 실수였을 뿐인데... 그건 그냥 사고잖아요! 그쵸? 아직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교에게 미안할 뿐이죠.”
요한의 말이 끝나자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 숙인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해해... 그럴 수 있어... 어렸으니까! 그 나이에 뭘 알겠어! 실수야 실수! 죄책감 가지지 말게”
“감사합니다.”
5.
노인의 위로에 조금 힘이 난다는 듯 요한이 숙였던 고개를 든다. 하지만 고개를 든 요한의 눈에 휴대폰을 들어 통화중인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저! 이 실수담은 안 사주시는 건가요? 분명 재밌는 얘기가 아니라도 돈을 주신다고!”
요한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노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집엔 가야하니까 조카를 좀 불렀어. 곧 올게야. 신경 쓰지마! 가슴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실수담을 이야기해 줬으니 내 값을 치러야지! 걱정 말게!”
노인이 웃으며 말하자 요한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노인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줄 듯 연신 제 호주머니를 뒤지고, 요한은 요한대로 기대감에 찬 눈으로 손을 벌린다.
하지만...
노오란 동전 한 개가 바닥을 구른다.
“뭐죠? 제 얘기가 겨우 10원짜리 밖에 안 된다는 건가요?”
“내가 이야기 안 했나? 이미 누가 와서 떠벌리고 간 얘기를 뭐 하러 삯을 쳐주고 듣겠냐고!”
“드... 듣다뇨! 이건 순전히 제...제 경험이고 아는 사람이곤.... 헉!”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덩치 큰 거한 서너 명이 어느샌가 전당포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얼굴이었다.
“수... 수... 수환이?”
요한이 묻지만 피 떡이 된 얼굴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죽여... 차라리 죽여] 그 말만을 반복했다. 놀란 요한이 서둘러 몸을 내빼려 하지만 거한 두 명이 즉시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왜 이래요! 왜!! 당신들 뭐야! 나한테 왜 이래! 응? 돈 때문에 그래? 이 돈 돌려줄게!”
요한의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 거한 중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함세! 아까 말했던 내 조카일세...”
“아니! 조카는 조카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구요! 네?”
노인이 대답했다.
“인사하게... 조카이면서 동시에 애통하게 죽은 민교의 당숙일세!”
“다... 당숙... 미... 민교?”
요한의 동공이 흔들린다. 당혹감에 숨조차 쉬이 내쉴 수 없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체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그럼 다... 당신!!”
“그래! 내가 불쌍하게 죽어간 민교의 할애비 되는 사람일세! 애꿎은 철부지 어린애들의 장난에 내 손자가 죽었어! 애비, 애미 다 사고로 죽어 고아나 다름없던 그 애를!! 니들이 죽였어! 실종? 난 그런 말 안 믿었지! 인근을 샅샅이 뒤졌어! 잿더미가 된 폐교... 그 안에 우리 민교가 있더군!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야!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왜 그 아이가 거기서 타 죽어야 했는지! 왜!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 죄 많은 늙은이 보다 먼저 죽어야 했는지!!!”
노인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회한이 진득이 묻어난 한 맺힌 절규였다. 그 모습에 겁을 집어 먹은 요한은 그때 그 당시 어린 소년의 얼굴이 되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이해한다면서요! 그럴 수 있다면서요! 어렸으니까! 그 나이에 뭘 알겠냐! 실수다 실수! 죄책감 가지지 말아라! 그러셨잖아요!! 네?”
요한의 절박한 외침, 하지만 그 외침을 들은 노인은 한층 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해해....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예?”
“용서도 못 해!”
“흐허헉!”
“끌고 가!”
노인이 소리치자 거한 두 명이 요한의 손목과 발목에 수갑과 족쇄를 채운다. 어딜 봐도 장난이나 단순한 겁주기가 아니다. 현실이고, 또한 순도 100%의 진심이다. 참을 수 없는 공포감에 사색이 된 요한이 소리쳤다.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어서 이거 풀어!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으헉! 용서해주세요... 제발! 네? 어렸잖아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절박한 요한의 외침, 하지만 노인은 그제야 생의 숙원을 푼 사람마냥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외에 집을 지었어... 아름다운 목조 건물이지. 네 까짓 놈들의 장작더미론 아깝지만, 니스를 잔뜩 칠해 놓았으니 아주 잘 탈거야... 용서? 좋지... 빌어! 손이 발이 되도록! 하지만 너희를 용서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죽은 우리 민교지... 화해, 용서... 난 모르겠으니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잘 해결해보게... 흐흐흐 잘 가게! 우리 민교에게 안부 전해주고!”
노인이 말을 마치자 요한을 겁박한 거한중 하나가 품에서 두툼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곤 절규하는 요한의 입을 막는다. 어떤 화학약품 같은 것이 배어 있었을까? 몇 초 지나지 않아 버둥대던 요한의 몸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다.
노인은 점포 앞에 붙어 있던 [실수 전당포]란 종이를 떼며 말했다.
“알고도 침묵한 정배 그 뚱보 아이는... 혀를 자르고, 양심 머리 없는 심장을 찢어 줘야겠지? 그치 민교야? 이 할애비가 다 갚아주고 갈게... 기다려라! 흐흐흐 얼마나 외로웠을꼬 우리 민교... 친구들도 곧 널 따라 갈 테니... 이젠 맘 편히 눈감거라... 크흑... 미... 민교야...”
2층에서 기웃 거리던 건물 관리인이 웬 청년 하나와 함께 계단을 걸어 내려와 노인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청년은 수 시간 전 요한에게 술을 팔았던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실수 전당포의 불이 꺼졌다.
실수를 삽니다. : 실수전당포
끝.
글쓴이의 말
오늘의 유머, 솔잎 사이다님의 단편 ‘실수를 삽니다.’를 모티브로 쓴 글입니다.
원작은 환상특급 느낌의 글로 우연히 만난 실수를 사는 노인과 그에게 제 인생의 실수를 모두 판 남자,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 사내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자세한 내용은 스포라서 여기까지만)이었으나, 글의 소재가 독특하고 재미있어 제 나름대로 스릴러 형식의 글로 변주하여 써 보았습니다.
단순한 전개라... 반전이랄 것은 없지만, 나름의 노력을 다 한 글이니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아울러 모티브는 같으나 주된 서사나 결말은 많이 다르므로 시간이 되신다면 깊이 있는 철학이 담긴 원작도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네요.
[출처]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86951&s_no=86951&page=1
출처 | 나, 비키라짐보 = 야설왕짐보 솔잎사이다 - 실수를 삽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86951&s_no=86951&pag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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