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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86408
    작성자 : Scary
    추천 : 16
    조회수 : 2438
    IP : 49.173.***.209
    댓글 : 10개
    등록시간 : 2016/02/21 16:01:48
    http://todayhumor.com/?panic_86408 모바일
    [전편] 랜섬웨어


    모든 일이 몰아닥쳤다.
    왜 이렇게 인생이 꼬여버린 건지 호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발단은 경마장이었다. 금요일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기석이 호윤에게 연락을 해왔다. 주말에 약속이 없으면 낚시나 가자는 내용이었다. 오늘 아침에 놀이동산에 가자며 새끼 손가락을 걸어오던 딸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기석의 제안을 무시하기엔 그가 가진 인맥이 내심 아쉬웠다. 소위 말하는 벼락부자의 아들인 기석은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도금한 수저 정도는 되는 인물이었다. 대학 때 기석이 왜 호윤에게 관심을 가진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내심 호윤은 가진 자의 동정심 때문일 거라 추측하고는 했다.


    호윤은 고아였다. 사람들의 눈시울에 절로 물기가 어리게 하는 그 고아라는 타이틀은 항상 호윤에게 기묘한 열등감과 더불어 뭉근한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호윤은 남들보다 더 배는 열심히 살았다. 손가락질과 동정 섞인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 호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란 노력을 제 삶에 쏟아부었다. 자동차 딜러 일을 하며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더럽고 힘겨운 순간에도 호윤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어보였고 고객을 위해서라면 장거리 운전과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석과의 관계도 어찌보면 업무의 연장이었다. 친구인 기석은, 대놓고 말하기에는 미안하지만, 호윤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동년배인 기석이 거창한 커피숍을 차려놓은 채 골프니 여행이니를 운운할 때마다 호윤은 닳아질 대로 닳아진 배알이 배배 꼬이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기석은 자신의 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스스로가 갑부의 아들이라는 것 정도야 인지하고 있어도 본래부터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자란 까닭인지 기석은 가난의 메마름을 몰랐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의 미움을 몰랐다. 친애의 감정을 비쳐오는 상대를 혼자 음습하게 미워하는 것 역시 생각보다 비참한 일이었다.
    그래도 인생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속으로 미워하면서도 호윤은 기석이 단어 그대로의 '사람좋은 사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기석이 연결해준 고객만 해도 벌써 여럿이었다. 그 소개가 아쉬워서 호윤은 기석과의 관계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래서 이럴 때 아무 생각없이 권해왔을 기석의 제안 역시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오전에 아내는 시무룩해하는 아이를 달래면서도 비어있는 호윤의 주머니에 오만원권 두 장을 넣어주었다. 어렵게 자란 아내 역시 상황으로 인해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비참한 순간을 잘 알고있었다. 칭얼거리던 아이가 호윤에게 안겨왔다. '다음에. 다음에.' 바동바동 손짓발짓을 해보이는 아이를 향해 호윤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말을 못했다. 동시에 듣지도 못했다. 고대하던 아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호윤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하지만 존재만으로 아이는 퍽퍽하던 호윤의 삶을 물렁물렁하게 바꿔놓았다. 아이가 말을 못하면 호윤이 대신 웃어주었고 아이가 듣지 못하면 호윤이 대신 안아주었다.
    호윤은 고아였기에 부모의 정을 몰랐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개념이 있다는 걸 호윤은 인생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아마도 아이의 삶은 평탄하지 않을테지만 그래도 호윤은 자신의 자식으로 태어나준 딸이 안타까우면서도 고마웠다.


    기석은 계속 차를 몰았다. 낚시터로 가는 길은 이미 예전에 한참 벗어난 후였다. 어디로 가냐는 호윤의 물음에 기석은 새로운 터를 알아냈다며 대박인 포인트라 큰소리를 쳐댔다. 그래서 기석이 낚시터가 아닌 풀이 성성한 경마장에서 차를 멈췄을 때 호윤은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심지어 기석이 안내한 경마장은 불법 사설 도박장처럼 보였다. 배팅 한도가 정해지지 않았고 배율 역시 비이상적으로 높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을 이런 일로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제와서 빠져나갈 수도 없는 일이라 호윤은 순순히 기석의 뒤를 따랐다. 한창 진행되고 있던 게임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신경질적인 고성과 욕설이 터져나왔다. 마토를 사며 기석이 호윤에게 어떤 말을 선택할지 물어보았다. 애초에 거절이라는 선택지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였다.
    두 마리의 말을 고르라는 얘기에 호윤은 찬찬히 둘러보다 가장 비루먹은 회색말을 골라냈다. 나머지 한 마리는 그냥 보지도 않고 선택했다. 어차피 호윤은 경마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다. 물론 경마라는 게 호윤이 집중해서 고른다고 꼭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튼 기석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잠깐의 승리감을 만끽하자고 기석보다 돈을 더 따거나 해서 괜한 짜증을 유발할 필요는 없었다.
    말이 들어오는 순서를 또 정하라고 해서 호윤은 회색 말이 일등,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검은 말을 이등으로 해서 돈을 걸었다. 호윤이 가진 전 재산 사십만원이었다. 이 이상으로는 더 걸려고 해도 지갑에 돈이 없었다. 아내가 아침부터 전해준 십만원을 이런 도박에 쏟아붓는 게 꽤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는 돼야 기석이 만족할 듯 싶었다. 호윤은 한 방에 큰 돈을 걸고 모두 잃은 다음, 기석 옆에서 앓는 소리를 낼 생각이었다. 사십만원이 기석에게는 푼돈일지 몰라도 호윤에게는 큰 돈인만큼 기석 역시 아마 한 번 웃고 더 이상은 배팅을 권하지 않을 터였다.
    출입문이 열림과 동시에 말들이 뛰쳐나왔다. 달려! 달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숨을 죽인 채 마권을 움켜쥔 사람들, 아예 눈을 가려버린 사람까지 지켜보는 모양새도 참 가지각색이었다. 심드렁한 기색을 고함으로 감추며 호윤은 기석 옆에서 결과를 지켜보았다. 호윤이 돈을 건 회색마는 열의 중간에서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었다. 검은 말은 꽤 준마였는지 꾸준히 상위권이었다. 회색마가 한 마리를 제쳤다. 그리고 점박이인 또 다른 한 마리를 제치고, 그리고 한 마리, 또 한 마리 더, 결승점에 이르러 호윤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회색 말과 검은 말이 나란히 일,이위를 겨루었고 순간의 찰나에 회색 말의 갈기가 결승점을 갈랐다.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한심해할 틈이 없었다. 거대한 소리 속에서 호윤 역시 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호윤이 짠 조합은 배팅한 사람이 소수에 속했다. 사십만원이 순식간에 거금이 되어 호윤의 품에 안겨들었다. 찰나지만 기석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는 것도 눈에 보였다. 현금 대신 골드바를 배당금으로 받으면서 호윤은 이게 현실인지 상상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차를 몇 대를 팔아도 쉽게 만져볼 수 없는 큰 돈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예상이 적중할 때의 그 짜릿함, 주시하던 말이 선두를 차지할 때의 고양감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돈을 잃은 기석의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평소라면 언짢은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기위해 노력했겠지만 오늘은 치솟은 자신의 아드레날린을 달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첫 회에 워낙에 큰 돈을 벌어서인지 뒤의 게임은 잃거나 소소한 금액을 버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그래도 호윤은 들뜬 기분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게임 중반에는 이제껏 아쉬운 소리 해본 적 없던 기석이 호윤에게 마권 살 돈을 빌려달라 부탁을 하기도 했다. 사백이라는 돈이 작지는 않아도 골드바가 든든했고 무엇보다 기석이 이 경마장만 벗어나면 자신보다 배는 부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진실이었다. 호윤이 골드바를 건낼 때 처음으로 기석이 호윤을 향해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건 언제나 호윤이 지어야 하는 표정이었지 갑인 기석이 호윤을 향해 내비치지 않는 얼굴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호윤은 한아름 선물을 안아들었다. 평상시에는 천원 단위, 가격과 실속을 따진답시고 같은 자리를 뱅뱅도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호윤에게는 돈이 있었다. 얼굴이 보일지 않을 정도로 한가득 물건을 사들고 온 호윤을 보고 아내와 딸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는 벌써부터 가격을 따지는 기색이었고 딸은 생일을 만난 것마냥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아내에게 호윤은 골드바를 내밀었다. 다른 것은 다 환전을 해도 하나만은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내는 깜짝 놀란 채로 이부터 들이밀었다. 이빨 자국이 난 골드바를 보고 호윤은 하하 웃었다. 경마라는 말에 아내는 작게 성을 냈지만 넉살 좋게 립스틱을 들이미는 호윤을 보고 결국에는 웃어보였다.


    주말을 넘기고 출근을 해서 일상이 시작되었지만 호윤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차를 보고, 손님이 와도 호윤의 머릿속에는 계속 마토와 신호음, 질주만 되풀이 됐다. 그 짜릿함, 승리의 유쾌함, 거머쥐는 돈, 부러워하는 눈, 모든 게 마약이었다. 호윤은 자신의 운을 믿었다. 그날의 기석 역시 제게 말했다. 사실 근래 돈을 너무 많이 잃어서 초심자의 운을 조금 얻어가고 싶었다고. 그래서 낚시터라는 미끼를 내걸어 호윤을 이리 데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운은 모조리 호윤에게 작용했다. 기석은 그날 단 한 번도 승리를 잡지 못했다. 정말로 승리의 여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손을 번쩍 들어올린 건 단연코 호윤이었다. 호윤은 승리자였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호윤은 그 전율을 다시 만끽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주말에 호윤은 당직을 핑계로 다시 그 경마장에 나갔다. 비밀리에 운영하는 곳이라 검증된 회원만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오랜 단골인 기석이 보증을 해주었기에 쉽게 입장할 수가 있었다. 호윤은 차례로 배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배팅액은 고민 끝에 십만원을 걸었다. 흥분된 기분으로 경마장을 다시 찾기는 했지만 현실감각은 어느 정도 돌아온 상태였다. 십만원, 이십만원, 삼십만원, 호윤의 주머니가 차례로 비어갔다. 일곱번째 경주가 끝난 타이밍에는 주머니에 단 돈 삼만원만이 남아있었다. 호윤은 이제 돈을 따기보다 잃은 돈을 되찾아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여덟 번째 게임에 호윤은 암갈색 7번 말에 자신이 지닌 삼만원을 모두 걸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간당대는 차의 기름을 보며 부르튼 입술을 잘게 씹었다.


    호윤은 주말뿐만 아니라 근무 사이사이에도 고객응대를 핑계로 경마장을 찾았다. 처음에는 용돈을 아껴 들어놨던 자유예금을 털었고, 나중에는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 승리마를 점쳤다. 돈은 마개 빠진 수채구멍마냥 줄줄 손 사이로 빠져나갔다. 차를 팔아 남는 자잘한 이익금 역시 호윤의 뒷주머니에서 곧장 경마장으로 흘러들었다. 아내가 호윤의 중독 사실을 알게 된 건 딸아이를 위해 들어놨던 이 년짜리 정기적금을 호윤이 멋대로 해약했을 때였다. 처음으로 아내의 입에서 거친 욕이 나왔다. 호윤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아내가 못내 야속했다. 딱 한 방, 딱 한 방이면 충분했다. 딱 한 방만 홈런 치면 그간 손해 본 금액을 모두 만회하고 남부럽지않게 떵떵대며 살아갈 수 있었다.


    호윤이 경마에 매달리는 건 한편으로 딸애 때문이기도 했다. 장애아를 위한 시설은 아무래도 지방보다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었다. 땅값이 워낙 비싸 서울에는 들어서지 못했지만 서울 언저리에 자리잡고 호윤은 딸애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 어린데다 듣고 말하는 게 단절되어 있어서 그런지 딸아이는 또래의 애들보다 발달 수준이 훨씬 느렸다. 상담사는 아이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인지의 격차가 점차 줄어들 거라 얘기했지만 부모된 입장으로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든지 돈이 문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건 곧 도태를 뜻했다. 안 그래도 장애를 가진 아이를 필요 이상으로 고난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절절 끓는 호윤의 심정을 아내는 영 몰라줬다. 언제 차 한두대 팔아서 돈을 번단 말인가. 좀 더 판이 큰 시장이 필요했다. 그게 호윤에게는 바로 경마장이었다.


    호윤이 몇번째일지도 모를 게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식당에서 일하겠다 단언했다. 연애할 적에 음식점에 가서 반찬 리필조차 수줍어하던 아내였다. 그간은 아이를 돌보느라 손을 놓고 있었지만 당장에 나갈 돈이며 세금이 얼마인데 아이가 유치원에 간 틈에라도 일을 하겠다는 거였다. 아내를 그렇게까지 내몬 자신이 부끄러웠다. 호윤은 다시 예전의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그래서 경마장에서 큰 한 방을 노렸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돈이 나올 구석이 없었다. 월급은 계좌이체였고 통장은 어느 때부터 아내가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십, 이십 판돈을 거는 건 그다지 성미에 차지도 않았다. 적어도 백, 이백은 걸어야 경마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호윤은 돈을 마련할 방법을 찾아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고아인 자신은 비빌만한 친척도 없었고, 아내는 외동에, 장인장모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터라 돈을 빌려줄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번쩍, 호윤은 친구인 기석을 떠올렸다. 사백만원. 내가 빌려준 돈.


    기석의 번호를 눌렀을 때 호윤은 쉽게 돈을 돌려받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기석은 부자였고, 일이백 정도는 술집에서도 금세 뿌렸다. 기석에게 사백이라는 돈은 아마 용돈 정도의 값어치이지 않을까, 호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연락이 닿고 잔뜩 가라앉은 기석의 목소리가 닿아왔을 때도 어제 과음을 했나보다, 호윤은 그런 추측이나 했다.


    돈....... 말끝을 흐리며 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그 짧은 틈에도 애가 탄 호윤이 부드러운 어조로 기석을 채근했다. 그래, 언제 줄 테냐. 기석은 또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지금 카드가 묶여있으니 며칠간 말미를 달라 부탁해왔다. 며칠 간 경마장 입구에도 가보지 못한 호윤이 순간 악 소리를 지를 뻔 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고 그래, 알겠다며 대화를 끝맺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호윤은 나날이 흘러가는 날짜만 세었다. 언제 기석이 연락을 하나 핸드폰만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흘러도 기석에게선 단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그와중에 아내는 호윤이 날려버린 금액을 한 번 셈하고는 경멸에 찬 얼굴로 각방을 제안했다. 작은 서재에서 뛰어난 경주마에 대한 칼럼을 읽으면서 호윤은 얼마되지도 않는 사백 때문에 잠수를 타 버린 기석에게 득득 이를 갈았다.


    정확히 이 주 되는 째에 호윤은 기석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락이 없으면 직접 찾아가면 되지. 며칠 간 기석에 대한 괘씸함을 곱씹으면서 호윤은 기석에게 빌려준 돈이 일종의 운의 나눔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했다. 도박에는 미신도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첫 승리에 대한 배당금이었던 사백을 너무 쉽게 빌려줘버린 게 아닌가 싶어 호윤은 뒤늦게 후회했다. 카페에 이르러 호윤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빌려준 돈을 되받으러 왔다고 해서 굳이 언성을 높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데스크에는 익숙한 기석의 모습 대신 처음 보는 외견의 낯선 남자가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바인가 했지만 아무리 봐도 주인의 행색이었지 직원으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최기석씨 없습니까. 질문을 하는 호윤에게 의아한 낯을 하던 남자는 아! 단발음을 내더니만 '그분은 여기를 매도하셨고 지금은 제가 사장입니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정확한 기간이요? 아마 두 달 되었죠.' 가게를 등지고 나오면서 호윤은 밀려오는 분노와 초조함을 누르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미친 사람마냥 거리 한복판에서 펄펄 날뛸 것만 같았다. 애초에 돈을 갚을 생각이 없었던 거다. 게다가 두 달 전이면 기석이 낚시터랍시고 호윤을 경마장에 데려간 날짜와도 얼추 일치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기석에게 뭔가 사정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기석의 입으로 목이 좋다 껄껄댔던 이 황금상권을 남에게 쉽게 넘겼을 리가 없었다.


    그 길로 호윤은 석식 후에 찾아가려했던 고객과의 응대도 모두 캔슬하고 잠시나마 기석과 동거했던 바의 여사장을 찾아갔다. 몇 번 기석을 따라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두어번 헤매자 기억 속의 바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오픈 준비 중에 호윤을 맞이한 여사장은 눈가를 가느다랗게 좁히고는 정리되어있던 바스툴로 호윤을 안내했다.
    '...기석씨? 망했잖아요. 기반 없는 부자가 그렇지 뭐. 사업 확장한답시고 이것저것 손대던 아버지가 휘청이고, 기석씨야 솔직히 한량이고. 지금은 어디 사는 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개털일걸?' 거나하게 한 번 한숨을 내쉰 여사장은 호윤을 보고 '그래도 멀쩡하네?' 피식 웃어보였다. 영문 모를 소리에 호윤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자 '아니, 술 취한 사람의 헛소리니까 이렇게 말 옮기는 것도 우습기는 한데, 기석씨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러니까 삼 주 전인가? 그때 술을 진탕 마시고는 엉뚱한 소리를 했거든요. 자기가 호윤씨를 죽였다나 뭐라나. 처음에는 호윤씨가 누구인가 하다가... 아무튼, 별 일 없는 거죠? 내가 원래 잔걱정이 많아요.'


    기석하고 연락 안한지 오래라는 여사장의 말은 아무래도 진실인 것 같았다. '인생 불쌍하니까... 사실 나한테도 백 정도 빌려갔는데 그냥 적선한 셈 쳤어요. 마음 고생이 심한 지 사람이 반쪽이 됐더라니까. 본바탕이 나쁜 사람은 아니고 되려 물러서 문제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쪽박을 찼으니 어디 제정신이겠어요. 그나마 초반에는 여윳돈이 있으니 좀 멀쩡했었는데, 그것도 순간이고....' 하지만 여사장과 달리 호윤은 기석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기석이 쫄딱 망했다는 걸 호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제야 호윤은 기석이 굳이 낚시터까지 운운하며 초심자의 운에 기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던 거였다. 따로 돈 나올 구멍이 없으니 어떻게든 도박으로라도...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사백이라는 돈을 선뜻 기석의 손에 들려주었다. 배팅에서 쓰여야 할 소중한 운을 한낱 친구놀음에 모두 소진해버린 것이다.


    한 번 분기가 치솟으니 과거의 일까지 겹쳐 기석에 대한 호윤의 배신감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졌다. 끝끝내 어려운 사정을 말하지 않은 것도 따져보면 괘씸했다. 무엇 때문에 호윤이 기석 앞에서 빌빌거렸나. 다 돈,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제 저나 나나 비슷한 신세가 된 것은 뻔한데도 호윤의 비굴한 아양을 모르는 척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길로 호윤은 연락처에 저장되어있던 친구 한 명에게 재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기석과 호윤의 공통 지인이었다. 너에게 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호윤은 실제 사정이야 어쨌든 깨끗이 지워버리고 그냥 기석과 다퉜으니 다리를 놔달라 그런 부탁만 했다. 아, 그런데 내가 나오는 건 굳이 말하지 마.... 솔직히 전화를 걸면서도 호윤은 기석을 만나기는 요원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저 얼마 전까지는 자신과도 연락이 됐었고 아예 빚쟁이마냥 잠적해버린 건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누군가가 식사라는 빌미로 연락이라도 하면 혹여 나오려나 싶은 그 정도의 기대때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기석이 일식집 룸 안으로 꾸물대며 들어섰을 때 호윤은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문 쪽을 응시하던 호윤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자 새하얘진 기석이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진솔한 사과를 핑계로 친구를 못 오게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호윤은 기석의 멱살을 채서 거칠게 자리로 끌어내렸다. 마치 풍이라도 맞은 사람마냥 기석은 호윤을 보며 계속 덜덜 떨었다. 핏줄이 터져 주황빛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귀신이라도 본 양 계속 방정맞게 흔들렸다.
    처참할 정도의 기석의 몰골을 보고 호윤은 돈을 받기 글렀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본래 통통했던 기석의 뺨은 홀쭉하게 꺼져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내쉬는 숨에서 비릿한 구취가 났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일부라도 돈을 돌려받자는 호윤의 계획은 초장부터 성립될 수가 없었다. '야 이 새끼야, 내 돈! 내 돈!' 훅하고 분노가 치밀어 호윤은 멱살을 잡은 채로 마른 가지같은 기석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엉겁결에 호윤의 얼굴을 마주한 기석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괴력으로 호윤을 단숨에 밀어버렸다. 뒤로 나동그라진 호윤의 등에 날카로운 테이블의 모서리가 강하게 찍혔다. 씨발새끼! 고통과 더불어 격노가 찾아들었다. 흔들거리는 기석의 몸을 깔아뭉갠 호윤이 사정 없이 기석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세팅되었던 반찬이 쏟아지고 버둥거리는 기석의 움직임에 자잘한 동전이며 알 수 없는 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호윤아! 호윤아! 피거품이 이는 잇몸으로 기석이 호윤을 불렀다. 내가 잘해줬잖아! 우리 친구잖아! 한 번만 봐 줘! 한 번만 봐 줘.... 사정을 하면서도 기석은 끝끝내 호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제 돈을 그대로 꿀꺽하겠다는 뻔뻔한 심보에 호윤은 하하 웃으며 솥뚜껑같은 손을 들어 기석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씨발! 새끼! 친구가! 뭐! 친구가! 뭐! 호윤의 팔이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메마른 기석의 볼에 푸른 실핏줄이 터졌다.
    돈 내놔! 돈 내놓으라고! 야 이새꺄, 네가 그것 빼면 뭐 볼 거나 있어! 처음으로 흔들리던 기석의 눈이 호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 표정에 호윤은 절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야! 그럼 네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줄 아셨어! 호로 새끼! 부모 아니면 인생 시궁창이지! 그러니까 돈 내놔! 돈! 내놓으라고! 말의 말미에 호윤은 기석의 목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끅끅 숨을 들이키는 기석의 눈에서 피인지 물인지 모를 게 뒤섞여 흘러내렸다. 깔딱 넘어가려던 기석의 숨을 붙인 건 전채를 들고 문을 열던 점원의 높은 고함이었다.


    호윤도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인지 묻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방 밖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잔기침을 하며 기석이 몸을 둥글게 마는 게 눈에 보였다. 경찰이네, 폭행이네 사람들이 가슴 철렁할 말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호윤의 다리를 이번에는 기석이 피가 묻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내가... 갚을게.... 갚아.......' 쉰소리를 하는 기석의 팔뚝을 호윤은 발을 털어 단번에 제게서 떨어뜨렸다. 난장판이 된 방 안을 호윤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국물이며 음식들이 흰 양말에 감겨들어 갈수록 기분은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딱한 무언가가 발끝에 채여 호윤은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예전에 호윤이 사은품으로 챙겨준 네모난 핸즈프리 마이크였다. 기석에게 그걸 줄 때의 비굴한 자신이 떠올라 호윤은 이를 갈며 마이크를 세차게 던져버렸다.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사람들의 쑥덕거림이 한층 더 톤을 높였다. 하지만 흉흉한 낯의 호윤을 막기는 무서웠는지 가게를 빠져나오기까지 특별한 방해는 없었다.


    그 날 저녁에 서재에 앉아 호윤은 두려움과 짜증에 책상을 쿵쿵 쳐댔다. 혹시라도 기석이 신고를 하지는 않을까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제 돈을 받기는 글렀다는 사실에 머리 끝까지 울분이 치솟았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기석을 찾아가 난리를 치고 회를 뜨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내일 경찰이 찾아오면 어쩌나 방 안을 휘휘 돌기 일쑤였다. 같이 놀자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스마트폰 동영상을 틀어주고 각방은 쓰고 있어도 사과를 깎아 건네주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런 소중한 가족을 두고 자기가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잠에 들지 못해 뒤척이는 호윤에게 문자가 날아온 것은 흰 새벽 즈음이었다. 전화번호 11자리, 기석의 폰번호였다. 문자를 터치하자 계좌번호 열세자리와 금 사백만원 정이라고 적힌 글자, 링크가 걸린 URL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해서 호윤은 낯을 찌푸렸다. 특히 문자 하단에 적힌 '당신의 삶을 되찾으십시오.'라는 문구는 광고인지 협박인지 도통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오전에 자신에게 실컷 두들겨맞은 기석이 이제와서 돈을 입금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윤은 머뭇대다 링크를 눌렀다. 순식간에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이게 뭔가 싶어 한동안 까만 액정을 가만히 들여다봐도 화면은 그 상태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설마 억하심정에 바이러스라도 보낸 건가 해서 호윤은 인상을 구기며 뒤로가기를 누르려 했다. 그 순간 까맣기만 하던 화면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똑,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액정 한가운데에 붉은 점이 생겼다. 우글거리는 벌레마냥 점의 가장자리는 끊임없이 빨갛게 움직이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에 기분이 상한 호윤은 창을 빠져나와 그대로 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자고 있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기석은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돈을 갚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문자에 기재되어 있는 계좌조차 자신의 통장이 아닌 낯선 번호의 조합이었다. 정신적 피로가 층층이 겹쳐 호윤은 아무렇게나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대충 깔아놓은 요 위에 몸을 눕혔다. 호윤이 잠에 빠진 이후 어두워진 방을 배경으로 낯선 영상이 빠르게 재생되다가 뚝 순식간에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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