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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취기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기분 좋게 이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기엔 몸은 덜 피곤했고, 술은 덜 취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말끔하게 씻고 나오면 거진 술은 전부 깨어 있을 모양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침대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술이 깨가는 과정을 천천히 느껴가면서, 맑아오는 정신으로 20년 조금 넘은 내 생애를 성찰하고 싶지 않았다. 별 헤는 밤을 보내기엔 나는 너무 덜 취해 있거나, 너무 많이 취해 있었다.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되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전에 사두고서 바쁜 일로 차마 마시지 못하고 있던 놈이었다. 나는 그놈을 들고서 보일러를 켜고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조금 퇴수를 하고 나니 이내 따순 김이 몽실몽실 뿜어져 나오는 온수가 나온다. 스트레스 탓일까, 요새 갑작스레 비듬이 생긴 나는 헤드앤 숄더 샴푸로 머리에 감는다. 두피에 치약이 닿은 듯 시원한 감이 있다. 나는 머리를 다 감고서, 몸에 비누를 칠하기 전에 맥주 캔을 딴다. 치익, 알루미늄 캔 속이 기포를 발하면서 그 내부를 울렸다. 음주는 캔을 따는 순간의 경쾌한 파열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홉도 제대로 들이지 않은 한낱 싸구려 국산 맥주와는 다른 묵직한 맛이 느껴졌다. 편의점에서 샀지만, 그래도 명색이 독일에서 수입한 맥주였다. 이 놈은 제 몸값을 하려는 지, 단지 들이킨 뿐인데도 풍성한 맛이 느껴졌다. 그 과하지도 않으며 모자라지도 않은 탄산의 맛이라니! 나는 저 머나먼 골족의 후손들이 만든 맥주를 들이키는 향락에 젖었다. 샤워기에선 온수가 쏟아져 몸은 따뜻한데, 내 입과 식도와 위와 장은 죄다 차디찬 맥주로 짜릿했다. 나는 샤워기 아래에서 황홀했다.
내 친구 하나는 이번 호에 나를 술 빚는 대학생으로 어느 잡지에 실었다. 사진을 찍을 때, 자꾸만 생활한복을 입고서 찍혀달라고 하더니마는, 내게 온갖 오리엔탈리즘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써놓은 글을 보니 나를 조선조의 선비 내지는 국수주의자를 만들어 두었다. 아니, 나는 흥선대원군도 아니고, 그 어떤 국수주의자도 아니었다. 나는 독일에서 온 맥주를 마시며 샤워를 하는, 흔하디 흔한 대학생이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나왔다. 집에서 입는 생활 한복을 걸쳤다.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맥주는 한참이나 남았다. 도취가 한참이나 남은 약쟁이처럼 나는 기분이 좋았다. 술을 들이키자, 미처 샤워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맥주의 짙디짙은 잔향들이 비강을 간질였다. 향긋한 보리향에 기분이 좋다.
함경북도에서 넘어온 내 친조부에게서 나는 잘 붓는 얼굴과 나쁜 신장과 좋지 못한 소화기관을 물려받았다. 나는 내 장기가 아버지와 친조부처럼 야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나는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나는 이미 꽐라가 되었다. 그렇지 않은 척, 오타를 지워나간다. 나는 나쁜 신장 탓에 내일도 붓는 얼굴을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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