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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늦었다, 늦었어!"
차를 놓치게 된 탓에 그만 늦게 들어왔다. 이러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놓칠 것이다. 차라리 광고를 더 보면 더 봤지, 놓치고 싶진 않았다. 재방송 따위보다 본방송이 좋은 것은 본 뒤에 바로 인터넷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인데, 놓친다니 말도 안 된다.
양말을 벗지도 않은 채 곧바로 텔레비전을 켰는데 이상했다. 마치 텔레비전이 정지되어있는 것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바르게 서 있는 장면만 나왔다.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려도 먹히지 않았다. 벌써 배터리가 다 된 건가?
화면 속의 남자가 폭죽을 터뜨리면서 혼자 기뻐했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고객님은 저희 홈쇼핑의 20번째 고객님이십니다. 기념으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고객님께 신상품을 무료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배송비도 가격도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채널이 다시 바뀌었다.
"그러려면……, 강혜승 씨의 직언이 꼭 필요해요."
어휴, 도대체 얼마나 늦은 거람? 방금 것이 좀 신경 쓰이지만, 일단 켰으니 다 보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라디오 잡음과 함께 밝고 활기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흰 24시간 항상 대기 중이니까, 언제든 전화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건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데?'
소리가 난 곳은 내 다리 바로 옆이었다. 거기엔 웬 무전기 하나가 놓여있었다.
나는 거기에 천천히 입을 대고 말했다.
"누구냐, 넌?"
"신상품은……, 마음에 들어요?"
나는 그 음성을 듣고 잔뜩 긴장했다. 그 목소리는 아까와 같은 업무용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떤 감정이 잔뜩 담긴, 부드럽고도 낮은 목소리.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배송이 잘 되었네요. 신상품 수령 제대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다시 그 업무용 목소리로 돌아왔다. 황당해서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이게 대체 뭡니까? 그리고 이거 언제 이렇게 갖다둔 겁니까?"
"고객니임. 당황하지, 마세요오."
남자는 아까보다도 더욱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제품은 언제든 고객님을 죽여드리는 제품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서비스라고 봐야겠죠."
"뭐, 새꺄? 죽고 싶어?"
"고객님! 화내시면 아니 아니, 아니 되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솔직히 집에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 무전기를 갖다 두는 놈팡이면 무서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이놈의 말투는 그런 것을 잊게 할 정도로 화가 나는 것이었다.
"갖다 두는 거야 뭐, 저희 홈쇼핑의 배달부는 세계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이니까요. 설명이 부족했나 보네요. 제대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서비스의 특징은 언제든, 원하는 형태로 죽게 해드린다는 겁니다. 요즘은 꽤 불행한 시대잖습니까. 백세시대면 뭐합니까? 어른들도 계란 두 판 채우기 전에 고독사하죠. 아이들이 왕따 못 견디고 죽는 건 뉴스거리도 되지 않죠. 청년들에게,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마포대애교. 워우."
자기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다.
"아무튼, 요점만 간단히 말하자면, 저희는 끝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이런 서비스를 준비한 겁니다. 어떤 형태라도 좋습니다. 골라 골라 아무거나 골라."
고르기 전에 이 깨방정을 듣다가 속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똑바로 말했다.
"섹스에 굶주린 미녀 백 명과 실컷 떡 치다 복상사로 죽고 싶은데 어때?"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 입을 막고 끅끅 웃었다. 역시 장난엔 장난으로 받아줘야 맛이지.
"그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기일은 언제로 잡아드리면 되겠습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주세요."
하지만 남자는 불쾌한 기색은커녕 무척 진지하게 되물었다. 이런 상황이라곤 해도,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불안해진다. 뭔가, 감이 있지 않은가. 냉정한 이성의 계산보다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예감 같은 것 말이다. 그 오싹한 느낌은 이것이 거짓이 아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남자는 여유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못 정하셨다면, 나중에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홈쇼핑이 원하는 것은 고객님의 확실한 행복이니까요!"
무전기를 그대로 바닥에 두었다. 이 장난을 친 녀석을 쥐어박아 주겠다는 생각 따윈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조금 전의 말들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나의 마지막은 어떨까? 나는 어떻게 죽고 싶어 하는 걸까? 가끔 나도 겪게 될 것만 같은 끔찍한 뉴스를 보거나, 초등학교 다닐 적에 유서 쓰기 행사-생각해 보니 이거 좀 무섭다.- 같은 것을 할 때 말고는 생각한 적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비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땐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게 좋겠지. 고마워요, 빌!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어 찾아보았다. 장례식. 국장. 납골당….
아니다. 이건 장례식이지 죽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웹 뉴스를 봐도 딱히 크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얼 봐도 그랬다. 차라리 아까 장난스레 말한 것처럼 복상사를 고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하, 진짜 뭘까."
아무리 고민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고객님. 고민 고민하지 마."
또 시작이군. 대뇌에 전두엽 대신 깐족엽을 달고 사는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르기 전에 몇 가지 골라 체험해볼 수도 있습니다.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체험?"
"예.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주세요."
생각나는 대로…….
"싸이코패스 살인마에게 쫓기다 죽는 건 되나?"
"체험 맞으시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뭐야. 진짜 된 건가?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누가 오는 건 없었다.
'설마 여태 그냥 장난한 건 아니겠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였다. 땅이 심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익숙한 냄새가 났다. 매콤하면서도 무척 달콤한……
"치킨 양념?"
그리고 골목 저 멀리서부터 시뻘건 액체가 파도치며 나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덮쳐오는 붉은 파도에 당황해 팔을 들어 막았다. 헌데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뭐지?"
팔을 내리고 살펴보니 파도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골목엔 홀로 외롭게 빛을 내는 가로등뿐이었다. 그리고 그 밑엔 도끼를 든 남성이 있었다.
'이제 시작된 거구나!'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무척 빠른 속도로 내 쪽으로 달렸다. 당장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도끼로 철문을 때리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쾅 소리가 나더니 철문이 찢어졌다. 그 틈으로 남자의 소름 끼치는 미소가 보였다.
"으아아아! 취소! 취소! 이거 취소!"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있는 곳은 방 안이었다.
'진짜 취소된 건가? 체험 끝난 거야?'
혹시나 해서 밖으로 나가보니 철문은 찢어진 상태 그대로였다.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척추 밑으로 신경이 툭 끊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린 나는 방으로 오자마자 무전기를 쥐고 소리 질렀다.
"야이, 사기꾼아! 진짜 죽을 뻔했잖아!"
"미안, 미안, 미얀마."
"이 자식이 진짜!"
무전기를 확 집어 던지려다 말았다. 당장 멱살이라도 붙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또 순순히 잡혀줄 녀석도 아닌 것 같고.
"그러지 마시고, 다른 걸로 해봐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어차피 체험일 뿐인 걸요."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말야, 단순한 체험이었는데 아까 그 싸이코는 우리 집 문을 찢어버렸잖아."
"그렇죠."
"아까 내가 좀 늦게 말했으면 죽는 거 아니었냐?"
"그렇긴 하죠."
이젠 화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이번엔 환각으로 체험해보시겠어요? 그러면 죽을 위험도 없고, 누가 다칠 필요도 없고 좋거든요."
"그런 건 좀 빨리 얘기해!"
그 뒤로 나는 몇 번 더 체험을 해보았다. 연인의 품에서 죽는 것이나, 가족들의 보살핌 안에서 죽는 것이나, 우주의 소멸을 지켜보며 죽는 것이나, 그외 여러가지-물론, 그것도 골랐다. 어흠.-를 말이다.
너무 많이 죽어서일까. 심적으로 많이 지쳤다.
'아무리 환각이라지만, 장난 아니군.'
십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무전기에선 다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심풀이로 생각하지 말고 좀 제대로 해주세요."
"그럴 생각이었다."
사실 난 이걸 단순히 무료함을 달래줄 무언가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 그래."
"뭔가 생각나셨나요?"
"네 추천을 한번 받고 싶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
"글쎄요."
곰곰이 생각하는 듯, 무전기는 한동안 말을 않았다.
"저라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생각해보겠어요."
"그래?"
"예. 그게 저희가 일하는 이유 아니겠어요?"
그의 말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완벽한 답을 들었는데,
"결정했어."
"정말요? 말씀하세요."
"나의 죽음으로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하게 해줘."
"예. 알겠습니다."
나는 순간 놀랐다.
"응? 이게 되는 거야?"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러자 내 몸이 환하게 빛났다. 피부가 벗겨지더니 예쁘고 흰 꽃잎으로 변했고, 피들은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가루가 되어 날렸고, 근육과 혈관은 푸른 잎이 돋아난 줄기로 변했다. 그리고 뼈는 이내 굵은 나무뿌리가 되어 땅에 깊이 박혔다. 내 몸이 무럭무럭 자랐다. 내 몸의 줄기와 나무들이 땅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빛에 닿은 총과 전차 따위의 무기들은 모두 녹슬어버렸다. 황무지는 곧 숲이 되더니, 윤기 나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빛나는 가루에 닿은 사람들은 얼굴에서 근심을 지우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내 나무가 팔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을 손수 묶어주었다. 아이들의 팔과 다리는 마치 나무에서 잎이 나는 것처럼 쉬이 자랐다. 책으로 적게 된다면 지구 상의 모든 나무를 다 베어도 모자랄 만큼의 행복한 광경이, 주마등처럼 내 눈앞을 지나갔다.
매우 따뜻하고 편안한 감촉이 내 온몸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행복한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정말 상관없었다.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무전기의 또렷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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