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내용을 읽고 읽으시는걸 권해드립니다.
아니면 이야기 전개를 모르실수도 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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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짧았으나 여름의 시작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온종일 화사히 피어있던 벚꽃은 차츰 그 기력을 잃어가더니
이제는 온데간데 없이 흔적을 찾을 수 조차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더워만 가는 날씨를 탓하기는 해도
나뭇잎 색깔이 시퍼렇게 변하는 것을 보면 마음 한켠이 청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봄이면 어떻고 여름이면 어떻던가
사람 살기에 좋은 날이면 그만인것을.
스륵은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내며 오유가 머무는 거처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오유가 머무는 곳은 오유국의 중앙에 자리한 자유가自由家 로
오유국 백성들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스륵은 걸으면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여유가 있는듯한 표정 속에서도 웃음이 없거나 생기가 없는 것이
아직은 안정되지 않은 오유국의 현재를 그대로 나타내는듯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무엇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간혹 고화질 사진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있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망명 아재들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어린 아이의 사진을 쥐고 있었고,
누군가는 풍경 사진을, 또 다른 누군가는 동물 사진을,
식물 사진을, 색기 넘치는 처자의 사진을,
각기 다른 사진을 들고 있었지만 표정은 다들 한결같았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과연 오유국은 내가 정착하기에 마땅한 곳인가
고향은 이제 더 이상 고향이 아니건만 그럼에도…….
스륵은 그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은 스륵의 마음을 아프게했고
오유에게 가는 발걸음을 더 재촉하게 만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오유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있었다.
여린 오유지만 이 소식을 안다면,
그래도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은 자명했다.
" 도련님, 스륵 아재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금세 자유가에 당도한 스륵은 숨 고를새도 없이 오유를 찾았다
자유가의 집사인 오적어烏賊魚 의 안내를 받았기에
별다른 무리없이 오유를 만날 수 있었다.
" 아재, 바쁘신거 같아 통 뵙지를 못했네요. "
" 아니오, 이제 어느정도 일은 마무리가 되어간다오.
내 일이야 그렇지만 그대 일도 마무리 지을게 있어서 찾아오게 되었소. "
" 탑시塔時 사건 말씀이십니까? "
" 탑시 얘기는 하지도 말게. 그 얘기만 나오면 내 분통이 다 터지는거 같으이.
그거 말고 그대에게 긴히 전해야 할게 있는데 말이오.
혹시… 주변에 그림자들이 있지는 않소? 있으면 물러주면 좋겠소만. "
스륵의 진중한 표정에 오유가 공중에 손짓을 한번 했다.
" 허허,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
스륵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비록 남의 나라에 몸을 의탁하는 처지이기는 하나
실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高麗(*오유국이 속해있는 거대 영토의 명칭*)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손꼽히는 고수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오유는 스륵의 놀란 표정을 보며 웃었다.
" 아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림자를 물리시라기에 그냥 시늉 한번 해보았습니다. 하하하. "
스륵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는 걸 느꼈으나
오랜 세월을 겪은 아재답게 이내 주먹의 손을 펴기 시작했다.
고향에 있을땐 못 느꼈던 오유의 드립을 눈앞에서 본 것이
신선한 충격이기는 했다.
" 싱거운 사람 같으니. 이걸 한번 보시겠소? "
스륵은 품안에 있던 서신을 꺼내 오유에게 내밀었다.
" 이것은…? "
" 충격은 받지 말고, 읽어보시오.
믿을만한 간자間者(*첩보원*)가 전해준 것이니 의심은 하지 않아도 좋소. "
" 요즘 믿을만한 자가 있더이까? "
"…디시국의 무갤이라면 믿을만하지 않겠소? "
오유는 무갤의 이름을 듣자 이 서신에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는지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을 만나보고 겪어봤지만
무갤만큼 괴이하면서 진솔한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말투는 투박해도 그 안에 담긴 속내마저 투박하지는 않은,
뒷세계에서 알아주는 협객俠客이 무갤이었다.
스륵이 전해준 서신에는 충격적이다 못해
오유의 상식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 내 이년을 그냥……. "
오유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투를 내뱉었다.
그만큼 서신은 충격이었고 혼돈이었다.
" 그대가 충격받는 것도 당연하다오.
그렇겠지, 그래도 누구보다 여시의 편에 있고자 했던 그대인데.
아니, 여시의 선한 부분을 인정하고자 했던 그대인데 말이오. "
" 여시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어 제가 그리 생각했던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럽고 추잡한 짓을 오유국에서 행했단 말입니까?
게다가 이 겁간劫姦 에 대한 유언비어는 또 무엇이구요. "
오유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 여기 적힌 이… 보바에 대한 험담은 그렇다 쳐도,
이, 이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오유국 내의 정보 조작이라니요.
선량한 우리 오유국의 사람들에게 허위사실을 날조해서 퍼트리고
그것들을 선동해서 서로간에 분탕이 있게 하는것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
"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일세. "
" 하… 천인공노天人共怒 할 처자들 같으니.
조작과 선동은 나라간에 암묵적으로 금지된 조항 아니옵니까?
예전 충蟲 사건때에도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
" 아니오, '충 사건' 때에도 조작과 선동은 있었다오.
다만 이번 여시는 그 도가 지나쳤소.
서른번째 조작을 넘어서는 무갤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하오."
서른번째 조작을 넘었다니. 기가차 말이 안나오는 오유였다.
게다가 제일 분통터지는건 '겁간'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유국은 남녀간의 상열지사에 가장 큰 법령을 적용하여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의 법과 부부는 허許 하고 연인은 불허不許 하는
말은 안되지만 독특한 규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녀자에 대한 희롱은 특히 중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죄를 짓는 자는 거세를 해버려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겁간' 이라니?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대상을 엄벌에 처하고 오유국에서 쫓아내는 것이 마땅한데
여시가 퍼트린 소문에는
'대상도 그렇지만, 증거 또한 없다. 하지만 오유국의 사람이 겁간을 행하였다.'
라는 악질적인 내용만이 있을뿐이었다.
이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 아재, 가시지요! 내 이년들을 그냥…. "
" 가, 가다니? 어디로 간다는거요? "
" 어디긴요, 당장 이 여시년들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스륵은 오유가 흥분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여시에 대한 정을 뗄 것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이런 흥분이라니,
억눌린 무언가를 뱉어내듯이 얼굴까지 시뻘개진 오유가 내심 귀엽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오유가 언뜻 겹쳐보이는 것도 같았다.
스륵도 오유와 같이 당장 길을 떠나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밝았다.
여시의 간자들이 아직 오유국 곳곳에 있기에 쉽게 걸음해서는 아니되었다.
스륵은 오유의 흥분을 진정시키고는
날이 어두워지면 길을 나서기로 하고, 심신을 정비하기로 했다.
무턱대고 상대하기에 여시는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무언가 음습하고 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몸을 오싹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탑시는 그저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스륵은 평생 자신과 함께한 애검愛劍 매라梅羅 를 닦았다.
매라에 피를 머금게 하는 날이 다시 올줄이야….
숱한 상대와 싸우면서도 날 하나 상하지 않고 청명한 빛을 내뿜는 매라는
스륵의 보물이자 자랑이요 인생을 말해주는 검이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시절부터 손에 쥐고 함께한 매라이기에
어떤 적들도 두렵지 않은 스륵이었다.
" 여시여… 이제는 늦었소. "
칼은 이미 뽑히었고, 분노의 대상은 정해졌다.
이제 결과만이 남을 뿐이었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스륵과 오유가 길을 떠나려는 그 찰나,
작은 마찰이 있었다.
" 오라버니, 저도 함께 하겠어요. "
유여가 치마와 저고리 대신 얇은 경장輕裝 을 입고 오유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미 유여의 고집은 꺾을 수 없다는걸 잘 아는 오유였기에
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라비 옆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거라. "
유여는 오빠의 짧은 한마디가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그래도 오빠는 오빠였는지 약하게 보여도 힘이 되기는 했다.
오유는 막상 큰 소리를 치고 분개하며 길을 나섰지만
여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어린 처자인데,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이인데,
여시들 전체가 그렇게 몰상식한 것은 아닐 것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순수한 여시도 있지 않을까?
순진하고 정말 아무것도 관계없는 여시도 있지 않을까?
오유 특유의 선비 기질이 발휘되려던 순간이였다.
" 정녕, 피를 봐야만 끝을 내시겠다는 얘기시옵니까."
오유는 스륵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도무지 혼자서는 답이 안나오고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 내 그대의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발본색원拔本塞源 이라 하였소. "
스륵의 마음도 그리 편치는 않아 보였다.
그 또한 이 일련의 사태들이 좋지만은 아닐 것이다.
" 아재 ‥‥. "
스륵은 오유의 등을 몇번 두드려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앞장서 걷는 스륵의 등이 믿음직하기도 하고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파르스름하게 날이 잘 선 장도長刀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스륵의 큰 덩치에 잘 어울리는 칼이였다.
그런 스륵의 뒷모습을 보던 오유는 큰 결심을 한 듯,
머리에 곱게 올려진 갓의 끈을 풀렀다.
스륵 또한 여시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고
자신 또한 여시에 대한 마음이 마냥 분노만은 아닐 것이였다.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잘못한 것에는 죄를 묻고 죄를 모르는 것에는 죄를 알려줘야 함이 맞았다.
그게 바른 도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게 잔인한 현실이자 세상을 모르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것이리라.
오유의 갓 끈이 사르르 풀리자 치렁치렁한 머리가 휘날렸다.
대충 머리를 잡아 질끈 동여 맨 오유는
허겁지겁 스륵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 오유의 옆에는
오라버니의 손을 꼭 잡은 유여의 모습도 보였다.
유여는 입술을 앙 다문채
저고리 깊숙히 자리잡은 '은장도'를 만지작 거렸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면 유여 또한 싸움에 참가해야 할 터,
오유와 스륵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은장도는 그러한 유여의 다짐이자 신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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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예고
『 그럼, 그때 그 정자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 그렇소, 이미 여시에게 혼을 빼앗긴채 이지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오.』
무갤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담담할 수가 없었다.
오유는 그때 느꼈던 그 이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여시는… 생각보다 더 거대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