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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걸겠어요. 전부를요.
남자가 말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결연한 입술과 독기 어린 두 눈은 지금까지 남자에게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 의외인걸요.
흥미로운 듯 '그녀'가 답했다.
남자는 지금 모든 것을 내건 도박판에서 전부를 잃은 참이다. 남자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삶을 걸었다. 최후까지 남겨두어야 할 삶, 그 전부를. 진작 선택이란 단어는 효용성을 잃었다.
실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처음에 도박은 돈으로부터 시작됐다. 남자가 '그녀'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건 원체 도박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 탓도 물론이지만 ‘그녀'가 무척 매혹적이었던 이유가 더욱 크겠다. 남자에겐 그만 둘 기회가 많았다. 어때요, 더 하시겠어요? 매 게임 전 ’ 그녀‘는 분명히 물어왔건만, 남자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둘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만두어선 안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남자는 게임을 계속했다. 이 도박이 분명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게임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조차.
잃은 돈이 아까웠던 것은 아니다. 그래 봐야 고작 4만 7천 원이었으니. 그렇담대체, 그런 푼돈 게임이 어쩌다 삶을 내거는 지경까지 이른 걸까? 이 유야 많겠지만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다. 그저 ‘그녀’가 몹시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그녀'가 먼저, 섰다 할 줄 알아요?라고 물었을 때만 해도 남자는 다른 맘을 품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섰다’ 아닌가. 물론이죠,라고 대답하며 남자는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듯 얇은 러닝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젖꼭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엉덩이가 다 드러난 짧은 면 반바지 차림이었고 머리는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헝클어져 있었지만, 헝클어짐에는 묘한 섹시함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들 고양이 같은 그 눈을 뿌리 칠 수 없었다.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치명적이란 표현은 바로 이 여자를 위함이구나. 그 단어는 온전히 ‘그녀’의 소유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남자는 하마터면 고이는 침을 그대로 흘릴 뻔했다. 가까스로 삼켰지만 실내는 너무나 고요해서 온 공간이 꿀꺽하는 목젖을 주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분명 유혹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화분 하나를 옮겨 달라며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에 남자 홀로 사는 방문을 두드리는 여자라니. 도움이 필요한데요. 그렇게 말했었다. 삐딱하게 담배를 물고, 팬티 같은 바지와 가슴골 훤한 러닝셔츠를 입고서는.
남자는 사실 '그녀'를 얼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낡아빠진 여관의 주인집 딸내미인데 간혹 카운터를 보고 있어 드나들며 마주치곤 했다.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나눌 때도 있었다. 남자는 이런 촌구석에 저 정도의 미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간혹 '그녀'를 떠올리며 수음을 하기도 했던가. 전엔 전처를 생각하며 그 짓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모습도 가뭇해져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기에 '그녀'는 하나의 대안이었다. 그런 '그녀'가 문간에 나타났을 때 남자 마음이 내심 동하지 않을 리 있었겠는가. 물론 '그녀'의 행동을 정상적이라 할 순 없겠지만 기실 세상에 정상적인 일이 몇 가지나 된다고.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생각은 오로지 앞장서는 '그녀'의 둔부에만 집중될 뿐. 남자의 방이 있는 2층 끝 방에서부터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남자는 한 시도 ‘그녀’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암시였다. 엉덩이는 독립된 하나의 생물로써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씰룩, 하고 엉덩이가 말하면 벌떡, 하고 남자의 그것이 답했다. 씰룩씰룩, 엉덩이가 말하면 벌떡벌떡, 남자의 그것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엉덩이와 씰룩 벌떡 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남자는 1층 카운터 안쪽 방까지 와 있었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성인 서너 명은 너끈히 굴러도 넉넉할 크기였다. 그에 반해 집기류는 단출해서 TV와 미니 냉장고, 구석에 널브러진 누비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어쩌면 카운터를 보는데 그 이상의 물건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불쾌하리만큼 깨끗했다. 마치 갓 포장을 뜯은 물건처럼 손때의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단지 신경 써서 관리했다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완벽한 깨끗함이었다.
- 화분은 어디 있죠?
남자의 물음에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보였다. 칸막이를 전부 떼어 낸 냉장고 속에 작은 선인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 이걸 현관으로 옮겨주시겠어요?
조금 정신이 나간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남자는 했다. 자칫하다가 이거 코 끼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옅은 경계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육체가 정상을 한참 웃도는 것이었으므로.
남자는 가뿐히, 화분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가뿐할 수 없었다. 흙 아래로 온통 돌을 채워 넣은 것 마냥 화분은 상당히 무거웠다. 확실히 여자 혼자 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도움을 청한 것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 해도 굳이 이 시간에 옮겨야만 하는 걸까? 그러나 늘 그렇듯, 남자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는다. 깊이 생각할 필요 뭐 있겠어.
낑낑대며 남자는 화분을 들었다. 허리가 휘청거리고 팔뚝이 덜덜 떨렸다. 요만한 화분 하나 들었을 뿐인데 시멘트 포대를 이고 가는 듯했다. 그나마 망정인 건 현관이 가깝다는 것이었다.
- 보기보다 무겁네요.
화분을 내려놓으며 남자가 말했다.
- 많이 가벼워진 거예요.
팔짱을 끼고, 여전히 담배를 문 채로 ‘그녀’가 말했다. 담배연기에서 향 냄새가 풍겼다.
- 목마르시겠어요.
'그녀'는 카운터로 돌아가서 오렌지 주스를 가져왔다. 남자는 조금도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분명, 냉장고에는 선인장뿐 이었건만 주스는 차가웠다.
- 잘 마셨습니다. 그럼 이만.
하고 남자는 돌아서려 했다.
그때, '그녀'가 말한 것이다. 이렇듯,
- 섯다 할 줄 알아요?
라고. 남자는 속으로 '오호. 이것 봐라.' 동시에 ‘호오, 저것 봐라’ 했다. 서서히 '그녀'가 본래 목적을 드러낸다 확신하며. 남자는 부러 뜸 들여 대답했다.
- 음... 물론이죠. 흠... 한 판 하자는 말씀인가요?
- 관심이 있다면.
- 돈내기 인가요?
- 당연한 것 아닌가요?
- 허... 그런데 돈이 위층 방에 있네요. 하... 오르락내리락하기 번거로운데 차라리 제 방에서 하는 건 어떨까요?
- 아니요. 카운터를 비울 수 없어요. 가지고 내려 오세요, 준비해 놓을게요.
- 참... 이 시간에 누가 이런 변두리 여관엘 온다고...쯧...그래요 뭐... 카운터에서 합시다. 어디서 하던 어떻겠습니까, 한다는 게 중하지.
물론 남자의 합시다는 다른 의미의 합시다임을, ‘그녀’도 익히 알고 있을 테다.
남자는 우선 방으로 올라갔다. 지갑 속엔 전부 4만 7천 원. 전부라는 의미 그대로의 전부였다. 어차피 섰다는 구실임을 알기에 남자는 천 원짜리 일곱 장과 만 원짜리 한 장만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러고는 서랍장을 열어 콘돔을 챙겼다. 그건 여관방에 기본으로 비치된 콘돔이었는데 장기투숙을 하는 요 몇 달간 단 한 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가 내려왔을 때 '그녀'가 말 한 준비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방 한복판 차곡하게 개어진 누비이불 위에 화투장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세 병의 카스맥주와 까놓은 오렌지가 있었다. 잠시 후면 저 이불속에서 뒹굴고 있겠군, 남자는 웃음 지었다.
게임은 허탕이었다. 한판을 이기지 못했다. 정신이 '그녀'의 허벅다리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음문가에 온통 쏠려있어 통게임에는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푼돈 1만 7천 원은 몇 판 못가 동나고 말았다.
- 다 잃어버렸네. 어쩌죠 이제?
능글맞은 억양으로 남자가 말했다.
- 벌써요? 전 조금 더 하고 싶은데......
- 알겠어요. 돈을 더 가지고 오죠.
그래,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자고 생각하며 남자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이제 지갑엔 삼만 원밖에 없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전부라는 의미의 전부임에도.
남자는 육 개월 전 아내와 이혼을 했다. 결혼 칠 년 만의 일이었다. 실패한 사람이 다 그렇듯 남자 역시 착각이 문제였다.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치킨집을 열 때까지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오 년을 자동차 세일즈로 뛰면서 사람 대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사업이 세일즈 같진 않았다. 잘 될 것이란 건 남자의 착각일 뿐. 오래지 않아 가게는 문을 닫고 자연스레 가정에도 불화가 찾아왔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고 잠자리에서 등을 돌리더니 이윽고 각방을 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남자는 어려울 때 손 잡아 줄 아내가 필요했지만 아내는 남자 앞에 손을 감추었다.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비울 때처럼 남자를 만지기 꺼려했다. 어느 날 남자는 술에 잔뜩 취해 아내가 자는 방으로 들어가 펑펑 울었더랬다. 하지만 아내는 베개 밑에 머리를 파묻고 이불을 뒤집어쓴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이토록 서러이 우는데 남편이 이렇게 힘이 든데. 남자는 견딜 수 없었다. 이불을 세차게 거두고 아내를 일으켰다. 아내는 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남편을 노려보았다. 아내의 눈빛에 경멸의 빛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남자는 아내를 껴안았고 그제야 아내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강하게 버둥대는 아내의 뺨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후려치고는 급하게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저항하는 아내를 몇 대나 더 때리고 나서 남자는 거칠게 삽입하려 했다. 하지만 아내의 그곳은 사막과 같이 말라 있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남자는 손바닥에 잔뜩 침을 발랐다.
얼마 후 남자는 이혼을 했다. 이혼을 당했다. 몇천이나 되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위자료인 동시 벌금. 사유는 부부 강간이었다. 그날 밤 모든 것을 보아야 했던 남자의 다섯 살 배이 딸아이는 이젠 남자의 얼굴만 봐도 울음을 터트렸다. 그 이후 남자는 세간을 피해 신창 촌구석까지 찾아들었다. 그러고는 근처 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며 가까스로 이자를 충당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겠거니 싶었다. 사람을 피하고파 현장 사람 누구와도 친히 교제치 않고 건설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도 마다한 채 낡은 여관 장기투숙을 하는 남자였는데 어쩐지 오늘은 '그녀'의 방문이 무척이나 달가웠다. 사실은 남자 역시 사람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그녀'가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라 하자. 다신 없을 것 같던 성욕마저 이렇게 꿈틀대는 걸 보면 말이다.
돈을 갖고 남자가 다시 내려왔을 때 '그녀'는러닝셔츠 목덜미를 길게 늘여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젖무덤이 훤히 보였다.
- 밤인데도 꽤나 덥네요.
양 볼이 상기된 채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미치도록 교태스러웠다. 게임은 다시 시작됐고 남자는 여전히 이기지 못했다. 이번엔 자꾸 부채질을 하며 열어젖히는 '그녀'의 가슴 때문이었다. 오래지 않아 삼만 원도 끝을 보았지만 오히려 그건 남자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게임을 더 하고 싶은 눈치였다.
- 이제 남은 돈이 없는데...... 더 하려면 현금인출기에서 뽑아와야 해요.
거짓말이었다. 현금 인출기로 간다 해도 통잔에는 잔고가 남아있지 않았다.
- 아휴, 아쉬워라. 그럼 제가 돈을 도로 돌려줄 테니 다시 하는 건 어때요?
- 그럼 재미가 없죠.
- 그렇지 하긴. 어쩐다...... 아! 이건 어때요? 전 돈을 걸게요 아저씬 다른걸 거세요.
- 다른 어떤 걸......
- 음...... 그러니까 아무거나요. 예를 들면 지금 입고 있는 셔츠 같은 거?
드디어 본격적으로 나오는 군, 남자는 생각했다.
- 이 낡은 셔츠를요?
입고 있는 검정 폴로셔츠 자락을 잡아당아당기며 남자가 말했다.
-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죠.
- 셔츠 다음엔 바지인가요?
- 그럴지도 모르죠.
- 하하하. 좋습니다. 이거 긴장하지 않으면 알몸 신세가 될 수도 있겠는걸요.
-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묘한 눈빛을 던지며 '그녀'가 말했다.
- 그런데 이거 불공평하지 않아요?
게임을 다시 시작하려는 찰나 갑작스레 남자가 말했다.
- 생각해보니 게임은 공평해야 맞잖아요.
- 뭐가 공평하지 않다는 거죠?
- 저는 셔츠를 거는데 그쪽은 돈을 거는 점이요. 확실히 불공평해요.
'그녀'는 옅게 웃었다.
- 그건 저한테 불공평한 일 같은데요?
-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전 속살을 보일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 한단 말입니다. 몇 푼의 돈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거죠. 만일 누군가가 그쪽에게 몇만 원을 쥐어주며 셔츠를 벗어 줄 수 있냐고 한다면 그럴 수 있나요? 물론 그쪽은 여자지만 남자라고 쉽게 벗을 수 있는 건 아니죠.
- 뭐 그럴 듯하군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 그쪽도 셔츠를 거는 겁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 어렵게도 말하는군요. 좋아요. 저도 셔츠를 걸게요. 공평함을 위해.
뜻대로 되어간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게임에 임할 것이다.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웬만해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먼저 '그녀'의 옷을 다 벗게 한 후 그다음엔 가슴을 엉덩이를 그곳을, 그렇게 차례로 몸을 만지는 것을 걸고 키스를 걸고 섹스를 걸고, 생각만으로 이미 남자는 바짝 발기되어 버렸다.
하지만 게임은 남자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자신감은 여전히 착각일 뿐이었다. 꼭 한 끗 차이였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 '그녀'는 한 끗을 앞서 있었다. 남자는 어느 새 셔츠와 바지와 팬티를 모두 잃었다. 자신의 말처럼 알몸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아마도 남자를 만질 수 있는 조건을 걸 것이다. 아마가 아니라 확실해. 남자는 생각했다.
- 정말 알몸이 되었군요.
남자가 말했다. 손바닥으로 그곳을 가리는 따위의 소심한 행동 없이.
- 생각 이상이군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한층 떳떳하게 뒷 바닥을 짚고 앉기까지 했다.
- 이제 무엇을 걸까요? 보다시피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남자의 말에 '그녀'가 내놓은 조건이 란 너무 의외의 것이었다. 음흉한 남자의 속과는 전혀 상관없이. 도통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말.
- 심장을 거세요.
- 예? 그 무슨......
- 심장이요. 쿵쾅거리는 그 심장 말이에요.
남자는 이 여자가 뭐하자는 건가 싶었다. 심장을 걸라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그녀'의 속을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 깊게 생각할 필요 뭐가 있는가. 어차피 '그녀'의 행동은 처음부터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 홀딱 벗고 여기 있는 것도 상식이란 범주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아니던가? 또 모르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한층 자극적인 유혹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남자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중요한 건 심야의 좁은 방에서 벗다시피 한 예쁜 여자와 홀딱 벗은 건장한 남자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대체 무슨 이유와 납득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녀가 말했다.
- 심장을 건다면 저도 벗겠어요. 공평한 게임을 위해 말이죠.
이 한마디에 남자의 사고는 정지했다. 깊이 생각 할거 뭐 있겠어.
- 그렇죠! 그게 공평한 거죠. 이제야 생각이 통하는군요.
- 심장을 걸겠다는 뜻인가요?
- 그래요. 걸겠어요. 그런데 제가 또 지게 되면 어떻게 심장을 가져갈 거죠? 칼로 가슴을 도려내기라도 할 건가요?
러닝셔츠 들어 올리는 '그녀'를 훑어보며 남자가 물었다. '그녀'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바지 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으며 남자의 말에 답했다.
- 아니요. 그런 방법은 너무 야만적이라서요. 게다가 바닥도 지저분해지고요. 제가 알아서 가져갈게요. 깨끗한 방법으로요.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그녀'의 엉뚱한 발언에 남자는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하긴, 그 순간 '그녀'가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남자에겐 매력적일 것이었다.
- 무척 궁금하게 하는군요. 그럼 빨리 시작해보죠.
두 손을 빠르게 마찰시키며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란 걸 알았다. 제대로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이젠 사라졌다. 패를 집는 순간 어차피 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남자가 무엇을 내던 '그녀'는 한 끗 위를 낼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그녀'가 어떤 트릭을 쓰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지만 이 게임에서 남자에게 승패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감 이 맞았다. 남자는 장사였고 '그녀'는 장삥이었다.
- 심장을 가져가겠군요. 자, 어떻게 가져 갈 거죠?
장난스러운 말투로 남자가 말했다.
- 이미 가져왔어요.
'그녀'가 답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심장 부근으로 손을 가져갔다.
- 여기를 만져보세요.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그러쥐려 했다.
- 아니요. 제 것 말고 그쪽 가슴이요.
남자는 내밀던 손을 멋쩍게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다.
- 뛰고 있나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고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
- 아하하하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 남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하하하. 그래서 가져갔다구요? 이봐요. 심장 같은 건 특별히 쿵쾅대지 않는 이상 미세하게 느껴져요. 게다 가제 손바닥을 봐요. 굳은살 투성이죠. 투박하고 거친 손이 작은 박동 정도 못 느낄 수 있는 일이라고요.
- 하지만 그쪽의 심박은 미세하지 않은 걸요. 처음부터 쿵쾅댔어요. 나를 보았을 때부터.
- 좋아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자, 다음엔 무얼 걸까요? 아하하. 아, 미안해요. 비웃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웃겨서. 하하하하.
남자가 웃던 말던 '그녀'는 아랑곳없었다. 그저 침착하게 다음에 걸 것을 말할 뿐.
- 이번엔 입을 가지고 싶군요.
- 입을 맞추고 싶다는 말이겠죠. 심장을 뺐었다는 건 제 맘을 가졌다는 의미이고 마음을 가졌으니 이번엔 입을 가지겠다. 즉 나와 키스를 하고 싶다. 꽤나 은유적인데요? 음...... 확실히 그쪽이 제 마음은 가진 것 같군요.
- 좋을 대로 생각해요. 어쨌든 걸 거예요 말 거예요?
- 걸죠. 걸어. 물론 걸어야죠. 아하하하. 귀여워요 그쪽
- 그럼 입술을 잃기 전에 그쪽이 원하는 대로 키스를 해드리죠.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감싸고 깊은 키스를 했다. 그러면서 남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로 포개었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 위로 손끝을 미끄러트리며 부드럽게 유두를 건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는 전혀 설레지 않았다. 물론 몸이 느끼기에 아랫도리는 터질 듯 팽창했지만 가슴이 뛰지 않았다. 지금 같은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계속 가슴이 설레었는데 어쩐 일인지 막상 '그녀'를 품에 안 자 조금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녀'를 눕히고 '그녀' 위에 올라야 하는데 맘이 동하질 않았다. 그저 건조한 기분이었다.
10여분의 키스를 마치고 남자와 '그녀'는다시 게임에 들어갔다. 남자는 세 끗 '그녀'는 네 끗이었다. '그녀'는남자를 향해 혀를 샐쭉 내밀어 보였다.
- 어머. 어쩌죠? 입을 가져야겠네요.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남자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술이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어떻게던 입을 벌려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표정만 일그러질 뿐 입은 꼭 다문채였다.
- 소용없어요. 입을 갖는다고 했잖아요. 이번엔 눈이 예요. 계속하겠어요?
남자는 이제야 비현실적인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키스했을 때 아무 감흥이 없던 것은 정말 심장을 뺏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그녀'는 정말로 입을 앗아가 버렸다. 빼앗긴 것들을 찾으려면 게임을 계속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입이이 상태라면 굶어 죽는 건 금방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세차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 필요 없어요. 그쪽이 생각하는 건 제게 다 들리니까요. 방금 제 욕을 한 것도 들었거든요. 괜찮아요. 욕먹을만하니까요.
이윽고 눈이 걸린 다음 게임이 시작됐고 남자는 눈을 잃었다. 눈을 잃어도 게임은 계속됐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패와 '그녀'만은 보였다. 게임을 계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남자는 귀와 코와 폐와 간장과 비장과 폐장과 신장과 대장과 소장과 쓸개와 위와 삼초와 방광과 손가락과 발가락과 이외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속에 있는 기관들은 사라짐을 느낌으로 알았고 드러난 기관들은 모양만 남은 채 기능이 정지했다. 그것도 이내 감각을 잃게 되자 잃었다는 것 조차 인지 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그저 도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의 몸은 공갈빵처럼 껍데기만 존재했다. 자신이 왜 계속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지금 이현실인지 꿈 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찾아야 한다는 집념 뿐.
- 자 이제 뇌만 남았네요. 뇌를 걸겠어요?
'그녀'는 슬슬 지루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곧 무언가 결심 한 듯 남자가 말했다. 아니, 생각을 전달했다.
- 제안을 하고 싶어요.
- 흥미롭군요.
- 종목을 바꿉시다. 섯다로는 안 되겠어요.
- 어떤 걸로요?
- 가위바위보.
- 겨우?
- 아니요. 이게 제일 공평해요.
- 공평한 걸 많이 따지는 군요. 나도 슬슬 질리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요. 가위바위보로 하죠.
- 그리고 또. 이번판에 그쪽은 내게서 뺏어간 모든 걸 걸었으면 해요.
- 그렇다면 그쪽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걸 걸어야 할 텐데요?
- 삶을 걸죠.
- 뭐라고요?
- 삶을 걸겠어요. 전부를요.
- 하......
'그녀'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이내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는 건 남자와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한참을 웃던 '그녀'가 한 순간 정색을 하고 말했다.
- 필요 없어요, 그 따위 것.
그러고는 언제 웃었냐는 듯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 그쪽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어요. 그냥 뇌를 걸겠다고 했다면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쪽의 뇌를 가지고픈 마음도 사라지네요. 겨우 이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뇌라면 말이죠. 협상은 결렬됐어요. 어쩜, 삶이라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져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닳은 헝겊처럼 질질 끌려갈 뿐. 현관까지 남자를 끌고 간 '그녀'는 화분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그 자리에 남자를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곧장 화분과 함께 카운터로 돌아갔다.
현관 앞에 홀로 구겨진 채 남자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이렇게 뇌까렸다.
- 이럴 거면 한 번 주기나 하던가. 씨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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