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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 극의 내용 전개상 다소 불편한 내용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1). 나는 이곳에 갇히기를 소망한다.
강한 불빛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아저씨, 의사겠지? 내 눈에 빛을 비춰보고, 내 표정을 면밀히 관찰한다. 물론 별다른 애정이나 관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의례히 하는 일,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다.
운다. 익숙한 흐느낌이 들려온다. 시선도, 고개도 돌릴 수 없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저희 애... 좀 나아졌나요? 차도가 있나요? 네? 선생님!”
“지금으로선 별다른 징후는 없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말밖엔 드릴 말씀이 없네요.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큰 사고였지만,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은 회복력이 강하니까요. 종종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정말요? 아우 주여...”
“간호사, 약 계속 투여하고, 반응 보이면 알려주고! 알았지?”
“네 선생님”
하얀 가운의 아저씨가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침대가 뒤로 눕혀지고 있었다. 다시금 보이는 것은 하얀 벽, 불규칙한 문양이 새겨진 천장의 닥트들, 깜빡 거리는 형광등뿐이다. 눈이 아프다. 눈조차 깜빡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병실 안의 건조함이 안구를 더 붉게 칠한다. 작은 새가 눈알을 쪼아대면 이런 기분일까? 무수히 작은 통증들이 연신 눈 위에 쏟아졌다.
하지만 난...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좋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나를 위한 길이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불만일 뿐, 그 이상의 바람은 없다.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하얀 벽, 하얀 천장, 그리고 손가락 하나, 눈동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이 완전한 감옥 속에 영원히 갇히기를 소망한다.
0. 당신은 어떤가요?
인간의 성격과 인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만큼이 선천적인 것이고, 또 얼마만큼이 후천적인 것일까?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누군가는 살아온 그대로 변함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어떤 계기를 통해 전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혹자는 말한다. 50:50, 선천성과 후천성 그 비율은 50%정도가 아니겠냐고! 인생은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무 많이]니까! 나는 그 의견에 동의 한다. 50:50이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다만 모두 그걸 숨기고 있을 뿐이다.
여기 아주 평범했던 선천적인 성격과 인격을 지닌 내가 있다.
너무 보잘 것 없어서 특별한델 찾으려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할 정도였던 그 아이,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바로 그 아주 평범했던 나란 아이의 이야기다.
1. 장래희망이 영화감독인 아이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작년과 달리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것, 이번엔 남녀공학이 아닌 여고라는 것, 그것 외엔 별다른 것이 없었던 그런 날이었다.
“엄마! 내 도시락! 도시락 어딨어? 빨리! 나 늦었단 말야!”
“아침 다 차려놨는데! 잠깐 와서 한 술이라도 뜨고 가! 엄마가 너 좋아하는 김치찌개 끓여놨는데!”
“지금 늦었는데 그럴 시간이 어딨어! 빨리 도시락이나 줘! 언능!”
“얘는 이럴 시간에 한 숟가락만 뜨고 가지!”
“됐어! 나 다이어트 시작할거야! 그리고 나 만원만!”
“만원? 또 왜? 저번에도 돈 필요하다고 해서 줬잖아!”
“아이씨! 그게 언젠데! 친구들이랑 피자 먹으러 가기로 했단 말야! 얼른!”
평소 때처럼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즈음, 아빠가 베란다 쪽에서 걸어오며 말했다.
“설희 너! 중간고사 성적표 나올 때 되지 않았냐!”
나왔다. 내 방 책상 서랍 아래쪽에 고이 잘 모셔져 있다. 하지만 바쁜 아침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얼렁뚱땅 넘어가기 좋은 시간이다.
“저 늦었어요! 이따가 와서 얘기해요! 저 가요! 엄마 안녕!, 아빠 안녕!, 나비도 안녕!”
우리 가족은 네 명이다. 아빠, 엄마, 나, 그리고 엄마가 아끼는 검은 고양이 나비, 나비란 이름이 촌스러워 몇 번이나 바꾸자고 했지만, 엄마는 그게 편하고 쉽다며 번번이 내 요구를 묵살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비는 꽤 도도한 녀석이었고 우리 중 나비가 가족으로 인정한 사람은 아직 엄마뿐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당신!! 또 베란다에서 담배 피웠어요? 어휴 담배냄새! 좀 나가서 피우라니까요! 윗 층 사람들 욕해요!”
“어! 아니! 그게! 저... 날도 춥고... 아! 알았어! 나가서 피우면 되잖아! 사람 참!”
“도대체 그 말만 몇 번째에요?”
“아이고 알았어! 밥이나 줘! 밥!”
바쁜 날일수록 엘리베이터는 늦는 법, 밖으로 나왔지만 문 안에선 엄마 아빠의 실랑이가 계속됐다.
이때는 몰랐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를...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영화감독이 되면 유명한 배우들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잘 생기고 예쁜 배우들을 손가락 하나로 좌지우지하는 현장의 지휘자, 영상의 예술가!
막연한 환상에서 시작된 장래희망이었지만, 난 내 나름대로 꿈을 향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설희야 너 또 뭐하니?”
“아! 보면 모르냐? 나 시나리오 쓰잖아! 영화 시나리오!”
중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에 와서도 같은 반이 된 민주였다. 민주는 좋은 애였다. 내 시나리오는 누가 봐도 재밌는 구석 하나 없는 따분한 내용이었지만, 민주는 싫다는 말 한 번 없이 늘 꼼꼼히 읽어줬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착한 아이, 그게 민주였다. 물론 행동이 약간 굼떠 답답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누가 뭐래도 민주는 중학교 때 부터 나의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였다.
“봐! 이거 딱 영화화 되면! 강동원, 조인성, 원빈, 이제훈, 박보검 다 캐스팅 할 거야! 너는 내 친구니까 제일 먼저 만나게 해 줄게!”
나는 짐짓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워본다. 17살 소녀의 허황된 궤변이 귀찮을 만도 하건만, 민주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가 건넨 시나리오를 받아들었다.
“어련 하시겠어? 참 그보다 전에 쓴 시나리오는 어떻게 됐어? 인터넷에 올려본다고 했잖아! 그 뭐지? 제목이... 아! 맞다! [그 놈은 맛있었다]였나? 반응 좀 있어?”
가슴이 아련하다. 민주 이 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잘도 내 아픈 구석을 찔렀다.
[그놈은 맛있었다] 내가 최근 집필한 로맨스 영화의 시나리오로, 강남을 평정한 통합 짱, 화가 나면 여자도 때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 하지만 조각 같은 외모와 늘씬한 키를 소유한 그가 평범한 고교생인 여주인공 소희를 사랑하게 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룬 달콤짭짤 틴에이져 무비 시나리오다.
올리자마자 주옥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중삐리냐? 이딴 것도 시나리오라고] [야 이건 내가 발로 써도 이거보단 낫겠다] [님아 맞춤법은 좀 맞춰가면서 써요. 무식한 거 티나니까] [요즘은 개나 소나 쓰는구나?]
망할 놈들... 재미없으면 말 일이지... 굳이 악플을 다는 그 심리가 뭘까?
어젯밤 본 악플들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화가 뻗히지만, 나는 꾹 참고 웃으며 민주에게 말했다.
“아직! 아직은 별 반응이 없네! 올린 지 얼마 안됐잖아! 내일쯤이면 반응 제대로 올 거야!”
“그렇구나! 넌 열심히 하니까! 결국엔 뭔가 좋은 걸 쓸 거야! 너무 조바심 내지마!”
“아니 전혀! 조바심이라니! 민주야 두고 봐! 난 진짜 영화감독 될 거야! 그래서 꼭 깐느도 가고, 베니스에도 갈 거야! 무조건 대한민국 최고 꽃미남 배우랑 결혼 할 거고! 알지? 강동원은 내꺼, 그리고 박보검은 니꺼! 히히히!”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히히히!”
2. 이 구역 미친년의 탄생!
그날 저녁,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 탈고를 마친 새 시나리오 ‘양아치의 유혹’ 초고를 인터넷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한국 영화진흥원 시나리오 마켓, 여기에 시나리오를 올리면 영화사 관계자들이나 투자사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읽고 좋은 작품일 경우 금액을 지불하고 사 간다.
감독수업의 첫 발을 내딛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곳에도 악플은 존재한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하릴없는 백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이나 이름을 까고 쓰게 했다면 아마 대부분 쪽팔려서 댓글도 달지 못 할 텐데, 이 하릴없는 백수 아저씨들은 가녀린 여고생의 처녀작까지 질근 질근 짓밟아 버렸다.
후우 하고 한숨이 먼저 터져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지난주에 올려 둔, ‘그 놈은 맛있었다.’ 시나리오에 악플이 배는 더 늘어 있었다. 도대체 비싼 밥 먹고 악플이나 쳐다는 인간들은 무슨 심리일까? 한심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엄마의 휴대폰을 이용해 나는 새 아이디를 하나 더 만들었다.
닉네임부터 괴랄 맞다.
[이구역미친년]
그래 이거면 된다. 이거면 그 동안 내 글에 지독하리만치 따라다니며 악플을 달아 온 놈들에게 속 시원한 복수를 해줄 수 있다. 그것도 완전히 안전하게! 그리고 감쪽같이! 기존의 내 계정은 프로필도 달렸고, 이미 시나리오를 몇 편 올려 둔 터라 이미지 관리가 필요 했다. 하지만 이 계정은 아니다. 이름부터 모든 것이 다 가짜다!
나의 비밀 계정의 첫 임무는 일단 자기 헌신으로부터 시작했다. [그 놈은 맛있었다. 전 이거 되게 재밌던데요? 악랄한 남주를 길들이는 앙큼상큼 매력녀 소희! 이름도 예쁜 거 같아요. 소희!] 그렇다. 극중 인물이자 나의 모든 작품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페르소나 소희! 소희는 나의 또 다른 자아다. 나는 늘 소희를 통해 멋진 남자들과의 장밋빛 로맨스를 꿈꾼다. 이름이 내 이름인 설희와 유사한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비밀계정의 두 번째 임무를 정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단 자기 헌신의 댓글 아래에 곧바로 [님 혹시 이 시나리오 작가임?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요. 이 개 초딩 소설을!] [간만에 크게 한 번 웃었습니다. 님 최소 조정X?] 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곧바로 닉네임을 통한 추적이 시작됐다. 보아하니 이놈들도 나와 같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다.
각각 서너편에서 대여섯편의 시나리오를 등록해 놓고 있었다. 나의 잘 못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시작한건 그쪽이 먼저였고, 난 그대로 갚아 줄 뿐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의 난 그저 평범한 뻥쟁이 여고생에 불과했지만, 넷 상의 나는 꽤나 거만하고 깐깐한 평론가였다. 신랄한 평가와 거침없는 욕설은 나의 전매특허!
[이건 볼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글이네요]
[이런 병신 같은 글도 시나리오라고 올린 건가요?]
[우리 집 고양이 나비도 이것보단 잘 쓰겠음]
[너네 엄마가 이런 거나 쓰라고 미역국 먹은 줄 아냐? 엄마가 불쌍하다.]
[이 분 최하 촛잉, 엄마 쭈쭈 더 먹고 와!]
어느 순간부터 난 악플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내 안에 억눌려 있던 분노의 폭발, 공격성의 가감 없는 발현, 뭐라고 해도 좋았다. 악플을 보고, 속상해 할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며 희열을 느꼈다. 때론 나의 악플에 악플로 대응하는 사람들과 한바탕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격한 단어들이 퍼부어지는 댓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적은 뻘글을 무한 투척했다. 나 역시 질세라 욕설과 비하로 격렬히 대항했다. 상대는 매번 바뀌어도 결과는 같았다. 단언컨대 난 악플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또는 몽고반점의 칭기스칸이었다. 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반드시 승리했다.
왜냐하면 그런 뻘 짓은 결국 잃을게 많은 사람이 지게 마련이고, 난 잃을 것 없는 평범한 여고생에 불과했다. 게다가 상대방과 달리 학생인 나의 시간은 무한..., 그 막강한 물량공세에 모두가 무릎을 꿇거나 꼬리를 내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사실 이런 인간들의 공격이래 봐야 ‘너 몇 살이야! 너 초딩이지?’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허나 그건 결코 나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반면 나의 필살기인 ‘그래~ 넌 나이 많이 처먹어서 좋겠다. 등신아!’는 수많은 적장의 목을 베어낸 전가의 보도이자 완벽한 카운터 킬러였다.
내가 더 이상 시나리오를 쓰지 않게 된 것도 거의 그 즈음이었다. 열심히 써 봐야 반응이 영 신통치 않은 점도 있었지만, 난 어느새 또 다른 나의 자아에 빠져 있었고, 그 자아는 평소의 나라면 할 수 없는 말들을 척척 내뱉었다.
[조금의 가식도, 포장도 없는 솔직한 말들...]
그랬다. 악플, 그리고 이 구역의 미친년은 바로 나였다.
3. 미친년 눈을 뜨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이후 나의 일상도 조금은 달라졌다. 아니 성격 자체가 조금 변했다고 할까? 약간 소심하고 낯을 가리던 내가 대범하고 뻔뻔해 졌다. 전보다 친구도 잘 사귀고, 명랑하고 쾌활해졌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 반대급부로 단짝처럼 지내던 베프 민주와는 조금 소원해졌지만, 솔직히 말해 새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답답한 민주와 있는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가끔 마주치는 민주의 애잔한 시선을 무시하는 것은 미안했지만, 언제까지나 내 친구가 민주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내가 그랬듯, 민주도 새로운 환경과 교우관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그런 하찮은 변명들로 나를 정당화시키고 있을 즈음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잘생긴 교생 선생님이 오셨고, 남보다 좀 더 착하고, 남보다 좀 더 외로웠던 민주가 교생 선생님을 유독 잘 따랐다. 그래서였을까? 민주가 교생 선생님에게 꼬리를 친다며, 웃는 모습이 영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몇몇은 민주를 왕따 시키자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어떤 모의에도 끼지 않았고, 끝까지 침묵했다. 나로선 단짝이었던 민주를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새 친구들도 생겼는데, 민주의 잘못에, 나까지 왕따 당할 순 없었다.
민주는 내내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유일하게 이 반에서 민주를 괴롭히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 솔직히 말해 무시는 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그 아이를 피하고, 외면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 친구들이 보고 있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며 착했던 민주니까, 내 재미없는 시나리오도 꼼꼼하게 읽어주던 착한 친구니까! 그 정돈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문제는 그 즈음에 시작됐다.
난 달라지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비싼 옷도 입고, 멋진 남자애랑 연애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화장도 잘 못했고, 그들처럼 마르지도 않았으며, 부유하지도 않았다. 수업시간 내내 나는 망상에 젖었다. 망상 속의 나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유명한 재벌기업의 숨겨진 딸, 영화배우처럼 멋진 남자들이 나를 유혹했고, 나는 비싼 술을 마시고, 비싼 옷을 입으며, 눈부신 보석들로 치장했다. 그리곤 호화로운 유람선을 타고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다. 따듯한 날씨, 찬란한 햇빛, 사람들은 아름답고 돈 많은 나를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봤다. 그리고 내 곁을 지키는 멋진 남자들... 나는 로맨스 소설 속 공주와도 같았다.
그런 망상을 깨뜨린 건, 갑작스레 내 머리를 때린 무언가였다.
“채설희! 너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니? 수업시간엔 수업에 집중해야지!”
마녀란 별명을 지닌 학교의 노처녀 수학선생이었다.
째진 눈, 잔뜩 튀어나온 매부리코, 터져 나올 듯 팽팽한 아랫배, 당연히 아직도 결혼을 못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튀어나온 매부리코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마녀란 별명은 걸작이었다.
나는 그냥 짜증이 났다. 사실 아침의 일도 그렇고, 그냥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녀의 잔소리는 울고 싶은 아이 뺨때려준 격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치켜 든 채 말했다.
아니 사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터넷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던 [이 구역의 미친년]이 처음 현실 세계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씨발...”
“어머!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어머 나 황당해서...”
마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쓴다. 그녀는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교사로서의 권위와 체통을 지킬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나에게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안의 [미친년]은 인터넷을 통해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았다. 어쩜 그런 면에선 [미친년]은 패배를 모르는 백전의 노장이었다. 그리고 쌓아온 경험과 노련미를 바탕으로 방어가 아닌 직접적 공격을 감행한다.
“씨발! 니가 뭔데 날 때려!”
“뭐... 뭐? 너... 너 미쳤니? 야! 채... 채... 채설희! 너... 너 지금 뭐라고 해... 했어!”
미친년이 기선을 제압했고. 마녀는 강한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말을 더듬는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고, 미친년은 그걸 기회로 비틀대는 상대에게 연신 결정타를 먹였다.
“씨발! 씨발이라고 그랬다! 왜? 또 때리게? 때려! 때리라고! 야 니들 핸드폰 좀 꺼내! 그리고 찍어! 저 년이 나 때리는 거! 니들 다 증인이야! 알았지!”
“너어! 너! 너!!!”
혈압이 오르는 듯 굳어버린 목과 표정, 마녀는 이것만으로도 그로기 상태다. 교편을 잡아온 지 한 두해밖에 안된 신참교사도 아닌데, 그녀의 스테미너는 형편없었다. 가벼운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 마지막을 결정짓는 것은 물리적 행동을 동반한 강력한 훅이다.
“왜! 때리게? 때려! 어디 그 매부리코로 한 번 때려봐! 겁나 아프겠네! 생긴 건 짜증나게 생겨가지고! 왜! 왜 안때려! 이 병신아!”
숙인 내 머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녀의 가슴팍을 부벼댄다. 칠 테면 치라는 모양새다. 훅은 마녀의 유리턱에 정확히 꽂혔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놀란 표정으로 [너! 너!]란 말만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미 상대는 완전한 패닉 상태, 아마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대든 이는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정신이 든 것은 대략 그쯤이었다.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고, 미친년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나는 스스로도 화들짝 놀라 소리치고 싶었다. [제가 아니에요!] [미친년! 이 구역의 미친년! 바로 걔가 한 거예요!] [정말 이에요!] 하지만 내 안의 미친년은 이미 인터넷 속으로 숨었다. 현실 속엔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던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킥킥 거리는 소리들이 하나 둘 들려왔다. 난 알 수 있었다. 웃는 이는 모두 내 편이라는 걸! 웃음소리가 하나둘씩 커진다. 마녀를 지지하는 자는 없다. 문득 앞 쪽에 앉은 새 친구 하나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 채설희 죽이는데?]
[좀 짱인 듯!]
[너 깡 좀 있다?]
작은 웅성거림 들이 나를 떠받친다. 그 속삭이는 소리들이 나에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난 새 친구들의 반응에서 익숙한 기억속의 어딘가를 떠올렸다.
[인터넷, 그리고 나를 포함한 악플러들...]
다행히 타이밍 좋게 종이 울렸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마녀를 위한 종이었다. 마녀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아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감히 더 나서지는 못했다. 몇몇이 꺼내 민 휴대폰 카메라는 마녀를 완전히 물리쳤고, ‘너 내일 학교에 부모님 모시고 와!’ 정도가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그렇게 마녀는 종을 핑계로 꼬리를 내린 채 도망쳤다. 나의 완전한 승리!
아니... 미친년이 이뤄 낸 또 하나의 훈장!
분명 여긴 현실인데, 인터넷에서나 가능할 일들이 벌어졌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낯선 상황이란 이름의 조류는 이미 내가 어쩌기엔 너무 먼 곳까지 나를 끌고 왔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순식간에 학교의 유명인사가 됐다.
[일명 마녀에게 대든 2반 ‘미친년’]
하지만 그런 충격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일 이후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더 늘어났다. 그 애들은 나의 무용담을 듣고 깔깔대며 웃었다. 한 아이는 나를 다시 봤다며 언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고, 한 아이는 네가 그렇게 깡이 센 줄 몰랐다며, 자기 서클의 더 많은 친구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 뒤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그 중 죄책감을 가지는 아이는 없었다. 나는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이룬 혁명가였고, 또한 투사(鬪士)였다. 그런 사이 어느새 뒷자리는 나의 편안한 안식처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짙은 죄책감과 걱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전교 왕따 김민주!]
민주는 한층 더 엄마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주와 한 마디라도 말을 섞으면, 엄마처럼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민주를 외면했다. 민주와 함께 있으면 지지리 궁상인 내 현실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해 버리고 말았다.
“저년 진짜 재수 없지 않냐?”
“누구? 전따 김민주? 아 저년은 진짜 뭘 꼴아봐! 야! 누가 저 년 좀 화장실로 데려가서 대걸레로 얼굴 좀 빨아줘! 아주 씨발 얼굴에 나 재수없어요 하고 써놓고 있네! 교생한테 꼬리나치고!”
민주는 원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지만, 난 반론을 할 필요도, 나설 필요도 없었다. 일진중 하나가 말하니, 누군가 민주의 머리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도 이 일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들 킥킥 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다. 소수의 침묵파가 존재했지만, 그 애들도 결국 눈치만 볼 뿐이다. 나서면... 똑같이 당한다. 그 애들 중 누구도 착한 아이는 없다. 결국 침묵의 동조자다. 힘도 없고, 그저 눈치만 보는 벌레들!
언제 짓밟힐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현실속의 버러지들!
난 나의 숨겨진 다른 면인 ‘미친년’에게 감사했다. 그 앤 날 새롭게 만들었고, 강하게 했으며, 또한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새 친구들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지겨운 현실에서 날 구해냈다.
비록 나의 동의 없이 갑자기 튀어나와버린 것은 불만스러웠지만, 결과가 좋으니 크게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4. 누군가에게 상처주기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나의 짜증이 부쩍 늘었다는 정도였다. 물론 엄마는 착했고, 나의 투정에도 늦은 사춘기의 발현이겠거니 하며 웃어 넘겨줬다.
그런 면에서 엄마는 정말 바보 같았다. 내가보기엔 화를 좀 내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 답답했다.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답답했던 건, 무능력한 아빠와 결혼을 한 것이었다. 왜 우리 아빠는 돈을 못 벌까? 아빠가 벌어오는 쥐꼬리 만한 월급으론 내게 새 패딩점퍼를 사줄 수 없다. 나의 새 친구들은 모두 그 패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나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권리는 가정형편을 이유로 보기 좋게 무산됐다.
바보 같은 엄마는 미안해했고, 문제의 근원인 무능력한 가장은 외려 버럭 화를 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애먼 옷 타령이야! 옷도 한두푼이래야지! 100만원도 넘는 패딩을 우리 형편에 어떻게 사줘! 너 요즘 나쁜 애들하고 몰려다니는 거 아니야? 그 착하던 애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됐어! 공부나 해 공부! 전교 1등을 해도 사줄까 말까한데, 지금 니 성적이 어떤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해? 너 지금처럼 하면 대학은 커녕! 공장에나 들어가야 돼! 공장!”
무능력한 가장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아량마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능력을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로 돌리느라 바빴다. 그리곤 어김없이, 자시 입으로 한 약속마저 잊고 베란다로 나간다. 보나마나 또 귀찮음을 핑계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울 속셈이다.
“무능력자! 돈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 자기는 매일 비싼 담배 사다 피우는 주제에!”
나도 모르게 속엣 말이 튀어 나왔다. 아빠의 잔소리에 격해진 감정이 심한표현을 내뱉었다.
하지만 말은 심했어도, 틀린 말은 없었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너 지금 어떻게... 아빠가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시는데... 그럼 안 돼 설희야!”
엄마의 얼굴에 짙은 당혹스러움이 드리운다. 바보는 결국 무능력자의 편이었다. 이대로 머뭇거리다간 바보와 무능력자! 양쪽에서 잔소리를 쏟아낼지도 몰랐다. 나는 재빨리 의자 위 가방과 유행지난 패딩을 집어든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등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희야! 밥은 먹고 가!”
“됐어! 나 입 맛없거든? 자꾸 엄마가 [밥!밥!]거리니까 내가 자꾸 살이 찌잖아! 다 엄마 때문이야! 제발 그 놈에 밥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 밥! 밥! 밥! 엄마는 밥 밖에 몰라!”
죄 없는 엄마는 바보같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철없는 푸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렇게 홧김에 집을 나오려는데, 무언가 걸리적거린다. 밟고 나니 물컹했고, 이내 종아리가 화끈거린다. [끼야옹!]하는 날 선 나비 울음소리도 들렸다. 실수로 고양이 나비의 꼬리를 밟은 것이다. 할퀸 자리는 새빨간 것이 피가 베어나고 매우 아팠다.
“아야... 으...!”
“너 괜찮니! 조심하지 그랬어! 나비도 놀래서 그런 거야! 설희 괜찮아? 엄마가 약 발라줄게 기다려! 그러게 내가 밥은 먹고 가라니까 기어코 서두르더니!”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바보 같았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난 나는, 엄마가 또 다시 꺼낸 밥 얘기를 꼬투리 잡아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밥! 또 밥! 내가 제발 좀 그만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자꾸 살만 찌잖아! 내가 이런 게 다 누구 때문인 줄 알아? 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 닮아서 살이 안 빠지잖아! 그리고 난 왜 패딩 안 사줘? 다른 애들은 다 그 패딩 샀어! 엄만 하필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나도 돈 많고, 부자 엄마 아빠랑 살고 싶다고! 친구들 중에 왜 나만 이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야 되는데? 사줘! 왜 안 사줘? 왜! 왜! 왜! 차라리 낳질 말지 그랬어!”
[짝!]하는 소리가 들리고,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어느샌가 베란다에서 달려온 아빠였다. 무능력자는 마지막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했다. 그의 얼굴은 한껏 상기돼 있었고, 씩씩대며 역한 담배냄새를 풍겨댔다.
“너 이놈의 자식!!”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등 뒤에선 나를 애타게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생각 따윈 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내 마음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뛰었다.
사실 엄마와 아빠는 돈이 많지 않다는 점을 빼곤 착하고 좋은 분들이었다.
마치 내가 외면했던 민주처럼...
그들은 닮은 점이 많았다.
하지만 난 그래서 그들이 싫었다.
5. 악몽의 시작
5교시 체육시간이 끝나고 난 뒤의 체육 비품실 뒤편 외진 곳, 난 여느 때와 같이 새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연예인 얘기, 그 애들의 남자친구 얘기, 옷 얘기, 실없이 야한 농담, 뭐 그런 부류의 것들이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섰다.
익숙한 얼굴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아이, 민주였다.
“나랑 얘기 좀 해!”
민주의 얼굴에선 특유의 그 생글생글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 아이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몇 달 그 애도 나도,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마음은 [괜찮니?] [왜 웃질 않아?]였지만, 등 뒤의 가시 돋친 말들이 나를 먹어 삼켰다.
“뭐야! 채설희랑 전따 김민주랑 친해?”
“설마 저 재수없는 년이랑 누가 친구를 해!”
“학기 초에 둘이 좀 같이 다니지 않았어?”
수근 거렸다. 나의 왕국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싸워서 얻어낸 나의 자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전사가 되어야 했다. 모반을 꾀하는 적의 목을 단숨에 쳐 버리는 비정한 지배자!
그리고 그곳엔 더 이상 내가 아닌 그 애가 있었다.
[이 구역의 미친년!]
“이 재수 없는 년 보게? 내가 왜 너랑 얘길 해야 되는데? 너 나랑 친해?”
“설희야!!”
“아 씨발! 그만하세요! 누가 보면 너랑 나랑 친한 줄 알겠어요!”
손가락이 키 작은 민주의 이마를 찍어 누른다. 조용히 터져 나온 등 뒤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그랬다. 나는 아직 그 애들 사이에 있고, 나의 왕국은 공고했다. 민주 따위가 감히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론 약했다. 반역자의 처벌에 무른 군주는 반드시 또 다른 반역의 여지를 남긴다.
나는 철혈(鐵血)의 군주가 되어야 했다.
“설희야 너 왜 이렇게 변했니? 너 안 그랬잖아!”
민주의 애달픈 목소리가 들렸다. 생글생글 거리던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눈물이 맺혀있었다.
하지만 ‘미친년’에겐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무른 대처를 탓하는 철혈의 심장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미친년은 민주의 복부를 걷어찼다.
“악!”
“씨발 년아 누가 니 친군데? 누가 니 친구냐고!!”
민주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미친년의 발길질이 퍼부어졌다. 민주는 얼굴을 감싸고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었다. 때 마침 등 뒤에서 [얼~ 채설희 쎈데?] [김민주 저년 전부터 재수 없었어]와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또 한 번 도망쳤고, 그럴수록 미친년은 힘주어 민주를 밟아 댔다. 민주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됐다. 그리고 내가 비겁하게 마음속으로만 [그만, 이제 그만! 그 정도면 됐잖아]를 속삭일 때 쯤, 미친년은 곁에 서 있던 일진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아빠가 자주 풍기던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또 다시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왜 그래... 왜 그래! 도대체 뭘 하려고 그래!]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치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민주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살이 타는 듯 한 매캐한 냄새도 같이 퍼졌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비정한 웃음소리만이 그 곳에 있었다.
민주의 얼굴은 피와 흙, 눈물, 그리고 흉측하게 지져진 담배자국이 뒤엉켜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이 됐다. 그럼에도 들려오는 킥킥 거리는 악마의 웃음소리들...
[돼지를 구우니까 삼겹살 냄새가 나네?]
[이제 김민주 저 년 처 웃을 때마다 한 번씩 지져야겠다.]
[채설희 잘 했어!]
정신이 들었을 때의 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통제 할 수 없는, 잔인한 괴물!
망연자실 한 나에게 내 안의 괴물이 말했다.
[이젠 아무도 널 무시 못해!]
*****
교실 밖에서 찢어지는 듯 한 비명소리가 들려 온 것은 6교시가 끝날 무렵이었다.
“꺄아아악! 이게 뭐야!”
아이들은 수업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에 놀라 그 소리가 들려온 창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 소리쳤다.
“누가 뛰어내렸어!”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나도 고개를 내밀었다. 단단한 아스팔트 위, 누군가 그 곳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 짧은 단발, 익숙한 모양의 운동화, 나는 눈을 감았다. 그것을 볼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귀를 막았다. 누군가 [저거 혹시 전따 김민주 아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웅성거림은 나의 바람과 달리 더 커졌다. 민주의 이름이 계속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적어도 17년간 이 세상에 존재했던 민주는 겨우 20여분 만에 출동한 경찰과 앰뷸런스에 의해 치워졌다.
민주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고, 민주가 남긴 마지막 붉은 흔적 역시 한 시간도 안 돼, 희미하게 바래졌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민주는 내게 마지막 손을 내민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얼마나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을까?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새 친구다. 그리고 그 애가 말했다.
“쫄지마... 아까 일 아무도 몰라! 어차피 그 년 꼴도 보기 싫었어!”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이는 그 애도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괴물, 재미로 사람을 잡아먹는 잔인한 괴물!
괴담 속 괴물에겐 피도 눈물도 없다. 그저 자신을 강하게 보이기 위한 미소만이 있다.
기억났다. 제일 처음으로 민주를 가리키며 [저 년 교생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꼬리치는 게 좀 재수 없지 않냐?]라며 바람을 잡았던 그 아이다.
난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민주와 함께 했던 교실에서 민주를 지옥에 빠뜨린 그 애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막상... 막상 마지막 도움의 손길을 내민 민주를 걷어 찬 건 나였는데...
등 뒤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채설희! 어디가! 너 그 일 누구한테 얘기하면 안 된다! 알았지?”
나는 달렸다. 그 곳이 어디든 무작정 달렸다. 그리고 지쳐 쓰러졌을 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
미친년이었다.
[킥킥... 이게 니가 원한 거 아니었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애써 사귄 친구들... 버리고 싶지 않았잖아?]
“민주는... 민주는... 내...”
[민주가 없었으면, 니가 민주 꼴이 났을 거야!]
“아니야... 아니... 야”
[넌 그냥 널 지킨 거야. 죽은 건 민주가 선택한 거고, 아무도 등을 떠밀지 않았어! 넌 교실에 있었잖아! 생각해 봐! 민주를 괴롭힌 사람이 너 하나뿐이었어? 아무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알면서도 나서지 못한 선생들까지 모두!]
“그... 그건 그렇지만...”
[잘 생각해봐, 넌 민주를 괴롭힌 적이 없어, 다들 민주를 괴롭힐 때도 넌 그러지 않았어! 그냥 외면했을 뿐이지! 그리고 딱 한 번... 다들 하던 걸, 너도 딱 한 번 했을 뿐이야! 죄책감 가지지마! 바보같이! 그냥 도태 된 거야. 민주는 그냥 경쟁에서 낙오해 조금 먼저 간 거야. 그 뿐이야.]
나 자신에 대한 정당화는 달콤하다. 그것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쟤 김민주 죽으니까 뛰쳐나갔다며?]
[몰랐어? 원래 채설희 쟤가 김민주 베프였잖아]
[어머 정말? 갑자기 쟤도 재수 없다. 쟤도 좀 싸가지 없잖아!]
[그러게 선생님한테 한 거 봐!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인데!]
[소문엔 김민주 자살한 거 채설희 때문이란 얘기도 있어!]
[맞아 나도 들었어! 채설희가 민주 얼굴에 담배빵을 놨다며?]
[우린 장난이었는데, 쟤 진짜 미친 거 아니니? 어떻게 얼굴에 담배빵을 놔?]
[전에 베프였다는 애가 민주 얼굴에 담배 빵 놓은 거야? 저거 진짜 또라이 아니니?]
내게 손을 내밀며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던 그 애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 애는 여론을 장악하고, 나의 행적을 부풀렸다. 두어시간 만에 나는 헤픈 여자가 됐고, 세 명의 아이를 낙태했다. 하지만 가장 치욕스럽고 슬픈 사실은 내가 민주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 있다는 거였다.
[가장 친한 친구, 생글생글 잘 웃던 속 깊은 아이 민주, 그 애를 죽인 살인마!]
더 이상 학교란 공간 안에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한때 나를 중심에 넣고 조잘대던 입들이 이젠 나를 가리키며 잔인한 단어를 서슴치 않는다.
악플... 인터넷... 가상 세계 속의 악마들이 현실 속에 있었다.
내 안의 미친년처럼...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6. 예정된 파멸, 그리고 후회
나에겐 갈 곳이 없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집에 돌아온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와 터놓고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시 컴퓨터의 전원을 뽑았고, 키보드를 벽에 던져 박살냈다. 일종의 화풀이였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화풀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러한 분노는 애먼 컴퓨터가 아닌 오롯이 나 자신에게로 향했어야 할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난 어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그러한 생각들이 나를 좁은 공간 안에 가둬놨다. 그러면 될 것 같았다. 나를 가두면 내 안의 미친년이 더는 나타나지 않을 거란 헛된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니 그것은 매우 중대한 실수였다.
풀어낼 곳이 없던 내 자신을 향한 분노와 자괴감은 내 안의 미친년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대로 파괴된 일상 속의 나는 한 없이 더 약해져만 가고 있었다.
“얘! 설희야! 문 좀 열어봐! 도대체 무슨 일이니? 응? 뭔 진 모르겠지만, 밥은 먹어야지!”
변함없는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엄마에게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명제는 [밥을 먹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나에게 줄기차게 식사를 강요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아버지보단 나은지도 몰랐다. 무능한 가장이 몰랐던 건, 돈 버는 방법만은 아니었다. 딸의 슬픔을 이해하는 법도 몰랐다. 강한 발길질이 문을 두드렸고, 고함소리가 문 안쪽까지 파고들어 지친 내 마음에 비수를 꼽았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저런 아버지 따위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철없는 어린 마음이 만들어낸 투정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무능력한 아빠 따위, 필요없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라도 나를 감추고 싶었다. 도망쳐야 했다.
*****
“하아! 하아... 하아아...”
눈을 떴을 때의 나는 흡사 비를 맞은 듯 흠뻑 젖어 있었다. 집 그리고 잠 어디에도 살인자를 위한 안식처는 없었다. 오한과 함께 간밤의 지독한 악몽이 내 몸을 들쑤셔 왔다. 꿈속의 나는 민주의 뒤에 서 있었다. 귀를 찢을 듯 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추락. 끝없는 어둠속으로 그 작은 몸뚱이가 떨어진다. 작은 점이 되고, 점은 한 없이 작아졌다 또 붉게 피어오른다. 그 위에 내가 웃고 있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는 내가 있었다. 어느새 곁에 서 있던 미친년이 말했다.
[니가 등을 밀었다.]
[죽인 것은 너야!]
[방관자란 이름으로 도망치지마, 동업자의 다른 말일 뿐이니까!]
아니라고 소리치려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망치려 했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깨어났다.
목이 말랐다. 이렇게 땀을 흘렸으니 갈증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거실 한 복판에 걸려 있는 시계는 새벽 6시 무렵을 가리킨다. 다행히 식구들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고요했다. 조금 서둘러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이 맞다면 무능한 가장의 출근 시간이 이 즈음이다. 나는 아직 아버지와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급히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물을 연신 들이켰다. 너무 급했던지 목이 아프고 사래가 들렸다. 콜록콜록, 죄 많은 이의 입에서 차가운 보리차가 쏟아진다. 핏물을 토해내도 부족할 사악한 입이다. 급히 물통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삐걱 거리는 낡은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였다. 다행히 엄마는 바보답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곤 [내가 그새 깜빡 잠이 들었네,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프지?] 라고 물었다. 바보다웠다. 하지만 그런 익숙함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때 주방으로 들어간 엄마가 말했다.
“느이 아부지는 어디갔데냐? 차려 논 밥도 안 먹고...”
“바빠서 그냥 갔다보지!”
“아침 거르는 양반이 아닌데... 별일이네... 놔둬! 담배 태우러 나갔나보지, 찾을 것도 없다. 안 그래도 베란다에서 담배 좀 피우지 말라고 윗 층에서 또 뭐라 하길래 어제 한 소리 했어! 그래서 나갔나보지, 니 아부지보단 나비가 더 걱정이다. 어디갔는지 어젯밤부터 뵈질 않아...”
“나비? 나비는 왜?”
“몰라... 문도 닫혀있는데, 이놈이 없어졌네... 고양이 찾는다고 벽보라도 붙여야 되나? 나비야... 나비야...”
엄마는 쇼파 뒤와 TV 뒤쪽을 유심히 살피며 나비를 불러댄다. 배도 고프지 않지만, 테이블 위에 아빠가 남겨 놓은 식은 밥은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에이 한 술 뜨라니깐! 엄마가 국도 뎁히고, 밥도 새로 퍼 줄게!]라며 부르는 엄마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딸깍] 문고리의 버튼을 누른다. 바닥에 엎어진 컴퓨터와 부서진 키보드의 잔해만이 나를 반긴다. 다시 혼자가 됐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모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바라는 것은 하나, 모든 것이 시작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를 외면하지 않고, 새 친구들에 현혹되지 않으며, 인터넷 사이트에 새 계정을 등록하기 전,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똑똑하고 방바닥 위로 눈물이 아롱진다. 똑똑하고 목 뒤로도 차가운 물이 떨어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허탈한 감정이건만, 이 차가운 감촉이 주는 이질감이 싫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닦아낸다. 하지만 마치 시비라도 걸 듯 또 한 방울이 손등에 떨어진다. 격한 짜증스러움이 밀려왔다. 안 그래도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던 나였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선 밖이다. 목을 뒤로 끝까지 젖히고 나서야 비로소 이 이질적인 차가운 촉감의 근원은 실체를 드러낸다.
“꺄아아악!!!”
비명소리... 놀란 문 뒤의 엄마가 득달같이 달려와 왜 그러냐며 잠긴 문을 두드린다. 온 몸을 뒤 덮은 떨림이 호흡조차 가로 막는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탓에 호흡은 더 거칠어지기만 할 뿐,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축 늘어진 꼬리, 하품하듯 벌려진 입... 온통 새까만 털....
[나비가 내 방 천장에 박혀 있다.]
시퍼런 식칼이 나비의 가늘고 긴 몸뚱이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앉은 채 옆으로 뒷걸음질 쳤다. 바닥 위 내가 흘린 눈물 위로 핏물이 떨어져 섞인다. 시선을 내리니 손등 위는 이미 벌겋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악몽 같은 꿈속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친년의 목소리가 다시금 생생하게 내 귓전을 때렸다.
[니가 등을 밀었다.]
[죽인 것은 너야!]
[방관자란 이름으로 도망치지 마! 동업자의 다른 말일 뿐이니까!]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공포와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망치지 마!]란 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문을 향해 걸었다. 당장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리가 휘청 인다. 참혹한 나비의 시체를 뒤로 하고 잠긴 문고리를 풀자 놀란 눈을 한 엄마가 나를 안는다.
아끼던 고양이가 죽어 있는데도 엄마는 [괜찮아, 괜찮아, 놀랬지?]라며 나를 위로하느라 여념이 없다.
바보...
바보 멍청이..
그깟 게 문제가 아니잖아...
난 엄마를 거칠게 밀치며 소리쳤다.
“아빠! 아빠 어딨어!”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엄마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담배 피우러 나갔겠지... 근데 너 정말 괜찮아?”
나는 황급히 베란다로 나갔다. 낯선 웅성거림...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거기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민주가 있었다. 아니... 민주의 마지막을 닮은 빠알간 점이 보였다. 다른 것이라곤 겨우... 익숙한 낡은 줄무늬 파자마... 짧게 자른 머리... 아빠 정도의 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아주 느린 그림의 영상을 보듯 사람들이 모여든다. 데자뷰처럼 민주의 일이 눈 앞에 겹친다.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터폰...
떨리는 손... 초점을 잃은 눈동자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 두 마디만을 중얼거리는 입,
엄마가 결국 주저앉았다.
나를 지탱해주던 설마[아닐 거야]하던 그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공포와 불안감에 쓰러졌다.
허공에 매달려 휘청이는 인터폰, 버티고 버티던 두 다리도 따라 휘청 인다.
엄마가 오열했다.
7. 도망자
아버지의 장례식장,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와 구석에 앉아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목구멍을 넘어 끄억끄억하는 이상한 소리만 연신 넘어왔다. 신물이 치밀어 오르고,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빠의 영정사진 아래, 난 그렇게 꼼짝도 않은 채 이틀을 보냈다. 그리곤 발인이 있기 전, 새벽... 조의금 함 속의 돈다발 일부를 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어디론가 가야했다. 난 살인마다. 민주, 나비, 그리고 아빠를 죽였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엄마마저 죽여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무작정 서울역으로 가 기차를 탔다. 어떻게든 엄마와 가장 먼 곳으로 가야했다. 미친년의 손길이 엄마에게 닿지 않는 곳으로... 그것만이 내가 엄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산, 아는 이 하나 없는 생경한 도시... 건물도 길도, 사람들의 억양도 낯설었다. 허나 마음만큼은 편했다. 여기선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도 잃지 않는다. 그런 생각으로 며칠씩 거리를 헤맸다. 잠은 찜질방에서 자고, 끼니는 편의점 도시락과 라면으로 때웠다. 훔쳐온 조의금 다발이 많진 않았지만, 일단은 그렇게라도 버틸 수 있는 게 고마웠다. 돈이 없어도, 배고픔과 추위는 그나마 견딜 만 했다. 엄마를 보고픈 마음은 사정없이 가슴을 후벼 팠다. 다행인건, 여자에겐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가 많았다. 전단지, 벽보, 인터넷 까페에서도 왕왕 월수입 얼마 보장의 숙식제공 일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는 아닌지라,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허나 살인자가 된 더러운 몸뚱이를 아끼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라는 의문이 일었다.
“민주랑 아빠를 죽여 놓고, 니 몸뚱이만 깨끗 하려고?”
결정은 쉬웠다. 물론 일자리를 얻는 것은 더 쉬웠다. 마이킹[근로를 조건으로 한 유흥업소의 불법 대출?]을 해줄 테니 방을 구하라 했지만, 나는 가게 내의 방에서 머물겠다고 했다. 깊이 파인 옷들, 나뒹구는 술병, 찌든 담배냄새, 모든 것이 생경하고 불편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좋은 옷, 편안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이 더 죄스러웠다.
[난 살인자니까...]
아빠 나이대의 아저씨들이 술 취해 내 몸을 더듬고 만져도 불쾌하지 않았다. 내가 받는 고통만큼 나의 죄가 감해질지 모른다는 헛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어렵지 않게 새로운 생활과 환경 속에 적응 했다. 외려 불편했던 것은 손님보다는 같이 일하는 언니들과의 관계였다.
“사장 오빠야! 우리 요즘 느므 힘들다. 여기도 적정 수위라는 게 있는데, 저 년 어제 룸 안에서 무슨 일 까지 있었는지 아나? 이거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는기라!”
“야 이 썅년아! 나가 화류계 밥 먹은 게 10년인디! 느 같이 으린 나이에 막나가는 년은 처음본기라! 이 또라이 같은 년! 단디 해라잉? 콱 뒤져 뿔고 싶지 않으믄!”
“저 년 또 쌩까는 거 봐라! 미친 년! 진짜 확 마 뒤져 뿔고 싶나?”
욕설과 구타는 참을 수 있었다. 그건 오히려 날 편안하게 했다. 그렇게라도 죄를 씻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건, 그럴 때마다 한 번씩 고개를 드는... 나의 또 다른 이름...
이 구역 미친년의 각성이었다.
“까고 있네... 등신들... 몸이나 파는 싸구려 창녀 주제에...”
“어머머! 뭐라하노? 이 서울 년 빙시 같은 게 지금 뭐라 카냐고?”
“구역질나는 창녀들... 다시 말해줄까? 지 애비한테도 아랫도리 팔아먹고 다닐 개만도 못한 갈보 년들아!”
머리가 뜯기고, 옷이 찢어졌다. 같은 가게의 웨이터 오빠 하나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면, 어쩜 나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세 명의 언니들이 달려들어 내 몸과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아 댔다. 그래도 미친년은 발악했고,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웨이터 오빠의 손에 이끌려 가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갈 곳은 있나?”
“......”
“니 진짜 답 없데이? 무슨 깡으로 그 누나들한테 그래 뎀비나? 니 진짜로 죽고 싶나?”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웨이터 오빠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니 여기 쫌만 있어라, 금방 내려가따 오꾸마... 옷 다 찢어져서 어데 못 간다. 가만 있어라”
그는 만신창이가 된 대기실을 치우는 것도 귀찮을 텐데, 누군가 두고 간 홀 복(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입는 옷) 하나를 구해와 건넨 후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까지 벗어 걸쳐주며 물었다.
“니 진짜 갈 데 없나?”
8. 어디에도 사랑은 있다.
“냄새가 좀 나제? 우짤수 없다. 내가 첨에 방 구할 때부터 났다 아이가! 진짜다! 그리고 이거!”
오갈 데 없던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의 자취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새벽녘 늦게가 돼서야 돌아와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게 허름한 종이가방 몇 개를 내밀었다.
“여자 옷은 사이즈를 몰라서 대충 짐작으로 몇 개 골랐다. 비싼 거 아이다. 가게에 물어보니까는... 너 짐도 따로 읍다매? 상무님이 너 일한 거는 월말에나 해서 준다니까 그래 알고...”
가방엔 옷가지가 몇 개 들어 있었다. 나는 가슴이 파인 홀복을 벗고, 그가 내민 옷들로 갈아입었다. 예전 같으면 무리 없을 옷들이지만, 그 새 홀짝 살이 빠져 옷들이 다 컸다.
그렇게도 목 놓아 노래 부르던 다이어트였는데...
“흠흠... 옷 다 갈아입었나? 훨씬 낫네? 배고프지? 내가 밥 차맀따. 쪼매 떠라”
그는 괜한 헛기침을 한 후 조그만 간이 탁자에 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찬 이래 봐야, 김치 하나, 조미김 한 봉, 그리고 멸치볶음이 다였다. 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밥 먹고 가, 밥은 먹었어? 한 숟갈이라도 뜨고 가! 배고프지 우리 딸?] 엄마가 나만 보면 했던 말들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울컥임에 그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그는 [아... 왜 우는데? 뭐 이까짓 거 가지고 감동받았나? 울지 마라 사는 게 다 힘들다]하며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같은 가게에서 웨이터 일을 하면서 종종 나를 눈여겨봤다고 했다.
“니도 고아제? 딱 보면 안다 아이가... 내도 고아다. 내는 엄마 아빠가 누군지도 모린다. 보육원 엄마가 나 키왔는데, 보육원 엄마 암으로 죽고, 새로 온 원장 새끼가 지랄한다 아이가! 그래서 치받고 나와 부렀다. 승질 드럽제? 히히”
“내도 이런 일 하기 싫은데, 군대 같다와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있어도 돈도 없고, 우짜겠노?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남포동서 1년, 송정에서 1년, 그러다가 서면까지 왔제... 뭐 근데 당장은 불만 없다. 상무님도 좋고, 누나들도 까칠하긴 해도 나쁘지 않고... 쪼매 벌다가 돈 좀 모으믄 서면에다 내 가게 하나 차리는 기 꿈이다.”
“큰 거 말고... 쪼매난 라면집, 내가 다른 기술은 읍써도, 보육원 시절부터 라면 하나는 기똥차게 끓였다 아이가? 이만한 솥에다 20개도 끓이 봤다. 못 먹어봤지 내 라면? 겁나 맛있다. 니 먹으면 놀랠걸?”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줄줄이 꺼내 놨다. 알고 있었다. 그게 그의 배려라는 걸, 그는 어색해 할 나를 위해 대답도 없는 내게 계속 말을 걸어줬다.
내가 잠들 때 까지...
눈을 떴을 때, 그는 방에 없었다. [갈 데 음쓰면 며칠 더 있아라, 방에 훔챠갈 것도 음꼬] 라고 씌여진 종이만 머리맡에 있었다. 고마웠다. 엄마 외의 누군가에게 이런 따스한 정을 느꼈던 게 언제였는지...
그 후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방에서 머물게 됐다. 그는 싫은 내색 한 번 안 했고, 나는 나 대로 갈 곳이 없었다. 막연하게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도 그게 어딘 줄 몰랐고, 어느샌가 여기가 편해졌다.
미안한 마음에 처음 시작한 건, 청소와 빨래였다. 따듯한 물도 없고, 세탁기도 없었지만 난 그게 더 편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손이 떨어져 나가라 비비다 보면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민주, 아빠, 그리고 엄마... 죄스러운 마음과 보고 싶은 마음을 섞어 빨래비누로 비벼 빨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몇 번을 헹구고 언 손을 호호 불며 짜내고, 널어 놓다보면, 시간이 저 만치로 흘러 갔다. 난 그 시간만큼 내 마음의 고통도 옅어지길 바랐다.
“드라이브 한 번 시키 주까?”
처음으로 그의 방 밖에 나간 것은 근 2주 정도 뒤의 일이었다. 그는 새벽녘 가게 차를 몰래 끌고 나와 집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새벽공기가 쌀쌀했지만, 그의 손은 따듯했다. 그는 나를 12인승 봉고차 옆자리에 태우고, 송정과 서면 일대를 돌았다. 창밖에는 서울처럼 높은 건물과 불빛들이 스쳐 지났고, 한 강보다 더 큰 바다가 보였다. 그가 말했다.
“니 무서운 얘기 좋아하나? 내가 지금 하나 해 주까? 들으면 그냥 지린다 아이가!”
“얼래? 대답이 없네? 그럼 한다? 겁나 무서운 얘기!”
그는 얼굴 가득 한 껏 인상을 쓴 채 말했다.
“나 사실 무면허다!”
“무섭제? 겁나 무섭제? 근데 진짜다! 크크크 그래도 겁먹지 마라! 면허는 없는데, 17살 때부터 운전 배워가 이 차로 송정에서 누나들 엄청 실어 날랐다. 내가 바빠서 면허만 안 딴기다. 절대 필기시험이 어려워가 못 딴 게 아이다. 알았나?”
“풋...”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건 아마도 나를 웃겨주려는 그의 익살스러운 표정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웃었네? 웃었어! 히히히 왠일이가? 니 웃는 거 처음 본다.”
“푸하하핫... 하하하하하”
“와! 잘 웃네! 히히 내 말이 그리 웃겼나? 하하하! 기분 좋네!”
한 참을 웃었다. 그냥 웃고 싶었다. 여지 것 긴 시간동안 웃을 일이 없었던 나였기에, 그 웃음은 멈출 줄 모르고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그 끝엔 또 눈물이 났다.
“누고? 보고싶은 사람이 누고? 엄마? 아빠? 말해라! 괜찮다!”
“어... 엄마...”
“그래 내 다 안다. 보육원에서 많이 봤다 아이가! 나처럼 애초에 아빠 엄마 얼굴도 모르면은 괜찮은데, 늦게 정 뗀 애들은 그래 운다. 많이 봤다. 내가 전에 얘기 했나? 정희라꼬... 나 보육원 시절에 같이 지내던 동생있다. 가가 그래 울었다. 7살 땐가, 8살 땐가 보육원 처음 왔는데, 그래 찔찔 울고 다녔다. 그래서 맨날 놀림 받고 그랬는데... 참...”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물었다.
“그랬는... 데요?”
“아... 그기... 나 군대 간 사이에 병 걸 리가... 콱 죽어 삣다. 혈액 암인가? 돈이 억수로 있어야 된다드라... 망할 년이... 씨팔! 나 군대 갈 때까지 숨기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카고... 그라고 콱 뒤지 삣다. 씨발년! 누가 지 걱정한다꼬... 씨팔...”
어느새 그의 눈신울도 젖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기어봉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따듯했다.]
떨림이 전해왔다. 나는 민주와 아빠를... 그는 사랑하던 사람을... 어떤 면에서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이기심으로, 그는 또 다른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 왜 제대로 말 한 번 건네 본 적 없는 그가 편하게 느껴졌는지, 왜 그가 나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윽고 차가 멈춘 곳은 송정의 바닷가 한쪽 어귀였다. 그가 나를 바라봤다. 촉촉이 젖은 눈길... 몰랐는데, 거울 속 나와 닮아 있었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니가... 정희랑 많이 닮았다. 그래도 그 때문만은 아닌기라... 널 첨 볼 때부터 안아주고 싶었다. 거서 일하는 다른 누부(누나)야들이랑 다르게, 니는 암말 안하는데, 울음소리가 들리는 기라... 내사마 막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우짜겠노? 맘이 쓰이는 걸... 무슨 말인지 아나? 내가... 니를... 니를... 그러니까 니를... 씨팔 모리겠다!”
그 날이 그와의 첫 입맞춤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했고, 조용한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히... 고요히... 그렇게 그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는 날 많이 아껴줬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엔 정희가 있고, 그녀를 지우려 노력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직은... 지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9. 그와 나의 행복한 시간
그는 늦은 저녁에 집을 나섰고, 난 집에 홀로 남아 새벽까지 그를 기다렸다. 그의 벌이는 들쭉날쭉했지만, 우리 두 사람이 생활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난 그 사람 외에 다른 것을 욕심내지 않았고, 그도 그랬다.
다만 약간의 조바심은 있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일을 그만두고, 평소 그가 입버릇처럼 말 하던 작은 가게를 내고 싶어 했다. 그러면 나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가게만 차리면 주변 업소의 형, 동생, 누나들이 와서 팔아 줄 거라 금방 부자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불철주야 노력했다. 낮에도 작은 업체를 소개 받아 일하고, 밤에는 전처럼 업소 웨이터 생활을 계속했다.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쉬웠지만, 더 오래... 더 많이 함께 하기 위한 거라고 그는 날 설득했다.
나에게도 약간의 조바심은 있었다. 잠깐의 달콤한 행복 탓에 잊었지만, 나에겐... 절대 잊을 수 없는 악몽이 아직 남아있었다.
[미.친.년]
이 구역의 미친년, 그 저주받은 악몽은 아직도 내 안에 존재했다. 넓은 세상이 아닌 그의 작은 방 안에 나를 가두자, 미친년은 다시 참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제 존재를 드러냈다. 미친년은 피를 원했다. 또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기를 원했다. 그와 나의 사랑이 충만하던 어느 날, 미친년은 그렇게 또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실로 참기 힘든 인격적 모독의 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키워온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그를 강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의 심드렁한 표정엔 미친년도 힘을 쓰지 못했다. 그저 악다구니만을 질러댈 뿐이었다. 그는 그럴수록 나를 더 감싸 안았다.
“괜찮다! 나한테 그래도 된다. 내 빼고 누가 니 편을 들어 주겠노? 욕해라! 때리라! 그래해서 니 기분만 풀린다믄 몇 번이고 못 맞아 주겠나? 욕해도 된다! 내 어렸을 때부터 욕은 귀에 달고 살았다. 고아 새끼? 그런 거는 욕도 아이다. 부모 얼굴도 모르는 놈이 부모 욕한다고 기분이 상하 긋나? 나 버린 사람... 뭐 좋다고... 괜찮다.”
그의 이해심이 미친년의 악에 바친 분노를 감싸 안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늘... 그의 품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힘들제? 괜찮다. 다 괜찮다. 니는 그냥 아픈기라... 병원 안 가봤나? 죽을 병 걸린 사람들은 투병이 너무 고통스러워가...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물기도 한다... 보육원 원장 엄마도 그랬다. 암 말기라 항암치료 받다가 느무 힘들다꼬, 엉엉 울면서 욕도 하드라... 원장 엄마 수녀였는데도... 웃기제? 그란데 니가 무슨 재주 있겠노? 괜찮다. 괜찮다. 니 옆에 내 있다 아이가!”
그래도 미친년은 포기하진 않았다. 어느 날은 잠든 사이 깨어나 거울을 깨뜨렸고, 또 어떤 날은 옷장의 옷들을 신경질적으로 찢어 놨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더 이상 누군가를 공격할 수 없게 된 미친년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된 어린아이의 심통에 불과했다.
그리고 한 달... 또 한 달...
결국 더 이상 미친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더 이상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기뻤다. 그리고 그것은... 그 즈음 알게 된 기쁜 소식과 더불어 나를 흥분시켰다.
“임신입니다.”
그는 나만큼이나 기뻐했다. 병원이 떠나갈 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가진 거라곤 조그만 단칸 방 하나뿐인 주제에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해줬다. 그리곤 말했다.
“결혼하자... 내 이제 돈 거의 다 모았다 아이가? 모자란 건 아는 행님들한테 쪼매만 빌리믄 된다. 그걸로 그릇도 사고, 인테리어도 좀 하고... 그라믄 된다. 모리겠나? 내 지금 니 한테 청혼하는 기다. 쪼매만한 가게지만, 이제 곧 나도 사장이다. 니는 사장님 사모님 되는 기고... 누구 맹키로 거창한 다이아 반지는 없어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 응? 설희야... 내랑 살자... 응?”
“바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 그와의 결혼, 아이,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악몽...
그리고 그 작은 행복 한 켠에... 아주 작은 그리움 하나가 묻어났다.
[엄마]
그는 나를 고아로 알고 있었다. 사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다. 엄마는 모르지만, 난 아빠를 죽인 못된 딸... 그리고 엄마를 버리고 도망친 죄인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는 잘 계실까? 그리고... 아직도 날... 그리워할까?]
엄마가 보고 싶지만, 선뜻 엄마를 만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아빠를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은 더!
그런 내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역시나 그였다. 그는 내 얼굴에서 고민의 흔적을 금방 읽어냈다. 그리곤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그것을 알아내고자 무던히도 애썼다.
홀로 계신 엄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지은 표정은 놀라움 보다는 미안함이었다.
“고등학교도 못 나와가... 싫어하시믄 우짜지? 니도 중퇸 건 상관읍따! 부모 맴은 안그런기다. 그래도 모... 내도 인제 가게 오픈할끼고... 사장아이가? 히히 그라믄 장모님도 쪼매는 이해 안하까? 응? 하기사 뭐... 이젠 알라도 있겠다. 뭐가 걱정이고... 안되도 모 할 수 읍제... 그냥 살아야지 히히히히!”
그의 넉살 좋은 미소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고아든, 고등학교 중퇴든, 재산이 없든, 뭐면 어떨까?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문득 바라보니 그의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불철주야 적금의 마지막 불입금을 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었다. 최근엔 일이 끝난 후 대리운전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짐했다. 그를 도와 열심히 살겠노라고, 더 이상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지 않고, 뭐라도 해서 그를 짐을 나누어지겠노라고... 그래서 그 일이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뛰어내리는 일이 될 지라 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그와 나의 뱃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일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가 일하던 업소의 형님이란 사람이 소개해 준 주방 일이었다. 음식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설거지와 과일 깎는 일 정도는 금방 배워서 할 수 있었다. 그는 만류했지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나의 완강한 의지에 임신 6개월 까지만 하고 그만둔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엽산제와 철분제를 잊지 않고 복용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생각만큼 일이 고되지도 않았고,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외려 더 신나고 즐거웠다. 그 덕에 난 웃는 날이 더 많아졌고, 예전에 싸웠던 유흥업소 식구들과도 다시 친해졌다. 그의 아는 형님이란 사람도 술버릇이 안 좋긴 했지만,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나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아이는 뱃속에서 무럭무럭 잘 커갔고, 그 흔한 입덧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었지만, 우리가 기다리던 정기 적금의 만기일자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며칠 전부턴 가게자리도 알아보고 다녔다. 집기와 그릇, 그리고 간판 업자 만난 이야기를 웬 종일 늘어놓았다. 그의 입 버릇 대로라면 그건 [그의 꿈을 채우는 마지막 단추]였다.
“내 꿈이 뭔지 아나? 라면가게? 에에이~ 그건 꿈을 향해 가는 수단이고, 진짜는 나도... 내 가족을 갖는기라... 여우같은 마누라하고... 토끼 같은 자식새끼하고... 내는 아침에 출근하꾸마 하고 나가고, 니랑 알라랑 뛰어나와가 아빠 다녀오세요. 사랑해요. 하는 기다. 또 내가 퇴근하면 우짜는지 아나? 쪼그만 기 튀 나와가 아빠 다녀오셨어요. 이라는기다! 진짜 멋지지 않나? 니는 그 옆에서 된장찌개캉 김치찌개캉 끓이 놓고, 왜 이제 왔냐고, 늦었다고 바가지를 긁는 기다. 을매나 좋노... 누군가 옆에서 잔소리 해 줄 사람 있는기... 내는 그기 꿈이다. 무슨 말인지 아나? 니가 내 꿈이란 말이다. 내 전부... 나으 모든 것.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도 되고 싶다 카고, 사장도 되고 싶다 카고, 로또도 맞게 해 달라데? 다 부질 읍따. 진짜 내 꺼는... 안 없어지는 기 진짜 내 껀 기라. 내일 당장 내가 아파도 내 옆에 있고, 떠나라고 욕을 해도 안 떠나는 기... 그기 진짠 기라...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다. 내... 무... 무슨 말인지... 아... 알제?”
그가 눈물을 흘렸다. 나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그와 내가 꾸는 꿈, 그 모든 것이 눈앞에 와 있었다.
10. 예정된 파멸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업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많지 않았고, 일거리도 별로 없었다. 텅 빈 홀에는 그의 아는 형님과 새로 들어온 웨이터 하나가 죽치고 앉아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대로 꽁으로 돈을 받는 게 미안해 주방 아주머니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집기들을 꺼내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기분도 무척 좋았다. 만기된 적금을 찾아 가게를 계약했다는 그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오늘 밤 축하 파티를 열자고 했다. 아는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둘 테니 일찍 퇴근하라고 했다. 요즘 장사가 잘 안되 아는 형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나중에 하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사실은 좋았다. 가게에 손님이 안 든 건 이미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냥 하루 조금 일찍 가는 것 뿐이었고, 주방 아주머니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너무 좋은 날...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전에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놀랄 만큼 머리가 아팠다.
뭔가 미묘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건 처음이지만, 이런 기분은 전에도 겪은 기억이 났다. 이게 무엇인지 입 안에 뱅뱅 도는 단어가 있는데, 머리가 아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
“씨발 갈보년... 이거... 스무 살도 안됐다매? 썅년... 허리 돌리는 기 장난이 아이네... 흐으!”
“이라니 원재 형이 죽고 못 사는 거 아닙니까? 술집 년들이라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새끼가 우째 싸고도나 했드만... 꿀단지를 감춰놨네... 씨발 새끼! 그나저나 우리 이래도 됩니까? 그 새끼 올 때 안 됐슴까?”
“이런 병신새끼를 봤나! 구더기 무서워가 장 못 담그나? 씨발 새끼야!”
“아 씨발... 그래도... 그 새끼 성깔에 보믄 길길이 날 뛸 낀데?”
“그럼 끄지든가? 개새끼야! 좋다고 따라와놓고 뭔 지랄이고? 어차피!!! 이 년이 먼저 꼬리쳤다 아이가! 옷 홀딱 벗고, 궁뎅이 살랑사랑 흔들믄서... 한 빠구리 뛰자꼬!”
“글킨 하지만... 그래도 쪼매... 처녀도 아닐낀데... 피도 나고...”
정신이 들었을 때의 나는 집에 와 있었다. 옷이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에게 윤간당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고, 발로 사내의 가슴팍을 걷어차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돌아 온 것은 술 취한 사내의 가혹한 폭력, 모진 발길질과 따귀가 나의 얼굴을 때렸다.
“이런 미친년! 한 빠꾸리 뛰자고 꼬리 칠 땐 언제고, 이제와 지랄이고! 지랄이! 니 씨발, 원재 그 새끼랑 짰나? 오호라... 원재 그 새끼... 라면집인지 뭔지 해야 되는데 돈 필요하다 카드만... 그 때문에 벌맀나 씨발년아!”
“아... 그러게 감이 안 좋드니만... 이거 꼬인거 아녜요?”
“조까라 씨발! 이 년이 꼬리친 거 주방 아줌마도 봤다! 홀에서 빨가벗고 엥기는데 당할 사내가 우데 있노? 걱정마라! 내가 아까 이럴까봐 동영상으로 다 찍어 놨다. 볼래?”
남자가 무언가를 누르자 삑하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태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누가 들어도 남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곤 말했다.
“원재 그 새끼는 고잔가봐, 나 몸이 뜨거워져서 미치겠어! 오빠들 나 좀 어떻게 해줘! 응? 우리 집으로 가자! 거기서 남자 둘이랑 하고 싶어 가자 나 미치겠단 말이야!”
나였다.
그리고... 또한
[미친년이었다.]
이어진 동영상에선 나와 함께 따라온 신참 웨이터와의 섹스장면이 적나라하게 녹화되어 있었다. 그걸 촬영해 달라고 먼저 부탁하는 내 목소리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눈을 감고 우는 내 귓가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씨.빨.새.끼,들...”
그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커다란 케잌 하나가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아기 젖병과 딸랑이 같은 것도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작고 조그만 아기 옷도 보였다. 며칠 전 길을 걷다 너무 예뻐서 한참동안 걸음을 멈춘 채 보던 것들이었다. 너무 비싸서 나중에 사자고 했던 것들이었다.
“워... 워.. 원재야! 그기 아이고! 그러니까!”
“조까 이 개새끼들아!”
그의 주먹이 아는 형님이란 작자의 얼굴에 메다 꽂혔다. 불 같이 격노한 그의 주먹이 쓰러진 아는 형님의 얼굴위로 연신 쏟아졌다.
“죽어! 죽어! 이 개새끼야! 임산부란 말이다 이 개 같은 씨발 놈들아!”
그 와중에 떨어진 휴대폰에선 연신 동영상이 재생됐다. 큰 소리로 나의 교태스러운 신음소리가 울려퍼졌고, 그는 한층 더 분노해 미친 듯이 주먹을 쏟아 부었다.
“원재 형 그만하소! 성님 죽겄소!”
“너도 똑같은 새낀기라!”
이대로 두면 죽겠다 싶었는지 신참 웨이터가 말리려 달려들었지만, 그의 분노는 멈출 줄 몰랐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포효했다. 그렇게 웨이터와 그가 엉켜 있을 때, 피떡이 된 얼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가 앗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한 쪽으로 쓰러졌다.
“피.... 피!!!”
놀란 나의 비명에도 아는 형님이란 작자가 살짝 고개를 돌려 화난 표정으로 웨이터에게 말했다.
“잡아 이 새끼! 조또 오냐오냐 해주니까 씨발!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보나!”
“아! 형님! 원재 형 옆구리에 카... 칼이 박혔는데...”
“이 정도로 사람 안 죽는다! 잡으라 안 카나! 새끼야!”
웨이터가 그를 잡아 일으켜 세우자 그는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일그러진 얼굴 위로 휴대폰이 내밀어졌다.
“씨발... 보이나? 니 눈까리는 호구가? 씨바 안 보이냐고! 저 년이 꼬리치는 거! 한 빠구리 뛰자고, 홀딱 벗고 염병하는 꼴 안 보이냐고! 이 새끼야!!”
“보지마!!... 제발... 보지마!!!”
“저 년이 미칬나! 아까는 그래 난리두만... 갑자기 존내 깨끗한 척 하고 지랄이네 지랄이!”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찡그린 얼굴이, 떨리는 눈동자가 휴대폰 속 내 얼굴과 벌거벗은 몸뚱이를 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보이주까? 씨발! 갈보년이 우데 가나? 순진한 척 니 등꼴 다 빼먹고, 토낄 생각이라고 말하는 거 여기 안 들리나? 봐라! 저거 씨발 개 조까튼 년이다! 나도 기본 의리는 있는 새끼야! 근데! 저년 말하는 꼬라지를 보고도 니는 아직 미련을 못 버리나? 토막 쳐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년인데! 그거 쫌 건드린게 니는 그리 열이 받나 앙? 이 쌔끼야! 원재야! 원재야!! 정신 차리라! 정신! 니 이용 당한기다! 저 년한테!”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개소리마...”
“휴대폰 여기 두고 갈 테니까! 잘 감상하고, 갖고 와라잉? 앙! 씨발 새끼! 올 때는 내 얼굴 이래 만든 값도 가지 와야 될 끼다! 알았나? 씨빨새끼!”
아는 형님이란 작자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꽂혔다. 그는 그렇게 자리에 주저 앉았다. 옆구리에선 연신 피가 흘렀고, 두 사람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괘... 괜찮아?”
나는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바닥은 이미 그의 피로 흥건했고, 그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가 아닌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손 대지 마라!”
싸늘히 식은 그의 목소리...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선 아직도 나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윤간당한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교태스러운 말투와 흥분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는 형님이란 작자가 말한 대목도 들려왔다. [원재, 그 고자 같은 새끼, 모아둔 돈 많다고 해서 붙어 있는 거라고, 그거만 한 탕하면 이 바닥 뜰 거라고, 임신했다고 구라치니 철썩 같이 믿는 호구새끼라고...]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소리쳤다. 그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사정하며 빌고 싶었다. 그건 정말 내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었던... 그 미친년이 돌아 온 것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꺼지라 씨발년... 이제 다신 나 찾지 마라... 니는 지금 사람을 죽인기다. 내는 이제! 살아도 사는기 아이고! 죽어도 죽는기 아이다! 나 장원재... 니 만나서 겁나 행복했다. 내 기분은... 니를 때리 죽이도 안 풀릴 낀데... 흑... 흑... 근데... 흑흑... 내 아무리 생각해도 니를 때릴 자신이 읍따... 어쩌겠노! 씨팔! 가라! 이제 내는 죽고 읍는기다! 다신 나 찾지마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뽑은 칼이 들려 있었다.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문을 걷어차고 뛰어 나갔다.
말려야 했다.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말려야 했다.
헌데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아까부터 꿀렁거리던 뱃속이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찢어지는 듯 한 고통과 함께 허벅지 사이로 연신 피가 흘러 내렸다. 다리가 풀리고, 그를 향한 애원의 목소리가 목구멍을 넘지 못한 채 삭혀졌다.
그리고 문 밖에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11. 안녕... 사랑했던 사람들...안녕
“성함이 뭐데요?”
“채... 채 설희... 그 사람은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네 아저씨!”
나는 앰뷸런스를 타고 온 119 구급대원에게 울며 사정했다.
“누구? 아! 칼에 찔린 사람요? 그 미친놈 뭐 어떻게 난도질을 했길래 사람을 고깃덩이로 만든답니까? 뒤짔어요. 나이 드신 분, 말리던 젊은 애도 중태고... 찌른 새끼는 경찰이 지금 잡아갔고...”
“주... 죽은 사람이... 누... 누구...”
“민증 보니까 박광철씨든데... 가족이예요? 아이고... 뒤짔다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래 난도질 당한 건 나도 오랜만이라... 그기...”
나는 곧 멀지 않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아이는 유산됐고, 그는 특수살인혐의로 구치소에 들었다. 죽은 이는 처음 그에게 칼질을 한 아는 형님이었고, 함께 했던 신참 웨이터는 중태라고 했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그가 수감된 구치소에 찾아가 봤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외면뿐이었다. 경찰은 면회를 거부중이라며, 그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몇 번을 더 찾아갔을까? 결국 힘들게 만난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시는 오지마라... 내 그 말 할라꼬 나왔다. 니는 이제 내 한테 죽은 사람이고, 니가 알 던 나도... 그 날 죽었다. 이제 니랑 나랑은 다시는 볼 일 읍따. 알았나?”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쓰러져 오열할 뿐이었다.
그렇게 일어서 다시 돌아가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자... 그 아는... 그 아는 진짜 내 아였나?”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됐다 마! 치아라... 대답하지마라... 그기 더 비참하다 아이가? 잘 가라... 몸 조리 잘하고...”
그런 그의 뒷모습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진실, 설혹 그것이 진실이라도, 그것이 그에게 상처가 된다면 나는 할 수 없었다. 최소한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나는 터벅터벅 병원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수근 거렸다. 알고 있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사람을 잃고, 그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아이마저 잃은 내가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어딜 가는 거야! 미쳤어?]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니가 나를 가둬버렸으니까! 날 미치게 만든 건 너야!]
창문 너머로 저녁노을이 어슴프레 지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오빠... 사랑했어”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민주, 아빠... 그리고 나의 사랑 원재 오빠...
나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졌다. 모두 죽었다. 원재 오빠도 말했다. 살아도 이제 사는 게 아니라고...
나는 그의 꿈마저 무참히 짓밟았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만한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남자가 나로 인해 파멸했다.
나는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하늘이 붉었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문득 오전에 들렀던 경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민등록증 보고, 가족 분 찾아서 연락 드렸어요. 전향자씨가 엄마 맞죠? 웬만하면 내가 연락을 안 드리는데, 미성년자라... 보호자한테 연락을... 어머니 분이 오고 계시다니까. 진정 좀 하시고...]
“엄마...”
[엄마 얼굴도 안 보고 죽을 셈이야!]
“미안해”
[그만 둬! 그만 두라고!!!]
걸음이 멈췄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한쪽 다리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 미친년의 짓이었다. 그 애가 나를 붙잡았다.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날 뛰더니 그 미친년이 이젠 나를 막아섰다.
[난 싫어! 내가 왜 죽어! 죽으려면 너나 죽어! 난 살 거야! 이 재밌는 세상을 왜 죽어! 얼마나 좋아? 하고 싶은 말 하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너도 좋았잖아? 내가 새 친구를 만들어 줄게, 새 남자도, 잔소리나 하는 것들은 집어 치워! 난 널 알아! 너도 그러고 싶었잖아!]
“넌 날 몰라...”
[정신 차려! 니가 죽는다고 원재 그 새끼가 널 동정이라도 할 것 같애? 다 끝났어! 다 끝났다구!]
“그래... 이제 정말 다 끝날 거야 완전히...”
[안돼 이 미친년!]
“처음엔 니가 미쳤고, 이젠 내가 미쳤어! 너 때문에...”
나는 미친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난간에 섰다. 병원의 옥상, 7층... 바닥끝이 아득하게 보였다. 민주도, 아빠도 이렇게 서서 저 아래를 바라봤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적어도 나와는 다를 거다.
난 웃었다. 끝을 앞에 두니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속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작은 점으로, 또 붉게 피어나는 것으로 나의 죄가 모두 씻겨나가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니가 나를 만들었잖아! 니가 만든 거야!]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끝을 낼게”
난간 밖에 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이제 잡은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살 용기도 없는 년이 죽겠다고? 죽어! 넌 죽어! 하지만 난 살아야 겠어!]
“같이 가자... 우린 공범이니까”
미친년의 절규가 이어졌다. 귀가 아플 정도였다. 나는 등 뒤로 난간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아찔한 높이다. 아프겠지? 하지만 [그가 느낀 고통에 비할까?] [민주가 아파한 것에 비할까?] [죄 없이 돌아가신 아빠의 허무함에 비할까?] 그런 생각에 작은 두려움마저 사라졌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고 발을 굴렀다.
아득한 건물 저 아래 어딘가로...
“헉!!!”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뛰었는데도 나의 몸이 난간에 걸려있다. 바라보니 한쪽 팔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난간 아래쪽의 안전봉을 잡고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 니가 가진 걸 다 부숴 버릴 거야!!!]
[난! 죽고 싶지 않아!]
“끝났어...”
디딜 곳 없는 두 다리가 시렸다. 허공에 매달린 나는 난간을 잡은 손을 바라본다. 저건 미친년이 가진 생에 대한 마지막 의지... 타인의 죽음엔 무던하던 네가 왜 자신의 삶엔 초연하지 못 한 걸까? 어째서지? 정말 내가 그렇게 만든 거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잘 못 끼워진 단추는 결국 모두 풀어내야 한다.
이미 구멍에 끼워 넣은 단추가 아깝다고 놔두면 모든 것이 뒤틀린다.
삶도 가족도 사랑도 친구와의 관계도...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난간을 잡은 손이 애처롭다. 미친년은 떨고 있었다. 그 애도 겁에 질린 거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힘들지만 하나씩 풀자... 그러면...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마! 하지마!!]
절규가 들려왔다. 나는 난간을 잡고 있는 손가락 하나를 풀어냈다.
[으아아악!! 하지마! 하지마! 살고 싶어! 살고 싶다고!!]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엄마는 내 머리맡에 앉아 자장가를 불러줬다. 엄마는 노래도 못하고 목소리도 좋지 않았지만 난 왠지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금세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잘자라... 우리 아가... 앞 뜰과 뒷 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남은 네 개의 손가락은 이미 심각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미친년의 살고자 하는 의지로 끝끝내 난간을 부여잡고 있긴 했지만, 애시당초 내가 가진 힘으론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다들... 자아 는데... 흑...흑”
눈물이 쏟아졌다.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그렇게 노래를 불러주마 하고 다짐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눈물 한 방울이 먼저 바닥을 향해 추락한다. 몸이 휘청 였다. 남은 손가락중 하나가 무게를 버티지 못 하고 툭하고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7층 옥상의 바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강한 입김으로 나를 흔든다.
“잘 자라... 우리... 흑흑.. 아가... 아가... 흑흑”
[안돼! 안돼!!! 안돼에에에!!!]
“안녕...”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추락...
작은 점으로 화하여 새로이 붉게 피어나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찰나의 순간이 아주 길게만 느껴졌다.
타타탁! 하는 소리와 함께 [쿵]하는 소리가 나의 의식을 빼앗는다.
“미안해... 미안해...”
12. the end
천장의 하얀 닥트들이 보였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 속 풍경이 바뀐다. 침대 뒤쪽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 끝 하나, 시선 한 점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시선의 중앙에 위치했다. 며칠 새 낯이 익었지만 정감이 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투신 자살자 치고는 그래도 상태가 많이 좋은 편입니다. 추락 시에 한쪽 팔로 벽의 창문틀을 붙잡아서 속도를 줄인게 천만 다행이었죠. 떨어진 위치에 나무가 있어 충격을 많이 흡수해줬던 것도 도움이 됐고, 아무튼 이제 사고 당시 부러진 팔이나 다리는 거의 완쾌 되었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우리애 언제쯤이나 되야 말도 하고 움질일 수 있을까요?”
“남은 건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환자 분의 의지입니다. 이렇게 계속 마음을 닫고, 숨어있기만 해서는 나아질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또 다른 환자를 회진하기 위해 시선에서 사라졌다. 그때 시선 밖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렸다. 그게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잠시 후 차가운 물수건이 나타나 내 얼굴을 닦는다. 구석구석 남기지 않고 움직이는 그 손길이 정겹다. 욕창(오래 누워있는 환자에게 나타나는 피부질환)이 나지 않게 등 뒤를 닦아 줄 때는 힘겨워 하는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마음 같아선 몸을 일으켜 도와주고 싶지만, 마음뿐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상대는 바보다. 아무 반응 없는 몹쓸 이를 위해 모든 정성을 다 한다.
바보는 씹을 수도 없는 나를 위해 미음을 한 사발 다 떠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그리곤 내 침대 머리맡에 기대 엎드려 잠을 청한다.
[엄마... 이 바보!]
매일 같이 눈물로 밤을 지새운 걸 알기에, 한 낮의 때늦은 잠이 이상하지 않다. 쌔근쌔근 잠이 든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축 쳐진 숨소리로 엄마의 육신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알 수 있다.
한번만... 단 한번만 일어나 엄마를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엄마의 편안한 단잠을 위해 엄마가 내게 그러했듯, 정감어린 자장가를 불러 줄 수만 있다면...
그런 상상을 잠시 해 본다.
하지만 이제 내겐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리고 또한 그래서는 안 되는 꿈이다.
[엄마...]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 감각도 없던 내 손가락 끝이 찡한 것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수십마리의 개미가 한꺼번에 팔 위를 기는 듯 한 묘한 감각이었다. 볼 순 없지만 손가락이 꺼떡거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했다. 나의 정체된 시선 위로 손가락과 손등, 팔이 보였다. 내 기분이 맞다면, 내가 스스로 내 팔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신이 있어 나의 소망을 들어 주셨을까? 단 한번 만이라도 엄마의 머리카락을 보듬고, 엄마를 위한 자장가를 불러보고 싶다는 내 바람을?
나는 천천히 팔을 뻗었다. 무언가 만져졌다. 머리카락, 잠든 엄마의 머리카락이었다. 길고 긴 시간을 지나 드디어 손에 닿은 엄마의 체취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보... 보고 싶어... 어... 엄마를...]
힘을 줬다. 그러자 아무리 애를 써도 꼼짝 않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고정됐던 시선이 손끝을 따라 달린다. 그리운 얼굴을 만나기 위해 뛰었다.
[엄마... 엄마!!]
미칠 듯 한 그리움의 감정이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사무친 감정의 응어리가 북받쳐 올랐다. 부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이름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 노래가 들려왔다.
나직한 음성...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
“잘자라... 우...우리 아가... 앞 뜰과 뒷 동산에...”
어... 어떻게 이 노래가 들리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목은 아직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아 급히 시선을 돌려봤다. 내 침대의 반대쪽에 큰 거울이 하나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선이 멈춘 거울 속에선...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나도 이 노래를 불러 준 적이 있다는 걸...
“새... 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아 는... 데...”
갑작스레 반대쪽 팔이 움직였다. 팔은 천천히 엄마를 향해 갔다. 손에는 어느새 팔에서 뽑아낸 링거 줄이 들려 있었다. 손은 반대쪽 손과 어울려 길다란 줄을 둥글게 꼬아 말아 든다.
[서... 설마!!!]
“잘자라아... 우...우리... 아아가....”
목소리가 떨려왔다. 거기엔 정감도 그리움도 없었다. 그저 공포와 광기만이 흘렀다. 둥글게 말린 링거 줄이 천천히 잠든 엄마의 목에 감겼다. 그리곤 슥... 하며 천천히 엄마의 목 주변을 옭아맸다.
“으음... 설희니?”
목에 닿는 생경한 느낌 탓인지 살짝 깨어난 엄마...
그 순간... 내가... 아니 내 안의 미친년이 말했다.
“까꿍!”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엄마 도망쳐!!!!”
13. epilogue...
“몸이 맘대로 안 되지? 내가 주웠어... 니가 버린 몸... 그거 내가 주웠어...”
[제발... 제발...]
“계속 기다렸어...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거든? 어때 만족해?”
[제발! 그만해! 엄마가 무슨 죄야! 엄마는 잘 못 없어! 빨리 그 줄 풀어!]
“나는!! 나는 무슨 죄로 죽이려고 했지? 니가 했어! 너이면서 동시에 나였던 널 니가 던졌어! 나도 무서웠어! 나도 살아 있거든! 나도 여기 있단 말이야!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난 여기 있다고! 그런 날! 니가 죽이려고 했어”
[미안해! 이렇게 빌게... 제발... 제발 엄마만은...]
“자 봐... 아버지 임종을 놓친 게 후회되지 않아? 엄마의 임종은 지켜야지! 어서!”
[안돼!!!!!!!!]
거울 속의 일그러진 내가 웃는다.
미친년이 웃는다.
그리고 당신 안의 또 다른 당신이 웃는다.
: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끝.
글쓴이의 말...
꽤 긴데다 감정과잉으로 가득찬 유치찬란한 글을 보여드려 드려 먼저 사과드립니다.
이 글은 작중 화자이자 영화감독을 꿈꾸는 평범한 고교생 설희를 주인공으로 한 글입니다.
설희는 극중 자신의 작품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 별도의 계정 [이 구역 미친년]을 만들어 악플을 달기 시작합니다. 그건 아주 작은 시작이었고, 사소한 일탈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일탈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결국 자신의 불만과 분노를 쏟아내는 하나의 배출구가 됩니다. 그 배출구는 때로 설희를 위로했고, 때론 설희를 지켜주는 방패막이 되어 줍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키워온 일탈의 감정이 어느 순간 하나의 인격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곤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종래엔 설희 자신도 그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합니다.
생글생글 잘 웃던 친구 민주의 죽음, 사소한 잔소리를 이유로 죽은 아버지, 설희는 충격에 휩싸입니다.
그것은 평범한 여고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응 역시 보통의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지 못 합니다.
하지만 도피처인 부산에서 만난 새로운 사랑 원재, 그를 만나며 설희는 조금씩 다시 삶의 희망을 가집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넓은 가슴으로 설희를 품어주고, 또 함께 키워나갈 꿈을 이야기 합니다. 작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원재의 모습을 보며 설희도 점차 변해 갑니다. 일도 시작했고, 점차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갑니다. 그 사랑과 노력의 결실이 바로 두 사람의 아이였겠죠.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불행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이젠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닐까 했던 설희의 또 다른 자아, 미친년이 눈을 뜹니다. 설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말로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순간에 직면합니다. 결국 꿈꿔왔던 행복과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차디찬 이별과 불행의 부산물 뿐, 결국 설희는 원재에게 면회를 다녀온 그 날 병원 옥상에 오릅니다. 원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미성년자인 그녀의 신분 탓에 어머니에게 연락이 닿았으니까요.
하지만 최후의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동안 설희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두 명의 사람을 죽게 만든 설희의 또 다른 자아가 살기 위해 발악하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에게도 결국 제 생명은 소중했던 걸까요? 치열한 실랑이 속에, 설희는 결국 자신의 뜻대로 병원 옥상에서 투신하게 됩니다.
행운인지 아니면 더 잔혹한 불행인지, 병원에서 눈을 뜬 설희, 목숨은 건졌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어느 하나 설희의 뜻대로 움직이는 곳이 없습니다. 설희는 감옥에 갇힌거죠. 나라는 이름의 감옥, 허나 그 감옥안에서 설희는 행복해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리고 엄마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행복한 결말은 아닙니다. 그리움이 손끝에 닿은 순간, 엄마가 자주 불러주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결국 최후의 최후에도 눈을 뜬 설희의 또 다른 자아... 미친년, 그녀가 꽂혀 있던 링거의 바늘을 뽑고 그 줄로 엄마의 목을 휘감습니다. “까꿍”, 그리고 “엄마 도망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뒷 이야기의 묘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설희와 또 다른 자아 미친년의 마지막 대화로 갈음하였습니다.
어떠셨어요? 줄거리만 적어도 너무 길죠? 같은 생각입니다. 제대로 된 소설이라면 굉장히 짧은 단편에 불과할 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터넷에 올리는 괴담이니까요.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이 소설의 가장 불쌍한 피해자는 누구 일까요?
민주? 아빠? 설희? 원재? 아니면 엄마?
저는 극중 설희의 또 다른 자아 미친년이 바로 가장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헛소리라구요? 무슨 궤변이냐구요?
맞습니다. 약간의 변명을 해보고자 글을 적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미친년은 악인이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의 피해자일 뿐이죠. 자 생각해 봅니다. 미친년은 성인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어린 아기와도 같습니다. 불과 한두살? 설희가 그녀를 세상에 꺼내 놓은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설희는 악마와도 같은 모성을 지녔습니다. 이제 막 세상을 알기 시작한 자아에게 악행의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아이를 키워보거나 아이를 돌본 경험이 있다면 아실 겁니다. 아이들은 마치 스펀지와도 같죠. 어른의 행동, 말, 태도를 순식간에 배워나갑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아이를 탓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극 중 미친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와도 같았습니다. 아이는 엄마와도 같은 설희가 시키는 대로 그녀가 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건 그냥 잘 해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욕보이고, 미친년은 그것으로 말합니다. 나 여기 있다고, 나도 사랑 받고 싶다고...
미친년은 한 번도 민주를 따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설희에게 인정받고자 설희를 핍박한 선생님에게 대들었을 뿐이죠. 민주를 외면한 것은 철저하게 설희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미친년은 그저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여지 것 살아온 방식과 이뤄온 모든 것을 민주가 망치도록 놔둘 수 없었죠. 그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 역시 설희의 방관으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아버지의 살해, 그것 역시 선생님에게 대든 것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릅니다. 미친년은 단지 설희의 바람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어쩌면 칭찬을 바랬는지도 모르죠. 아이들은 대개 그러하니까요. 선과 악 그 개념보다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로 엉뚱한 일을 해냅니다. 다만 미친년의 경우는 그 선택이 극단적이었을 뿐입니다.
설희는 도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친년에게 어떤 의미의 감금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막 세상을 알고, 무언가를 활발히 알아가며 호기심을 충족할 시기에, 설희는 미친년의 세상을 꽁꽁 막고 묶어 버립니다. 미친년은 그때부터 점점 진짜로 미쳐가기 시작합니다. 그건 설희가 쳐 놓은 벽이 너무도 높고 두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원재로 인해 미친년은 점점 궁지에 몰립니다. 설희의 착각은 단지, 물이 둑 안에 고여 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몰랐을 뿐입니다. 물은 계속 그 자리에 고여 있었습니다. 심지어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고 있었죠. 그리고 단 한 번, 처절한 범람이 이루어지자 굳건했던 둑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어쩌면 그건 미친년에게 일종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리기보단 그녀를 억압하기에만 급급했던 모성에의 도전, 허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설희는 아직 세상을 더 알고 싶다 목놓아 외치는 그녀를 옥상 난간으로 끌고 갑니다. 절절한 설들의 말에도 이어진 것은 투신...
사실 어쩌면 그녀는 투신 전까진 설희의 엄마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양이 나비를 칼로 찔러 죽였고, 베란다에서 아버지를 밀어버렸습니다. 엄마는 안방에서 잠들어 있었으니, 그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엄마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죽였다면 설희를 독차지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녀는 단지 설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설희가 그러했던 것처럼 똑같이 복수를 하고자 한 것 뿐입니다.
설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그녀를 멈추려 했던 것처럼, 그녀도 설희의 남은 모든 것을 빼앗고자 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아직도 궤변으로 들리시나요? 상관없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판단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냥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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